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과 친절한 무관심이 있어 국제적인 곳

우리 동네 커피가게에 가는 이유

등록 2012.11.26 19:12수정 2012.11.28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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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동네 커피가게
우리 동네 커피가게배지영

몹시 더웠던 지난 여름, 일이 끝나고 나면 문어처럼 몸이 흐느적거렸다. 소파에 몸을 흡착시키고 있으면, 네 살짜리 꽃차남이 점프하며 파고들었다. "아이고, 한 살이라도 젊고 건강했을 때 아기를 낳았어야 했어"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밤마다 동네 밥집을 순례했다. 그런 날의 어느 한 날, 남편이 이끈 곳이 동네 커피가게였다.


남편이 '강추'한 건 팥빙수였다. 남편은 스마트폰으로 팥빙수도 찍고, 처자식 얼굴도 찍었다. 자꾸자꾸. 집 밖에서 보는 남편은 과묵하고 체면을 차리는 그냥 아저씨. 그 특유의 정체성을 던져버리게 만드는 이 커피가게는 뭐지? 카메라 앞에서 애쓰지 않으면, '비닐 봉다리'처럼 사진이 나와서 절망하는 이 아줌마는 궁금했다. 

 팥빙수를 앞에 둔 꽃차남. 남편의 과묵하고 체면을 차리는 아저씨 정체성을 버리게 한 동네 커피가게.
팥빙수를 앞에 둔 꽃차남. 남편의 과묵하고 체면을 차리는 아저씨 정체성을 버리게 한 동네 커피가게.우리집 남성동지

밥벌이도 안 하고, 꽃차남을 돌봐주는 베이비시터도 오지 않는, 완전한 '육아실미도'인 토요일. 말도 못하게 예쁜 네 살짜리 아기는 툭 하면, '개님 성질'을 부리며 운다. 중학생인 큰 애는 전전두엽의 폭풍성장으로 기분이 자주 나빠진다. 그럴 때는 한두 시간쯤 혼자 집에 놔둬야 누그러진다. 나는 문득, 꽃차남을 데리고 커피가게에 갔다.

우리 집에서 걸으면 7분 거리, 그러나 커피가게 가는 길은 멀었다. 꽃차남은 나비를 쫓고, 줄지어 움직이는 개미들을 보느라 오래 쪼그려 앉아 있다. 지나는 차가 어느 회사 자동차인지를 20대쯤 맞혀야 하고, 커피가게 바로 전에 있는 쇼핑몰의 에스컬레이터는 반드시 두 번 타야 한다. 평일이라면 꽃차남을 다그치지만 나는 여행자처럼 느긋하다. 

커피가게 한켠에는 마루가 있다. 신발을 벗고 바닥에 앉는다. 대개 고등학교 여학생들, 피어나는 꽃처럼 예뻐진 20대 아이들, 바닥에 재운 아기를 토닥이는 젊은 엄마들, 그리고 식구들끼리 온 사람들이 거기에 앉았다. 나는 대책 없이 편하게 다리를 뻗고 앉았다가는 그대로 푹 퍼질 것 같아서 신발 벗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커피가게에 벌이 여러 마리 들어왔다. 마루에는 야리야리한 아가씨 둘이 앉아 있으니까 당장 잡아야 했다. 낭창낭창한 카페 주인이 벌을 잡으러 다녔다. 속으로 '아, 대신 잡아주고 싶다. 나는 벌이 하나도 안 무서운데...' 라고 생각만 하고 있는데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중년의 여인네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아이고, 말벌이 총각 사장 잡네!"

 커피가게 한켠에는 마루가 있다. 대책 없이 편하게 굴다가 자세가 푹 퍼질 것 같아서 앉을 생각을 안 했는데...
커피가게 한켠에는 마루가 있다. 대책 없이 편하게 굴다가 자세가 푹 퍼질 것 같아서 앉을 생각을 안 했는데...배지영

날씨는 쌀쌀해졌지만 햇빛을 가득 받은 커피가게는 안온하기만 하던 날, 마루에 앉아버렸다. 내 자매와 친구 최박사, 그리고 아이 둘. 꽃차남은 덥다고 집에서처럼 윗옷을 벗어 런닝셔츠 차림이 되었다. 최박사의 '초딩'아들 준섭은 엎드려서 게임을 했다. 떫은 감정을 반쯤만 억누르고,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때, 30대의 미혼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카페에 들어왔다. 우리의 '대자유'를 보고는 "뭐야?" 하는 표정으로 나가버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게 주인한테 미안해서 꽃차남 옷도 안 입힌 채 나왔다. 그런데도 영수증을 보니까 커피 한 잔 가격은 받지 않았다. 도장 10개를 찍으면 한 잔을 그냥 주는데 나는 쿠폰을 받지 않으니까 깎아준 모양이었다.

다음 날에 다시 갔다. 큰애와 꽃차남, 내 자매와 함께. 우리는 우아하게 있다 오고 싶었지만 세상 사는 일이 뜻대로만 되는 건가. 한 술 더 떠, '진상' '찌질이' 손님이 될 판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주문한 아이스크림에는 장식으로 시리얼이 딸려 나왔다. 큰애와 꽃차남은 아이스크림은 녹게 내버려두고, 시리얼만 서로 더 먹겠다고 으르렁거렸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읽은 글이 기억났다. 그는 아이와 둘이서 팥빙수를 시켜먹었다. 그의 아이는 팥을 더 먹고 싶어 해서, 그는 가게 주인에게 아이가 먹게 팥을 조금만 더 달라고 했다. 주인은 팥 값으로 500원을 받았고, 그는 가게 주인이 야박하다고 성토를 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비싼 에어컨을 켜고 하루 종일 일하는, 자영업자 편을 들었다. 물론, 나도. 

나는 절박했다. 집에서처럼, 큰애와 꽃차남이 본능을 싹 까놓고 육탄전까지 가 버리면, 카페는 더 이상 '육아실미도'의 탈출구가 되지 못한다. 나는 커피가게 주인에게 시리얼만 따로 추가 주문할 수 있냐고 물었다. 주인 중 한 명(형제로 보이는 이 둘이 한다.)은 불가능하다는 거절의 말을 했다. 그것도 웃으면서. 그리고는 시리얼을 듬뿍 갖다 주면서 말했다.

"그냥 드려도 돼요."

 내 자매 지현. 우리 애들 또는 애들의 친구가 자라 동네에서 가게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동네카페에 가는 건 아이들의 미래에 연대하는 엄마의 마음이다.
내 자매 지현. 우리 애들 또는 애들의 친구가 자라 동네에서 가게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동네카페에 가는 건 아이들의 미래에 연대하는 엄마의 마음이다.배지영

강인규의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에서,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곳은 언제나 한국의 커피숍이라고 했다. 그가 잠시 귀국해서 석 달간 일터로 사용한 커피숍에 작별인사를 하러 갔는데 그곳의 직원들은 커피와 케이크 값을 대신 내주었다고. 그러나 무관심의 안락함 속에서 할 일을 하다 일어서는 미국 커피숍이 오래 머물기는 편하다고 했다.

미국에 사는 그는 '점원은 최대한 친절하고 정중해야 한다. 하지만 돈을 받고 커피를 건넨 이후 고객과의 소통은 완전히 단절돼야 한다. 그래야만 고객은 그 '친절한 무관심' 속에서 원하는 시간만큼 하고 싶은 것을 하다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스타벅스를 정의했다. 그렇다면, 우리 동네 커피가게는 국제적이다. 그리움과 친절한 무관심이 공존하니까.

우리 동네는 대한민국 어디나처럼 커피가게가 많다. 블랙홀처럼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스타벅스나 카페베네도 있다. 나도 지금보다 젊었을 때는 그런 곳에 가는 게 당연했다. 몇 년 전,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렌터카를 타고 파머스턴노스까지 간 적이 있는데 도시에 들어갈 때마다 스타벅스에 갔다. 이름을 많이 들어본데다, 내가 사는 군산에는 없는 곳이어서.

지금은 크고 유명한 곳에 가지 않는다. 대형 마트나 프렌차이즈 가맹점도, 가장 끊기 어려웠던 인터넷 서점까지. 나와 내 자매, 우리 식구들은 동네 가게에 간다. 자영업을 많이 하는 나라라서 우리 애들, 또는, 애들의 친구들이 자라 동네에서 가게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동네 카페에 가는 건 아이들의 미래에 연대하는 엄마 마음이다.
#동네카페 #아이들의 미래 #엄마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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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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