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했다고? 정말일까

[TV리뷰] KBS <역사스페셜> "측우기 발명은 문종 작품"

등록 2012.08.24 14:51수정 2012.08.2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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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우량관측 제도를 전국 도에 시행한 것은 1442년의 일로, 구주 로마보다 200년 앞서고 에도 막부시대보다 280년 이르다는 사실은 실로 경탄하는 수밖에 없다."(<조선측후사략>)

'제도교육을 통해 알고 있었던 장영실의 세계최초 측우기 발명이 사실이 아니라면….'


23일 오후 10시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111회)에 따르면 세종시대 천문과학의 불가사의한 업적을 남긴 측우기가 장영실의 독창적인 발명품이 아니라 세자(문종)의 아이디어로 개발된 작품이었다고 해 역사교육학계에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난 2004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문중양 연구교수가 '이달의 과학기술 인물 장영실 세미나'에서 밝힌 것과도 일치된다. 당시 문 교수는 "조선시대의 정식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 측우기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당시 세자이던 문종이라고 분명히 나와 있다"고 명확히 언급했다.

문 교수는 또한 측우기 발명년도인 1442년에 장영실이 가마 사고의 책임을 물어 관직을 박탈당해 직접 참여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문 교수는 "후에 장영실 가문 족보의 기록과 구전에 의해 그렇게 알려져 왔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극심한 봄 가뭄... 농업 국가를 뒤흔들다

<역사스페셜>은 측우기 발명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세종23년 당시 조선은 농업 국가였다. 하지만 봄마다 극심한 가뭄이 들어 제때 물을 대지 못해 피해가 컸다. 더욱이 고려 말 전파된 신농법인 이앙으로 가뭄의 피해가 확산되고 흉작의 규모는 더 심각해졌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다양한 가뭄 해결 방법을 동원했고 심지어 왕이 직접 기우제까지 지내는 일도 다반사였다. 조정은 비가 올 때마다 흙의 깊이를 측정, 강수량을 관측하는 우택이라는 방법을 초기에 사용했다. 하지만 토양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우량을 일률적으로 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역사스페셜>에 따르면, 그러던 중 '비 온 뒤 그릇에 고인 물의 깊이를 재는 도구' 라는 세자(문종)의 아이디어에 착안해 1441년 8월, 빗물의 양을 수치로 계측하는 첫 시도를 하게 된다. 이후 수차례의 실험과 수정 끝에 이듬해 1442년 드디어 측우기의 이름이 실록에 정식으로 기록되고, 그 크기 역시 구체화 됐다. 세계 최초의 독창적인 천문기상 관측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442년 호조에서는 전국 8도는 물론 지방의 군현 총 334개소까지 동일한 규격의 측우기를 보급했다. 당시 측우기는 우량의 최소 단위기준인 초, 푼까지 기록되었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평균 강우량을 계측했다. 이는 현대의 기상관측과 거의 동일한 과학수준이었다.

이후 각종 전쟁 등으로 중단된 측우기 사용이 영정조 시기 다시 부활됐다. 특히 정조는 우택 보고에 큰 관심을 기울여 하루 세 번, 7년가량 연간 총 우량을 비교 분석하게 했다. 이를 통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강우량 보유국이 된 것이다.

<역사스페셜>은 이를 근거로 한 서울대 지구환경과학과 전종갑 교수의 이론을 소개했다. 우리나라 최악의 가뭄사태가 120년 만에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최근 100년 만에 벌어진 가뭄현상이 이를 방증해주는데 근대 최악의 가뭄사태가 바로 1901년도 발생했기 때문이다. 전 교수는 "전체적인 데이터를 분석해본 결과 120년 후인 2020년께에는 아주 극심한 가뭄피해가 예상될 수 있다"고 말해 충격을 줬다.

가뭄을 대비한 다양한 발명품... 세계과학을 접수하다

천재지변이 많았던 삼국시대부터 천문과학은 주요한 조정의 관심사였다. 백제는 일찍부터 발달한 천문지식을 일본에 전달하기도 했으며 신라에서는 최초의 천문 관측기관인 첨성대를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 세종대왕에 이르러 간의, 자격루, 혼천의, 앙구일부, 수차 등 모든 발명품이 집대성했다.

한국수자원공사 자료에 따르면 조선시대 가뭄은 1차 피해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은 1년 동안의 기근으로 이어져 수해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고 전했다. 때문에 가뭄이 극심하면 백성들은 물론 왕도 직접 나서 고통을 함께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점차 하늘의 별자리를 통해 날씨를 알기위해 노력했고 땅의 기운과 바람을 매개로 당시 기상관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례로 김제의 벽골제, 상주의 공검지, 의성의 대제지,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지 등이 삼한시대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방이다.

제방은 가뭄을 대비해 물을 가두어 두었던 저수지로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전해진다. 저수지는 현재까지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듯 예나 지금이나 물은 역사를 가르며 민생을 달래고 있다.
#측우기 #문종 #역사스페셜 #장영실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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