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책에 소개된 제 고향, 실상은 이렇습니다

[귀농에 관한 환상과 진실⑪] 서울내기 아내와 귀향한 사연

등록 2012.12.24 18:20수정 2012.12.26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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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귀촌 인구가 매년 최고치를 기록중입니다. 2012년 상반기 귀농귀촌인구는 8706가구 1만7745명에 이릅니다. 이들은 왜 도시를 떠나 시골로 향하는 것일까요? 귀농귀촌인 절반 이상은 4050세대이지만 2030 세대의 귀농귀촌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생태적 삶'을 살고자 귀농을 결심하는 이들도 많지만, 상당수는 자영업에 실패하거나 명퇴를 당했거나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귀농귀촌의 리얼스토리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개인의 선택 차원을 떠나 뚜렷한 사회현상이 되어버린 귀농귀촌에 대한 실질적인 사회적 뒷받침이 이뤄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말]
저는 결혼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고향인 농촌으로 돌아왔습니다. 귀농이 아니라 일종의 귀향을 한 셈이지요. 요즘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은퇴형 귀농도 아니고, 사업에 실패한 귀농도 아니며, 전원생활을 하고자 하는 귀농도 아닙니다. 단지 어린시절부터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이제야 그 꿈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중학생 무렵에는 농촌에서 살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가 어머니께서는 화를 내시면서 공부하지 말고 일만하라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고향집으로 귀향을 결정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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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부서진 고향집 난민촌이 따로 없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고, 다시 필요한 건물을 짓고, 이삿짐도 정리해야 합니다. 어느 것을 먼저 해야 할지도 고민되는 날들이었습니다. ⓒ 배만호


그러다가 전환기를 맞게 됐습니다. 혼인을 몇 개월 남겨두고 신혼집을 장만해야 했습니다. 아내도 농촌에서의 삶을 원했기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지역으로 가야하는가 하는 문제는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고민한 결과 다른 지역에서 마땅한 집을 구하기도 어려워, 낡고 부서지긴 했지만 고향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습니다.

도시에서 살다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는 저와 비슷한 경우의 귀향인들은 고향분들의 시선이 제일 무섭습니다. 겉으로는 고향땅이고, 고향분들이어서 좋습니다. 하지만 "도시에서 못살고 시골로 온 거냐", "직장에서 잘렸냐", "망했다"는 등등의 여러가지 군소리를 모른 체 하고 넘겨야 합니다. 도시인의 귀농과는 달리 귀향을 한다는 것은 나름의 굳은 결심을 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집은 그동안 비어 있어 사람이 다시 살기에는 불편함이 많았습니다. 더구나 태어나서 줄 곳 서울에서만 살아온 아내에게 시골집은 마치 지옥 같은 집이었습니다. 쓰레기와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놀리듯이 말을 했더니 아내의 인상이 변하기도 했습니다. 

시골에서 겨울을 견뎌낸 힘은 냉이 

하지만 서울내기 아내는 잘 참아 주었습니다. 늘 춥다고 하며 감기를 달고 살았지만, 추운 날씨에도 다가오는 봄을 향하여 자라는 봄나물들을 보며 기나긴 겨울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마을에 대한 관심보다는 겨울의 모진 추위에도 견디며 자라나는 냉이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조금 뜯어온 냉이로 저녁상을 차리더니 다음날은 더 많은 냉이를 캐 왔습니다. 냉이를 무쳐서 이웃집에도 나눠주고, 서울에 계신 어머니께도 택배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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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시골살이 첫해를 견디게 해준 고마운 냉이입니다. ⓒ 배만호


아내의 삶은 모진 겨울을 견뎌내는 냉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살이를 하루아침에 정리하고 낡은 시골집에서의 생활은 결코 만만하지가 않았습니다. 뜨거운 물은 있었지만 추워서 제대로 샤워를 할 수가 없었고, 밤이 되면 쥐들이 천장에서 뛰어다니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야 했습니다.
 
추위와 공포를 견디며 아내가 시골에서의 첫 겨울(2011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냉이를 비롯한 봄나물들 덕분이었습니다. 아마도 땅에서 자라는 여린 싹을 먹으며 땅의 기운을 느꼈나 봅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아내는 시골에서의 첫 겨울을 감기와 함께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낮이 되면 봄나물 향기에 감기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기나긴 겨울동안 무너지는 곳은 새로 짓고, 고칠만한 부분은 고쳐서 이듬해 봄이 되자 고향에서 혼인식을 올리고 농촌살이를 시작하였습니다. 마을 어른들께는 돼지 한 마리를 마을 대동회때에 선물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곳에서 살고 있다고 알린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계속 집수리를 진행했습니다. 지출을 줄이기 위해 웬만한 집수리는 제가 직접 해야 했습니다. 마치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집이 조금씩 사람이 살만한 집으로 변했다고나 할까요. 시멘트 마당을 흙마당으로 바꿔 생명이 살아 있는 마당으로 만들었으며, 작은 화단도 만들어 꽃도 심었습니다. 

허물어가는 집이 새집으로 바뀐 사연

그렇게 헌집을 새집으로 바꾸는데 두 계절이 지나갔습니다. 전문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했다면 한달도 채 걸리지 않을 일들입니다. 그러면서 집의 어느 한 곳이라도 주인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마당에 있는 작은 돌멩이 하나에서 벽에 박힌 못 하나까지 서툴지만 정성을 들여 가꾸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좁은 집에 닭을 키우고, 작은 연못까지 만들었더니 자꾸만 넓은 집에서 살고 싶어집니다. 이제는 두 번째 겨울을 지내면서 넓은 집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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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집이 새집으로 완공된 모습입니다. 새집이 되자 마을 어르신들도 한마디씩 칭찬을 하며 지나갑니다. ⓒ 배만호


농촌에서 산다는 것이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사는 고향 동네가 공지영 작가가 쓴 <지리산 행복학교>에 소개되면서 마치 이곳에 귀농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책 덕분에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은 마치 귀농인들에게 '강남'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아내 주변의 반응도 비슷했습니다. 낯선 사람끼리 소개를 하는 자리에서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동 악양에 시집와서 살고 있어요"
 "우와~~! 좋은데 사시네요. 부러워요"
 "네. 별로……."
 "우린 집을 구하려고 몇 년을 둘러봐도 못 구하고 있거든요"

그럴때면 아내는 뿌듯해 합니다. 가끔은 농담처럼 신랑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아마도 아내의 생각은 이런 것 같습니다.

'난 신랑 잘 만나서 니들이 부러워하는 동네에 와서 살고 있다'

하지만 햇살 좋고, 공기 좋다고 하여 모두가 행복한 것만은 아닐겁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할지 모릅니다. 이야기나 책 속에 등장하는 농촌을 꿈꾸시는 분들에게는 다시 신중하게 고민해보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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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을 짓기 위해 헌집을 부수고 있습니다. 고향집이지만 사람이 살지 않았던 짧은 세월동안 집은 낡을 대로 낡아갔습니다. ⓒ 배만호


귀농인을 위한 빈집 수리비는 지자체 예산에서 지원해 주는 일종의 인구유입정책입니다. 따라서 해당 지자체별로 지원금액이 차이가 있습니다. 대략 300~500만원 (수리비용의 최대 50%지원) 가량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정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우선 지원받으려고 하는 주택이 빈집이어야 합니다. 전입신고를 하기 전 주소가 도시이어야 하며, 2인이상 전입신고가 되고 일정기간(대부분 3개월) 살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빈집수리 지원대상이 된 후에 공사를 해야 하며, 빈집수리가 끝나고 지원금을 줍니다. 지원 대상은 보일러, 씽크대, 화장실 등으로 주거시설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무작정 수리하고 지원해 달라고 하면 지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일정기간 거주를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랜시간 비어 있었던 집에서 2인 이상 일정기간 살아야 한다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규정이라는 느낌도 듭니다. 저의 경우는 공무원과 혐의를 통해 혼자 전입신고를 해놓은 상태에서 집을 고쳤습니다. 사람을 쓰지 않고 제가 직접 집을 수리해서 총 1천만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고, 500만원을 군으로부터 지원받았습니다.

#귀농 #악양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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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말이 적어야 하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하고, 머리에 생각이 적어야 한다. 현주(玄酒)처럼 살고 싶은 '날마다 우는 남자'가 바로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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