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았다, 손바닥만한 바퀴벌레를

[공모-나는 세입자다] 여대생 P양이 겪은 '한밤의 사투'

등록 2012.10.17 09:50수정 2012.10.1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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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그'와 처음 마주친 것은 2009년 겨울날이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좋아질 거야!' 믿던 순진한 수험생 시절을 끝내고 처음 자취를 시작한 그때의 일이다.

사실 고등학교 3년 내내 꿈꾸던 화려한 독립은 알고 보면 꽤나 남루한 것이었다. 어느 날 나와 내 룸메이트는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TV도 없이 오로지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밥을 먹던 중 나는 친구가 등진 쪽의 벽을 기어오르는 작은 벌레를 보았다. 사람은 저마다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내 경우 그것은 넷 이상의 다리가 달린 어떤 것들, 다시 말해 곤충류다.

밥을 먹다 말고 아연해진 나를 보던 친구가 내 시선을 따라 자신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헉', 우리 둘은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했지만 용감한 간호학도였던 룸메이트 A양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를 말아 쥔 후 벌레를 잡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다툼이나 충돌로 앙금이 남아 있던 마음을 녹일 만큼 늠름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이건 무슨 벌레야?"
"응, 이게 바퀴벌레야."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한 번도 이전에 바퀴벌레를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전설 속에나 나오는 봉황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실제로 보다니,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움직이는 얼룩... '내 방에 저렇게 큰 얼룩이 있었나?'

 살인마보다 바퀴벌레를 더 무서운 대상으로 패러디한 BAYGON(BAYER사의 바퀴벌레약)의 광고
살인마보다 바퀴벌레를 더 무서운 대상으로 패러디한 BAYGON(BAYER사의 바퀴벌레약)의 광고BAYER

1년 뒤 룸메이트와의 생활을 끝낸 후 운 좋게도 '진짜 독립'을 할 수 있었다. '나만의 방'을 갖는다는 설렘에 수일에 걸친 짐정리와 이사가 힘든 줄도 몰랐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새로 이사한 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나는 또 다른 문제와 부딪히고 말았다.


방에는 이미 주인이 있었다. 개미였다. 과제를 하기 위해 노트북이라도 열라치면 개미들은 사이좋게 키보드 위를 줄지어 기어가고 있거나, 종종 침대 위에 출몰하여 잠을 자려던 나를 기함하게 만들었다. "소독을 했기 때문에 깨끗하다"던 집주인의 말과는 달리 무슨 이유로 개미가 나오는지는 몰랐지만 내 집이 아닌 이상 방역업체를 부르는 것도 무리일 듯싶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가며 개미를 쫓는다는 민간요법을 써보았다. 꼼꼼한 청소와 함께 살충제며 물에 희석시킨 식초용액을 분무기에 담아 곳곳에 뿌리고, 집에서는 과자 한 쪽 달디단 사탕 한 알도 먹지 않으며 석 달여를 보냈다. 신기하게도 개미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한동안 나는 독립의 단맛을 즐기며 '더 이상 내 방에 벌레란 없다'는 도취감에 취했다. 물론 착각이었다.


2011년 늦가을께 나는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뒤척이다 반대편 벽을 보는 순간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내 방에 저렇게 큰 얼룩이 있었나?'

나는 지독한 난시라 안경 없이는 사물을 구별할 수 없었고, 다만 어째서 얼룩이 천천히 이동하는가를 잠시 생각했다. 얼룩도 벽지 무늬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 손바닥 크기의 바퀴벌레였다. 그 이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그만큼 거대한 크기의 벌레는 종(種)을 막론하고 다시 볼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만큼 큰 것이었다.

그때 불현듯 '저것이 나를 향해 날아오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위기감이 찾아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행여 '그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용히 잠자리를 빠져나와 달랑 전화기만 들고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저히 혼자 잡기엔 엄두가 나지 않는 크기였다.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건 덕분에 친구 한 명이 5분도 안 되어 출동해 주었다. 그런데 나와 마찬가지로 시력이 썩 좋지 않던 친구 B양의 얼굴에는 안경이 없었다.

"안경은 어디다 두고 왔어?"
"어, 정확히 보면 잡을 용기가 안 날 것 같아서 일부러 벗고 나왔어."

손바닥과 카드 손바닥과 교통카드를 두고 크기 비교 사진을 찍어보았다.
손바닥과 카드손바닥과 교통카드를 두고 크기 비교 사진을 찍어보았다.박가영

이 방의 주인은 나인가 '그분'인가... 제발 다시 만나지 말아요

놀랍게도 '그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우리는 밀림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법한 크기의 벌레를 잡기에는 너무나 여리고 소심한 여대생들이었다. 역시나 크기를 보고 압도된 B양은 숨을 잠시 크게 쉬더니 결심을 한 듯 '악' 하는 단말마 비명과 함께 벌레를 잡아주었다. 정신없이 처치한 벌레를 치우고, 덜덜 떨며 '그분'의 자취를 정리했다.

이튿날 아침 나는 밤새 수집한 정보를 가지고 벌레를 퇴치하기 위해 벌개진 눈을 비벼가며 분투했다. 보통 학생들이 자취를 하는 원룸이나 다세대 주택은 옆방이나 건물에 있던 벌레가 옮겨올 수도 있다는 말에 문과 창문 틈을 꼼꼼히 메우고, 독한 살충제를 곳곳에 뿌렸다. 또 은행잎이나 고무 냄새를 싫어한다는 말에 침대며 책상 근처에 그것들을 두고 제발 바퀴벌레가 또 다시 나타나지 않기만을 정성껏 빌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신용카드 반 정도 크기의 그것들은 종종 나타나 나를 눈물짓게 만들었다. 모두 잠든 새벽, 벌레를 잡지 못하는 자취생 P양(바로 나다)은 자신의 밝은 잠귀와 약한 담력을 원망하며 편의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거나, 24시간 커피전문점으로 피신해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그렇게 벌레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나는 사정이 생겨 그 집을 떠났고, 휴학과 함께 잠시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반 년 뒤 다시 돌아온 새 자취방 앞에서 매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현관문 앞에 선다. 부디 문을 열었을 때 혹시나 '그분'을 보게 되지 않기를 빌며 말이다. 이 방의 주인은 나인가 벌레인가 하는 의문, 또 언젠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걱정 반 체념 반의 상태로 기도하곤 한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손잡이를 잡는다.

'거기 안에 누구 있어요?'
덧붙이는 글 '나는 세입자다' 응모글입니다
#나는 세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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