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고 짖어대던 그 녀석 덕분에 시를 짓다

[시] 그 녀석에게도 꿈이 있으리라 믿는다

등록 2012.07.09 11:18수정 2012.07.10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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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백화산에서 보는 태안읍 전경과 서해 충남 태안읍 백화산을 오르면 우선 풍광에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오른쪽 들판 바로 앞 바다가 내가 자주 가는 '장명수'이다. 읍내에서 4Km 남짓이다.

백화산에서 보는 태안읍 전경과 서해 충남 태안읍 백화산을 오르면 우선 풍광에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오른쪽 들판 바로 앞 바다가 내가 자주 가는 '장명수'이다. 읍내에서 4Km 남짓이다. ⓒ 지요하


술 한 잔 걸치고 감미로운 취흥 속에서 시를 읊고 했던 시절을 가끔 추억하곤 한다. 다 지나간 시절이고, 일장춘몽 같았던 세월이다. 스스로 '성인병백화점'이라 부를 정도의 만성 질환들 탓에 이제는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다. 젊은 시절 한때 중국소설 <수호지>에 나오는 땡초 '노지심'으로 불릴 정도로 두주불사했던 사람이 이제는 술잔에 손도 대지 않으니, 사는 재미가 거지반 거덜 나버린 신세다.


여전히 목이 마를 때가 있건만 그때마다 쓴웃음 지으며 꾹꾹 참는다. 마른 논에 물 대듯 시원한 막걸리 한 대접 목구멍 꽉 차게 마셔보고 싶건만, 이미 예전에 '그림의 떡'이 되어버렸은 즉, 침만 삼키고 만다. 해탈한 사람 모양으로 별 동요 없이 무심한 표정으로 일관하지만, 때로는 많이 슬프고 울고 싶도록 비참하다.

딸아이 아홉 살 시절, 백화산에 올라 막걸리 마시며 시 읊기도...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교원임용고시 준비를 하는 딸아이가 아홉 살이던 시절의 어느 하루 풍경도 가끔 떠올린다. 막걸리 한 병과 '뽀빠이'라는 과자 한 봉지 사 들고, 아이들을 데리고 백화산을 올랐다. 태안 읍내 전경이며 천수만과 안면도 쪽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너럭바위 위에 앉아 혼자 막걸리를 마셨다. 시월 하순,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이 환장지경, 어지럼증을 안겨주던 날이었다.

감미로운 취흥에 값하기 위해 일어서서 가다듬은 목소리로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다. 모국어로 빚어진 아름다운 애송시들을 몇 수 읊고 가곡 몇 곡을 부르고 나니, 취흥은 더욱 도 저해 졌다. 그리고 괜찮은 시상들이 물밀 듯이 줄줄이 밀려들었다.

샘솟듯 솟아오르는 시상들을 메모라도 해놓고 싶었지만, 몸에 지닌 것이 없었다. 명색 문인이라는 사람이 몸에 종이 한 장, 볼펜 한 자루도 지니지 않고 다닌다니, 나 자신이 한심했다. 괜히 한탄만 하는데, 홀연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다.


나는 딸아이를 옆에 불러 앉혔다. 그리고 다섯 가지의 시상을 요약해서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아이의 귀에다가 메모한 셈이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서는 아이들 먼저 집에 들어가게 해놓고, 나는 술집으로 행차했다. 그날 떡이 되도록 술을 마셨다.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기울여보았지만, 전날 백화산에서 얻었던 시상들은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듯한 시상들이 여러 개 줄줄이 떠올랐다는 것만 생각날 뿐 시상 자체는 한 가지도 기억이 나지 것이었다.


하지만 메모를 하지 못하는 대신 딸아이에게 시상들을 요약하여 들려주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딸아이에게 물으니 녀석은 다섯 개의 내 시상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다섯 편의 시를 지을 수가 있었다. 그런 에피소드를 형상화한 <고마운 딸아이>라는 시도 지을 수 있었고….

그게 1997년의 일이니 벌써 15년 전 얘기다. 이제는 그때의 그 같은 그림을 다시 만들 수 없다. 다 지나간 이야기다. 술을 마시지 못하니 취흥을 얻을 수 없다. 취흥이 없으니 시흥도 없고 시상도 떠오르지 않는다. 건강문제 때문에 매일 오후 맨정신으로 걷기 운동을 하면서, 때로는 백화산이나 장명수 해변에서 혼자 시를 읊고 가곡도 부르고 하지만, 흥취보다는 애조가 앞을 선다. 애조 어린 음색일망정 열심히, 또는 열렬히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건만 시상 같은 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시를 거의 짓지 못한다. 어쩌다 짓는 시는 '목적시'일 뿐이다. 목적시는 더러 지으며 살지만, 일반 시는 지어본 지가 꽤 오래되었다. 어쩌면 언어도단의 세월을 살아가면서 이 언어도단의 시대에 시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싶은 마음 탓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언어도단의 시대를 온몸으로 체감하기에 더욱 뜨겁게 시를 짓고 싶건만, 여전히 시상이 떠올라주지 않는다.

당뇨와 고혈압과 통풍 등 세 가지 만성질환에다가 신장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 앞에서 그래도 열심히 묵주를 손에 쥐고 매일 오후에는 두 시간씩 걷기운동을 한다(두 시간을 걸어야 묵주기도 하루 기본 40단을 바친다). 아직은 매일 두 시간씩 걸을 수 있는 몸 상태와 생활조건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한다.

건강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하니 '취흥'이나 '시흥' 얻을 수 없다

a 밀물을 맞이하는 갈매기들 밀물 때는 갈매기들이 많이 모여든다. 밀물이 먹이를 많이 실어오는 모양이다.

밀물을 맞이하는 갈매기들 밀물 때는 갈매기들이 많이 모여든다. 밀물이 먹이를 많이 실어오는 모양이다. ⓒ 지요하


요즘 내가 주로 걷는 곳은 '장명수' 해변이다. 얼마 전에 <'장명수산조'를 들려드립니다>라는 글로 소개했던 곳이다. 주로 장명수를 가는 첫째 이유는 어렸을 적의 추억이 가장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종종 10리 길을 걸어가서 망둥이낚시를 하고, 대합을 잡고, 염전저수지에서 멱을 감기도 했던 곳이다.

바로 아래 누이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말미잘을 찾아 갯벌 길을 오래오래 걸었던 그림도 있다. 또 갯고랑 그물질로 새우, 게, 망둥이, 장대, 깔때기(어린 농어) 등을 잡아 해변에서 매운탕을 끓여 먹던 날의 그림도 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들 속을 걷다 보면,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그런 나를 느끼며 당황해 하기도 한다. 그런 감흥들이 좋다. 그런 감흥들을 한두 번, 하루 이틀 접한 것도 아니건만, 늘 새롭고 아련하고 꿈결 같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내가 주로 장명수를 가는(가야만 하는) 명확한 이유 한 가지가 새로 추가되었다. 근흥면 두야리 해변, 농어촌공사 수문 옆에 있는 집 마당의 개들 때문이다. 그 집에는 잡종 삽살개 두 마리가 있다. 모자 관계다. 나이 먹은 어미 개는 목줄에 매여 있지 않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데, 어린 자식 개는 노상 목줄에 매여져 있다.

a 행동이 자유로운 어미 개 목줄에 매여 있지 않은 어미 개는 나를 보면 울타리 밖으로 나와 반갑게 마중한다. 목줄에 매여 사는 자식 개 덕분에 어미 개도 과자 맛을 보곤 한다.

행동이 자유로운 어미 개 목줄에 매여 있지 않은 어미 개는 나를 보면 울타리 밖으로 나와 반갑게 마중한다. 목줄에 매여 사는 자식 개 덕분에 어미 개도 과자 맛을 보곤 한다. ⓒ 지요하


모자관계인 개 두 마리를 왜 그렇게 차별하는지 궁금하다. 왜 자식 개만 그렇게 목을 매 놓고 있는지 주인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는데, 아직 실행 못 하고 있다. 밖에 나와 있는 주인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집 앞 채마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그것에 대해 아예 관심조차 둬보지 않은 눈치였다.             

목줄에 매여 있는 녀석이 처음에는 나를 보고 몹시 짖어대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보면 좋아 죽을 양이다. 내가 주는 과자 때문이다. 그 녀석 때문에 장명수를 가게 되고, 장명수를 가게 되면 으레 물병을 넣는 작은 가방 안에 과자나 빵을 넣고 간다. 어쩌다 가방 안에 먹을 것을 지니지 않게 되면 그 녀석이 있는 집을 우회하곤 한다. 반가워 죽을 지경인 그 녀석을 실망시키는 것이 너무 미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뜻밖에도 그 녀석을 소재로 시 한 편을 짓게 되었다. 나를 보면 멀리에서부터 반가워 죽을 양인 녀석, 과자 먹을 생각에 혀부터 날름거리는 녀석, 창살 울타리 안으로 과자를 던져주면 환장한 듯이 주워 먹는 녀석을 보자니 안쓰럽고 불쌍한 마음에 불현듯 시를 하나 쓰고 싶은 생각이 났다.

어차피 시를 포함하여 나의 모든 글은 내 생활이고 삶이 아니던가. 녀석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시 한 편 짓게 되었고, 처음으로 목줄에 매인 개를 소재로 시를 짓게 되었다. 시를 짓고 나서 아내에게 읽어보게 하니, 아내가 재미있는 말을 했다.

"그 개가 당신에게서 과자 얻어먹는 보답으로, 당신께 좋은 선물을 했군요."
"좋은 선물? 그러네. 의미 있는 선물이네. 그 녀석이 내게 시 선물을 했어." 

저절로 나간 말이지만, '시 선물'이라는 말을 하고 보니 적절한 말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 녀석이 더욱 가엾어지는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목적시들을 제외하고는 참 오랜만에 지어본 시였다.

개에게서 받은 시 선물, 내가 오랜만에 지어본 목적시 아닌 일반 시 한 편을 오늘 독자 여러분께 소개한다.

a 반가워하는 개 목줄에 매여 사는 탓에 처음에는 내게 미친 듯이 적의를 드러내던 개가 이제는 나를 보기만 하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반가워 죽을 양이다.

반가워하는 개 목줄에 매여 사는 탓에 처음에는 내게 미친 듯이 적의를 드러내던 개가 이제는 나를 보기만 하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반가워 죽을 양이다. ⓒ 지요하


그 녀석에게도 꿈이 있으리라 믿는다

또 하루해가 서편으로 기우는 시각에
걷기운동을 나선다
오늘도 그 녀석이 기다리고 있는
장명수 해변을 선택한다
물병을 담은 작은 가방 안에는
과자도 들어 있다

하루 종일 밤낮 없이
목줄에 매여 사는 녀석
풀잎이며 길바닥을 쓸고 가는 바람도
밀물 썰물이 들고 나는 장명수 해변도
그 녀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를 처음 보던 날
미친 듯이 적의를 드러내던 녀석이
과자 맛을 한 번 본 후로
나는 그 녀석의 뇌리에 각인이 되었다
나를 금방 알아보고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반가워 죽을 양이다

장명수를 가지 않을 수 없다
장명수를 갈 때마다 과자를 지니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녀석이 꿈을 꾼다는 것을 안다
그 녀석에게도 꿈이 있음을 안다

오랜만에 날 보게 되었을 때도
녀석은 날 금방 알아본다
녀석은 날 잊지 않는다
그런 녀석을 실망시킬 수가 없다

녀석은 잠을 자면서도
나를 보는 꿈을 꿀지 모른다
꿈속에서도 나를 보기에
그토록 나를 반가워하는지 모른다

잠을 자지 않을 때도
녀석은 나를 보는 꿈을 꾸고
그 꿈 때문에 목줄을 견뎌낼지도 모른다

내 손으로 녀석의 목줄을 풀어줄 수는 없다
그래도 녀석에게 한 순간이나마 생동감을,
반가움과 기쁨을 안겨 줄 수는 있다

반가움과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녀석이기에
녀석에게도 그리움이 있음을 나는 안다
녀석은 매일매일 나를 그리워할 것이다
또 무언가를 매일매일 그리워할 것이다
녀석의 그리움을 한 순간이나마 공유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장명수를 간다
장명수 해변을 간다.
#목줄에 매인 개 #백화산 #장명수 #취흥과 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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