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향한 일편단심, 금성대군의 한

[김수종의 영주 여행기 6] 충절의 고장 영주에서 만난 은행나무 압각수

등록 2012.07.10 11:04수정 2012.07.1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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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가흥동 구학공원의 삼판서 고택 뒤에는 1433년(세종 15년)에 창건된, 오늘날의 보건소와 같은 의료기관인 제민루가 복원되어있다. 제민루는 의국(醫局)과 의약소(醫藥所)를 운영하면서 강원, 경북 내륙지역의 한약교역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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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민루 오늘날의 보건소 같은 곳이다. 영주시 구학공원에 있다 ⓒ 김수종


제민루는 1961년 사라호 태풍 당시 홍수로 붕괴된 것을, 지역 사림들이 뜻을 모아 1965년 현 위치로 옮겨왔다. 이후 관리 미흡과 소홀로 한동안 방치되어 있던 제민루는 지난 2007년 정부지원을 받아 지금의 모습으로 개축되었다.

아울러 삼판서 고택 바로 뒤에는 1961년 사라호 태풍으로 크게 피해를 입은 영주의 복구 사업이 대충 완료된 시점인 이듬해 3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 장군이 방문하여 기념식수한 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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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식수한 나무 영주시 구학공원에 있는 나무, 1961년 영주의 대홍수 복구 후 기념 식수 ⓒ 김수종


원래의 나무가 고사하여 현재의 나무는 동일한 수종으로 다시 식재된 것으로 당초의 나무는 아니다. 물론 안내판도 있어 내용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나무까지 본 우리들은 잠시 시간이 있어 충절의 고장 순흥면으로 이동하여 '순흥선비주'를 만드는 순흥양조장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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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신단 제실 ⓒ 김수종


나와 친구들은 막걸리 한잔을 마시며, 비오는 날의 여독을 날리고는 이웃한 금성대군신단으로 이동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넌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란 소릴 들어보았을 것이다. 동생보다 매를 한 대라도 더 맞거나 하면 '난 정말 다리 밑에서 주워온 게 아닐까'

설움도 느꼈을 거다. 그러다 사춘기가 되면 생각한다. 서양에선 아기를 황새가 물어다 준다는데 왜 우린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는 걸까 의문이 든다. 그러다 아하! 하며 떠오르는 생각. 그 다리가 그 다리군! 참 옛날 사람들은 위트가 있다.

그런데 세상에! 그게 아니란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의 다리라는 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다리가 아니란다. 진짜 다리란다. 그것도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역사에 묻힌, 참으로 슬픈 사연을 간직한 다리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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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신단 금성대군신단 입구 ⓒ 김수종


경상도 북부 지방에서 흔히 '청다리'라고 불리는 '죽계제월교'는 순흥읍 청구리에 있다. 쉽게 말하면 금성대군신단에서 금성대군의 위리안치지로 가는 길목이다. 지금은 역사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새로 지은 냄새가 폴폴 나는 흔하디흔한 작은 다리지만, 흐르는 죽계천을 내려다보며 어두운 역사의 한 자락을 생각하면 맘이 무거워진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이를 반대한 금성대군은 당시 순흥도호부인 이곳으로 위리안치의 형을 받고 온다. 유배 중에도 금성대군은 단종 복위를 위해 비밀리 거사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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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신단 금성대군신단 문 ⓒ 김수종


순흥부사였던 이보흠을 선두로 고을의 군사와 향리를 모았고, 영남지방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거사를 감행하기도 전에 밀고로 발각되면서 금성대군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결국 금성대군과 이보흠, 그리고 수많은 영남 선비들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역모에 동참한 혐의로 가문이 멸족당하는 등 수천 명이 죽계천에 수장되었다고 한다.

죽계천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도 안정면 동촌리에 '피끝'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는 마을이 있어 그날의 피비린내를 짐작하게 한다. 이때 등장하는 무대가 '청다리'이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나 멸족의 위기를 모면코자 부모들이 외부의 눈을 피해 피신시킨 아이들이 다리 밑으로 모여든 것이다.

결국 고아들의 집성촌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기 시작하면서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란 말이 생겨났단다. 이런 씁쓸한 어원도 모르고 낄낄대기만 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단종 복위를 둘러싼 비극적인 사건으로 순흥도호부는 폐지되었고, 한강 이남에서 제일 큰 고을 중 하나였던 순흥은 졸지에 역모의 땅이 되어버렸다. 순흥도호부 처마만 따라가면 10여 리는 비를 맞지 않았을 정도였다던 집들도 불바다로 변하여 인적조차 찾기 힘들어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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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신단 금성대군신단 ⓒ 김수종


그 후 200여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숙종 때가 되어서야 금성대군과 역적으로 몰렸던 선비들이 복권된다. 비극의 상처를 안고 살던 순흥 사람들은 금성대군이 죽어서 소백산의 산신령이 됐다고 믿고, 금성대군과 이보흠 등 비명에 간 영남 선비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제단을 세웠다. 그곳이 바로 금성대군신단이다.

신단은 두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쪽의 앞 공간은 제향과 관련된 제청(祭廳) 공간이고, 북측의 뒤 공간은 단소로 되어 있는 공간이다. 제청 공간은 토석담장을 돌린 방형 내에 다시 담장으로 구획된 재실(齋室)과 관리사로 나누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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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신단 금성대군신단, 이곳은 대군의 무덤같은 곳이다. ⓒ 김수종


ㄱ자형으로 지어진 동쪽의 재실은 가운데 3칸을 마루로 깔았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다. 마루 중앙에는 금성단기(錦城壇記), 금성단중수기(錦城壇重修記), 재실상량문(齋室上樑文), 흥주고부은행수기(興州故府銀杏樹記) 등의 현판이 잔뜩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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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신단 금성대군신단 ⓒ 김수종


휑한 단을 둘러보다 담 너머 왼편으로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오호라, 저것이 그 유명한 '압각수'임에 틀림없었다. 은행나무 잎이 오리 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압각수(鴨脚樹)라는 이름 지어진, 수령이 1200년도 넘는다는 이 은행나무 거목은 지금도 가을이면 은행이 탐스럽게 열린단다. 

금성대군이 사시된 정축년, 은행나무가 말라 죽었으니 산천도 슬픈 빛을 띠고 천지도 온통 원통한 기운에 잠겼으며, 길 가는 나그네들도 폐허를 지나면서 마음 아파했고, 마을 아이들도 나무를 안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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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신단 금성대군신단 옆, 압각수 ⓒ 김수종


감히 나무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으나 비바람에 상하고 들불에 타버려 껍질은 벗겨지고 속은 비어, 남은 것은 다만 두어 길의 밑동뿐이었다. 일찍이 어느 노인이 지나가다가 이르기를 "흥주(興州)가 폐해지면 은행나무가 죽고, 은행나무가 살면 흥주가 회복될 것이다"라고 했다.

고을 백성들이 그 말에 감개해서 전송해 온 것이 대개 227년이었다. 1681년(숙종 7) 봄에 비로소 새 가지가 나고 잎이 퍼지더니, 그 3년 뒤인 1684년(숙종 10)에 과연 흥주부를 회복한다는 어명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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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신단 금성대군신단 , 압각수 1200년 된 은행나무다 ⓒ 김수종

#금성대군신단 #영주시 #삼판서 고택 #순흥선비주 #제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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