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주사>가 명작? 그렇다면 당신은 주당!

[노래의 고향 28] 정철 묘소가 있는 진천

등록 2012.12.04 13:45수정 2012.12.04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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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의 사당과 묘소는 충북 진천에 있다. 그를 찾아가는 길에서 본 하늘이 너무나 아름답다. 들판 끝에 보이는 건물과 집들이 진천 읍이다. 진천 읍에서 뒤로 고개 하나를 넘어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그 삼거리에서 더 직진하여 들어가면 태령산 아래에 김유신 생가가 있고, 왼쪽으로 접어들면 금세 정철의 사당과 묘소를 만나게 된다. ⓒ 정만진


송년회냐 망년회냐 논란도 있지만, 연말이면 아무래도 술자리가 잦게 마련이다. 풍문으로는 12월의 술 판매량이 보통 달의 2배가량 된다고 한다. 게다가 올해 12월은 대통령까지 뽑는다. 기분이 좋아서든 나빠서든 술 한 잔을 더 마시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오늘은 '술꾼' 이야기를 펼쳐볼까 한다. 

세상이 알아주는 술꾼은 누구일까? 중국은 이백, 우리나라는 정철이다. 정철은 우의정 등 중앙정부의 고관이었지만, 술에 취해 복장이 흐트러진 채 근무하는 일이 잦았다. 오죽하면 동갑 친구 이율곡이 '술을 줄이고 말을 삼가라'고 충고할 정도였을까.


그가 엄청난 주당(酒黨)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유명한 일화는 사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반추'를 거듭해도 재미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폭소를 자아내니 여기서도 되풀이하여 소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선조가 정철에게 은잔을 하사했다. 그가 술을 너무 자주 마시고 취해 있는 때가 많았기에 임금으로서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던 까닭이다. 선조는 정철에게 '하루에 이 잔으로 한 잔씩만 마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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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사당은 충북 진천에 있다. 그리고 그의 묘소는 사당에서 왼쪽 산등성에 있다. 사진 가운데에 보이는 건물이 '송강기념관'이고, 기념관의 지붕 위에 얹힌 듯 자리잡고 있는 가장 먼 곳의 건물이 사당인 '송강사'다. 그러므로 이곳의 전체 이름은 '정송강사', 사당의 이름은 '송강사'로 구분된다. 이 사진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것이다. 이 사진을 인용한 까닭은, 평범한 일반 답사자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사진은 작품사진은 될지언정 관광용(홍보용)은 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공중에 떠야 볼 수 있는 사진과 같은 광경을 보기 위해 정송강사를 찾을 수는 없지 않나. ⓒ 정송강사

정철은 집으로 돌아와 '작업'을 한다. 왕명은 지켜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한다. 그는 선조가 하사한 술잔을 바닥에 놓고 안을 계속 두들긴다. 결국 술잔은 사발만큼 커진다. 정철은 최대한 많은 술을 한 잔 안에 담기 위해 '잔머리'를 굴렸던 것이다.

정철의 <장진주사>는 '국민 사설시조'

사설시조 중에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무엇일까. 아니, 술을 권하는 '권주가' 중에서 최고의 설득력을 자랑하는 노래는 무엇일까. 아마도 <장진주사>일 것이다. 물론 작가는 정철이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줄이어 매어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張)에 만인이 울어 예나 어욱새 속새 떨갈나무 백양 숲에 가기곧 가면 누른해 흰달 가는비 굵은눈 소소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잿납이 휘파람 불 제야 뉘우친들 어이리

술을 마시자. 한 잔 마시고 또 한 잔 마시자.
한 잔 마실 때마다 꽃잎 하나씩 떼어놓으면서 무진무진 마시자. 이 몸이 죽고 나면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무덤으로 가나, 화려한 상여에 얹혀 엄청난 사람들의 울음 속에 땅속으로 가나, 나무와 잡초가 무성한 곳에 묻히고 나면 누가 한 잔 하자며 말이나 걸겠는가.
게다가 무덤 위에 원숭이가 올라와 마구 짓밟아대며 휘파람을 불어댈 때 그 때 무덤 속에서 술 덜 마시고 저승에 온 것을 후회하면 뭣하나.

더 설명할 것도 없는 권주가다. 이 <장진주사>가 '정말 잘 쓴 명작'이라고 느껴진다면, 귀하 또한 정철을 닮고 싶은 주당임에 틀림이 없다. '죽고 나면 누가 술 한 잔 권할 줄 아느냐. 살아 있을 때 한 잔이라도 더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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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사당에 봄이 왔다. ⓒ 정만진


선조 명령 "정철 당신, 하루에 술 한 잔만 마셔!"

이율곡과 더불어 정철의 아주 친한 친구였던 성혼은 파주에 살았다. 성혼이 정철에게 놀러오라고 초청했다. 천하의 주당 정철이 성혼에게 날린 답장(시조)의 내용이야 미루어 짐작할 것도 없다. '술 마시자'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벗이 부르니 내 당장 쉬고 있는 소를 발로 차서 깨워 올라타고 쫓아가 그와 더불어 술을 마시리라.'

재 너머 成勸農(성권농)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은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눌러 타고
아이야 너 거기 勸農(권농) 계시냐 鄭座首(정좌수) 왔다 하여라

그렇다고 해서 정철이 남긴 시조가 하나같이 '술 타령'인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훈민가> 연시조다. 백성[民]을 가르치는[訓] 노래[歌]를 지어 풍속 교화에도 크게 힘을 쏟았다. 물론 <사미인곡>의 작가답게 그의 시조는 수준작이었으므로, 현재도 그의 <훈민가>는 잊혀지지 않고 중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꾸준히 세상에 전파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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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선생의 묘소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정철 신도비'와 비각. 정송강사 홍살문 앞에 있다. 여기서 바로 올라가면 정송강사 경내로 들어가고, 왼쪽으로 꺾어서 300가량 들길과 산길을 걸으면 묘소에 닿는다. ⓒ 정만진


간나희 가는 길을 사나희 에도듯이
사나희 예는 길을 계집이 치도듯이
제 남진 제 계집 아니어든 이름 묻지 마오리

여자가 걸어오면 남자는 둘러서 지나가야 하고, 사내가 걷는 길은 아낙네가 비켜 가야 한다. 그것이 남녀 사이의 예절이다. 제 남편, 제 아내가 아닌 사람의 이름이야 알 필요가 전혀 없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는 마태복음의 '<십계명> 해설'도 '저리 가라'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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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묘소 겨울 ⓒ 정만진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자스라

사람이 되어 나서 옳지곧 못하면
마소를 갖고깔 씌워 밥 먹이나 다르랴

사람은 모름지기 착하게 살아야 한다. 만약 '차카게' 산다면 짐승이 정장을 차려 입고서 밥을 먹으며 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뿐이 아니다. 착하게 살려면 일도 부지런히 해야 한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늦잠을 자서는 안 되며, 이웃을 거들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허투루 눈길을 돌리지 말고 뽕을 따서 누에 먹일 생각을 해야 한다. 정약용이 선비인 제자에게 과일나무도 심고 채소도 재배하라는 편지를 쓴 것처럼, 정철 역시 '투잡'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효도, 협동, 남녀유별, 경로, 선행 등 풍속교화의 <훈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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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묘소 여름 ⓒ 정만진

오늘도 다 새거다 호미 메고 가자스라

내 논 다 매여든 네 논 좀 매어 주마
올길에 뽕 따다가 누에 먹여 보자스라

사람의 착한 일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효행이다. 그러나 돌아가신 뒤에 대단한 장례나 제사를 모시려고 하지 말라. 살아 계실 때에 실천해야 한다. 돌아가신 뒤에는 두 번 다시 효도를 실천할 수 없다. 그저 후회뿐이다. 박인로의 <조홍시가>가 잘 갈파해주듯이, 아무리 맛나 보이는 홍시라 할지라도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셨다면 집에 가져가봐야 어찌 효도를 할 수 있겠는가.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닯다 어이하랴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내용이 내용인 만큼 이 시조는 <훈민가> 중에서 가장 많이 교과서에 실렸다. 아래 시조도 종종 교과서에서 볼 수 있었던 작품이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까

정철의 묘소는 왜 진천에 있을까

정철은 전라남도 담양 사람이다. 그곳에서 20대까지 공부를 했고,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도 지었다. 그런데 묘소와 사당은 충북 진천에 있다. 김유신은 진천 태령산 아래에서 태어나 15세 정도까지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생가, 태실, 사당이 두루 진천에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정철은 진천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어째서 진천이 '정철 답사지'가 되었을까.

1593년에 타계한 정철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산소 주변에 자꾸 물이 나왔다. 당시 진천현령으로 있던 후손 정양(鄭樣)이 고민을 거듭하다가 송시열에게 자문을 구했다. 송시열은 현재의 묘소 자리인 문백면 봉죽리 562번지를 '좋은 땅'으로 추천하면서 신도비의 글도 써 주었다. 1665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된 묘소는 충청북도 기념물 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신도비와 정송강사도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신도비는 유형문화재 187호, 묘소 이장 때 함께 옮겨졌다가 1979-1981년에 중건된 정송강사는 기념물 9호다. 정철 덕분이든 송시열 덕분이든 진천은 꽤 괜찮은 '관광 명소'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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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송강사> 경내에서 가장 고지대에 있는 송강사. 본래 묘소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에 있었지만 1665년 무덤이 이장될 때 현재 자리로 함께 옮겨졌다. 그후 1937년 보수, 1979-1981년 중건을 거쳐 지금 모습을 갖추었다. ⓒ 정만진


진천의 길을 가노라면 종종 '생거진천(生居鎭川)' 네 글자가 곳곳에 커다랗게 나부끼는 광경을 보게 된다. 예로부터 전해져오는 '생거진천 사거용인(死居龍仁)' 여덟 자를 반으로 줄인 말이다.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이라는 뜻이니, 그만큼 진천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널리 여겨져 왔다는 이야기다.

물론 용인은 묘소를 쓰기에 좋은 고장, 즉 명당자리가 많은 곳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정철의 묘소는 용인이 아닌 진천으로 왔다. '한국 가사문학의 1인자' 정철이 송시열의 도움을 받아 '진천은 살기도 좋지만 명당도 많은 곳'이라고 단단히 홍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진천군은 정철에게 '홍보대사' 위촉장을 주어야 할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정철의 <장진주사>가 술 마실 구실을 찾느라 공연히 지어낸 언어유희라는 점은 어쩔 것인가. 그의 무덤은 잡목도 잡풀도 없고, 하물며 원숭이가 올라가 뛰어노는 일은 결코 없으니, 정철은 너무 지나친 '과장'과 '선동'을 일삼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장진주사>는 진정한 명작인가, 아닌가? 바꿔 말하면, 나는 주당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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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송가사 경내의 '정철 시비'. 봄에 본 시비와 겨울에 본 시비는, 모양과 크기는 같지만 답사자에게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만약 정철 선생께서 생존해 계신다면 이것만으로도 시조 몇 편, 가사 한 편은 충분히 지으시리라. ⓒ 정만진


#정철 #훈민가 #장진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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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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