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 역사를 부치다> 겉표지
정은문고
<우표, 역사를 부치다>는 이런 우표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우표의 탄생이나 우표의 역사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한 국가가 혁명이나 전쟁 같은 격동기에 우표라는 '국가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여러 나라의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물론 평화로운 시대에도 이런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롭고 안정된 국가보다는 정치나 사회적으로 격렬한 변화나 분쟁이 있었던 국가에서 더 흥미롭고 적절한 예를 찾을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국가들, 북한을 포함해서 베트남, 필리핀, 일본, 쿠바, 이란, 이라크 등은 확실히 그런 의도에 부합된다. 이 국가들은 20세기 들어서 전쟁 또는 혁명을 겪었으며 그 결과로 일정 기간 혼돈의 시기를 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위 국가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모두 현대사에 미국의 발자취가 부정적인 측면에서 깊숙하게 남아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각국의 정부들은 전쟁이나 혁명 기간 동안 미국을 비난하고 조롱하거나, 아니면 반미 의식을 고취시키려는 의도의 우표를 발행하곤 했다.
예를 들어 일본은 1942년에 발행된 대동아전쟁 1주년 기념우표, 그다음 해에 발행된 대동아전쟁 2주년 기념 엽서에 일본 전투기들이 하와이의 진주만 기지를 공습하는 장면을 그려 넣었다.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에, 미군기가 추락하는 그림과 함께 자신들이 격추시킨 미군기의 수를 표시한 우표를 꾸준히 발행했다. 미군이 계속 패배하는 상황을 대내외에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우표가 남침을 증명한다고?저자는 또한 우표를 통해서 흥미로운 해석을 하기도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은 1950년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했다. 그리고 7월 10일에 서울점령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이 우표에는 서울 정부청사에 걸린 북한 국기를 담았다.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보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안에 우표를 발행했다는 점으로 미뤄 볼 때 북한은 사전에 우표 발행을 준비해뒀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저자는 이를 근거로 북한이 사전에 남침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했다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미국에 의해서 혁명과 독립이 가로막힌 나라들이 어떻게 우표를 통해서 미국에 저항하는지를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란은 1983년에 발행된 테헤란 미국 대사관 점거 4주년 기념우표에 불타는 성조기를 그려 넣었다. 이라크는 클린턴의 백악관 스캔들이 터졌을 때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모습을 우스꽝스러운 그림으로 표현한 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이런 식의 조롱이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미국이 가진 강력하면서도 사악한 군사력 때문에 공격적인 반미를 외치기 힘들다면 우표를 통해서 은유적으로 반미를 표현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이다. <우표, 역사를 부치다>에는 우표가 기록한 반미의 역사를 담고 있다. 우표에 역사가 담겨있다면, 우표를 수집하는 것은 곧 역사를 수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