난 40대 남자... 쇼핑몰의 큰손이라네

내가 온라인 쇼핑에 푹 빠진 사연

등록 2012.06.26 18:59수정 2012.06.26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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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몸을 실은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느껴지는 이 냄새의 정체는? 그건 바로 나에게서 풍기는 진정한 남자의 향기, 야성미 넘치는 남성 전문화장품 향이다. 어이…, 거기 고개 돌린 아가씨, 향기의 종류만으로 당신 마음대로 나를 정죄하지는 마시라. 80년대 유행하던 태평양표 '쾌남' 유사제품인 이 강력한 향에서 혹시 그대의 어렸을 적 아빠의 향이 떠오르지는 않는가?

착한 가격에 만나는 '목욕탕 스킨'

내가 '목욕탕 스킨'을 사랑하는 이유? 그야 단순 싸구려로 치부하기엔 매력이 너무 많기 때문이지. 광고와 유통과정에 들어가는 모든 거품을 뺀 합리적인 가격에, 배송료까지 합해도 4천원이면 충분하다. 그렇다고 내가 목욕탕 스킨 애호가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착한 가격으로 만날 수 있는 이만한 기능성화장품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남성의 향이 강력해 순한 맛은 좀 떨어지지만 깔끔한 느낌은 그 어느 고가제품도 따라올 수 없다.

피지분비 조절에 이만한 제품이 또 있을까? 목욕 후 얼굴이 당기거나 허옇게 일어날 때 제 몫을 거뜬히 한다. 강력한 향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피부트러블이 일어날 틈이 없다. 오늘 아침에도 듬뿍 바르고 아무 이상 없이 잘 지내고 있는 내가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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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격에 이만한 목욕 전용 기능성화장품이 또 어디 있을까. 종류도 무궁무진하며 배송료까지 합해도 4천원이 안 된다, ⓒ 화면캡쳐


[2]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고도 가족들과 즐겁게 운동을 하며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물론 있다, 가족과 함께 생산적으로 노는 방법엔 운동이 최고이리라. 여름방학 중 느슨해지기 쉬운 생활패턴도 잡고 덩달아 체력도 기르니 일석이조다.

그런 이유로 하루 종일 고민하는 나에게 인터넷 쇼핑몰에서 내려 준 결론은 바로 배드민턴 세트였다. 넉넉한 사은품까지 포함하여 시중가 4만 2000원의 배드민턴채 2세트(4개)를 2만 원 선에 살 수 있다니 눈이 확 뜨이고도 남는다. 지난달에 모은 신용카드 포인트까지 사용하니 실제 구입에 들어간 돈은 1만원 조금 넘는다.


운동도 되고 결속력도 챙기고, 게다가...

싸구려 수준 바로 윗 단계로 업그레이드해서 주문했는데도 택배비를 포함하여 1만 4000원. 이 가격에 셔틀콕을 12개나 덤으로 주다니 과연 판매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가? 주문 다음날, 손꼽아 기다리던 배드민턴세트가 무사히 도착했음은 물론이다. 아내는 물론 아이들이 좋아하니 나까지 기분이 덩달아 좋아지는 게 아빠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뿌듯함까지 만끽한다. 운동도 되고 결속력도 챙기고… 역시, 난 알뜰 천재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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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민턴 라켓 주문내역. 배송비를 합하여 2만원선이다. ⓒ 화면캡쳐


[3]
지난 1월 어느 날, 우연히 방문한 인터넷 쇼핑몰에 '올킬 디지털TV, 42인치 풀-HD LED, 선착순 300대 한정판매, 1월 31일 10시'라는 배너가 눈에 딱 들어왔다. 급하게 클릭하고 보니 50만원대다. 이건 바로 나 같은 사람을 위한 배려 아니겠는가? 쇼핑몰 사장님, 정말이지 눈물 겹도록 고맙습니다.

1월 17일 49만 9000원짜리 42인치 TV 300대가 1분 만에 모두 팔렸다지만, 당시 모델은 LED가 아닌 LCD였다니 나는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평소 사이비 종교인이 말을 걸어와도 뒤도 안 돌아보고 갔었는데 이건 뭐, 판단력이 점점 흐려진다. 동일한 제품을 가격비교 사이트를 통해 확인해 보니 80만 원대다. 더 찾아보고 알아볼 것도 없다. 명색이 국산 디지털 TV인데, 기능이나 디자인이 시대에 크게 뒤떨어지지도 않는다.

한정판매 당일 아침, 천지신명께 절 올리고 끈기와 정확한 시력 그리고 전날 밤 지식문답 코너에서 알려준 기술을 바탕으로 선착순 1분 만에 마감된 그 귀한 물건을 손에 넣고야 말았다. 옵션비용을 포함하여 신용카드 12개월 무이자 할부로 결제한 금액이 75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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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부터 TV 시장에서는 반값TV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대형유통매장과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32~42인치 크기에 LED 백라이트를 탑재한 디지털 TV를 40~50만원대에 판매해 큰 인기를 끌었다. ⓒ 화면캡쳐


온라인 쇼핑몰 큰 손은 바로 40대 남성?

"이제 3분 남았습니다, 빨리 서두르세요!"라는 쇼핑호스트의 말만 들으면 가슴이 콩닥거린다는 아내의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위에서 열거한 구체적인 사례들이 가공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얘기라면? 그렇다, 얼마 전 '온라인쇼핑몰의 큰 손은 바로 40대 남성…'이라는 보도는 그야말로 나와 '싱크로율 100%'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17일 발표한 '우리나라 국민들의 온라인 쇼핑 실태'에 따르면 40대 남성이 온라인 쇼핑에 가장 적극적이라고 한다. 성별로는 남성의 한 달 평균 방문횟수가 6.91회로 여성(10.75회)보다 적었지만 방문횟수 대비 구매비율은 10회당 2.76회로 여성(2.70회)보다 약간 많았다.

또 1회 평균 구매금액도 7만3000원으로 여성 대비 1만3000원 높았다. 특히 40대의 방문횟수 대비 구매비율은 10회당 2.91회로 20대(2.59회), 30대(2.87회)보다 높았다. 열 번 클릭하면 세 번꼴로 구매로 이어졌고, 의류와 신발을 가장 많이 구매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드디어 천기가 누설되고야 말았다. 이젠 장바구니에 담아 두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던 여성들에게 거리낌 없이 돌을 던질 수 있는 중년남성들이 많지 않을 듯하다. 언제부터인가 '구매 포인트 2배적립 찬스'란 유혹에 눈이 아른거려 기어이 사야 할 물건을 억지로 만들어 내고, 이메일로 보내준 쿠폰의 유효기간 걱정에 바깥 일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으니….

초기엔 시중보다 싼 값에 온라인 쇼핑을 이용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월말에 구매등급이 VIP를 유지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 때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최고등급 도달액을 충당하기 위해 주문할 핑계는 없는지 괜히 두리번거리게 되고, 그렇게 또 마우스 버튼을 누르게 됐다.

어느날 아내는 퇴근한 나를 붙들고 눈을 반짝거리며 자랑을 늘어 놓는다,

"여보, 오늘 애들 서랍장 하나 샀는데 어때?"
"뭐? 야! 그거 인터넷에서 사면 모아놓은 포인트에 쿠폰에 게다가 카드 포인트까지 적용하면 몇 만원은 건질 수 있는데… 게다가 구매 포인트까지 적립되고 배송도 공짜란 말야. 도대체,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아휴~, 사기 전에 물어나 보지, 평소엔 전화도 잘하더니 잘난 척은 혼자 다하고… 그러니 살림이 그 모양이지. 아유~ 아까운 돈, 차라리 매장 가서 서랍장 고를 시간에 각종 구매 사이트를 돌며 상품평이나 달면 돈이나 나오지…"

제값 주고 서랍장 산 아내, 여기 '맨붕' 하나 추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쇼핑몰 구매 실적이 시원찮아 VIP등급에서 사파이어 등급으로 떨어질까 노심초사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여기 '멘붕' 하나 추가다. 분명 아내는 아무 생각 없이 디자인이 예쁘다는 이유로 줄 돈 다 주고 구매하고도 남았을 것 같은 이 불편한 느낌.

내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치밀하고 과학적으로 경제적인 구매패턴을 가지게 된 건, 내 혈액형이 AB형이라 그런건 결코 아니다. 내가 내 아이디 앞에 VIP마크 올리려고 공들인 게 얼마인데...

많은 사람들이 명품을 선호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시장표'를 2켤레 사기보다는 '나O키' 한 켤레의 신발을 산다. 사실 명품을 선호하기 보다는 브랜드가 주는 가치를 선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싸게 + 자주' 사는 것을 선호한다. 시장표 키높이 구두와 백화점에서 파는 브랜드 구두는 질적인 차이가 분명 있겠지만 가격차이만큼의 기능적인 면이 차이가 나는지는 의문이다.

나를 비판하고 비난하고 정죄하지는 마시라. 내가 이래 뵈도 5성급으로 불리는 VIP등급이다. VIP는 아무나 되는 줄 아는가. 소쩍새처럼 울고 또 우는 힘겨운 사연을 통해야만 세상에 탄생된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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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란 VIP마크를 달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화면캡쳐


'내 아이디 구매등급을 VIP로 만들기 위해/ 생활용품부터 먹을거리까지/ 택배아저씨의 초인종은 그렇게 울었나 보다// 내 구매 포인트의 점수를 현금화하기위해/ 장바구니 리스트 속에서 마우스의 스크롤은/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을 닮은 아이디여// 노오란 VIP마크를 달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온라인 쇼핑몰에서 산 4000원짜리 스킨을 바르고, 1마리에 990원꼴인 자반고등어 반찬으로 밥을 먹고, 4만2000원짜리 키높이 구두를 신고 차에 몸을 실었다. 시동을 걸자 5만9000원짜리 블랙박스 카메라가 딩동하며 나를 반긴다. 오디오에서는 1만5000원짜리 USB를 통해 최신음악이 흘러 나온다. 아 참, 우리 큰 아들 중1 기말고사 대비 문제집은 다음주까지가 기한인 '30% 할인 도서쿠폰'으로 오늘 출근하자마자 주문해야지.

심리적 불안감을 줄이려 의류, 화장품, 핸드백 등을 판매하는 쇼핑몰을 습관적으로 방문해 충동구매를 하는 여성들과는 근본부터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아내가 나와 똑같이 한다면? 아니아니 아니 되오! 등급유지는 물론이고 포인트 유효기간 관리나 제대로 하겠어?
#온라인쇼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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