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금지 표시없었는데, 제복입은 남자가...

[역사와 함께하는 쿠바 자전거기행 18] 산타 클라라부터 아바나까지

등록 2012.12.03 15:34수정 2012.12.0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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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잠을 설친 눈으로 일찍 호텔 문을 나섰다. 그러나 오후 7시가 되어야 아침이 나오니 무조건 7시까진 기다려야 했다. 호텔 입구에 있는 식당에 가보니 별로 먹을 것이 없다. 햄버거를 주문했다. 2세우페(100원)였다. 커피도 없고 마실 물도 없이 햄버거를 먹자니 목이 메었다. 그야말로 꾸역꾸역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아주 작은 빵 사이에 겨우 고기만 들어 있고 야채도 없다. 정말 맛도 지지리 없다.

쿠바 사람들은 연말이 되면 가족이 모여서 음식을 장만하고 파티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길가에 노래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점점 많이 들렸다. 특히 이맘때에는 새끼돼지를 잡아서 바비큐를 해 먹는다고 해서 그런지 길가에 새끼돼지를 파는 곳도 보였다. 칠면조를 잡아서 음식을 하기도 하는지 길가에서 한 아저씨가 살아있는 칠면조를 전봇대에 내려치는 장면도 목격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카페 손님을 집으로 빼돌리다?

한참을 가다 길거리에 야채 노점상이 보여 섰다. 토마토 7개와 바나나 몇 개, 양파 3개, 피망 2개를 샀다. 윤 원장이 커피와 채소를 좋아하는데 항상 부족해 걱정이 많았는데 오늘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듯 했다. 아무튼 채소는 해결 되었으니…. 이제 커피만 해결하면 될 것 같았다. 커피 한 잔 못 마시고 가다 길가에서 24시간 영업하는 곳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갔다.

가보니 우리를 매장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앞에 있는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이 친구가 소리쳐서 자기 아내에게 커피 준비하라고 한다. 이래도 되나?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그곳에서 토마토를 씻어달라고 해서 토마토와 바나나를 곁들인 진한 커피 한 잔씩 했다. 흠, 향긋하고 쌉싸름한 그 맛! 쿠바에서 커피는 으레 진한 에스프레소이다.

한 마을에 도착하니 이제 겨우 11시 40분. 길가엔 식당도 없었고 마을은 길가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니 내부가 훤하게 개방된 커다란 식당이 나왔다. 사람들이 식당 입구에서 서성인다. 아직 12시가 안 되어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아침은 7시, 점심은 12시 그리고 저녁은 7시가 되어야 문을 연다. 기다리지 않고 먹고 싶으면 시간 맞춰 오든가 아니면 문 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어제 저녁에 산 절인 양파가 담긴 통조림과 피망 그리고 양파를 썰어서 우리식으로 샐러드를 만들어 주문한 음식과 함께 먹었다. 통조림은 식초가 잘 절어져 있어 제법 맛있었다.

카리브 족의 이름을 딴 바다, 너무나 예쁘다


마탄사스에 들어서니 처음으로 바다가 나타났다. 카리브 해이다. 용맹한 원주민인 카리브족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카리브 족은 식인의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필요에 의해서 사람을 죽이고 먹었다.

하지만 문명을 자랑하는 백인은 먹지도 않으면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콜럼버스가 도착할 당시만 해도 아메리카 대륙에는 1억 명이 넘는 원주민이 있었다. 특히 북아메리카에서는 5천만 명이 넘는 원주민이 학살당했다. 백인들은 그들을 먹으려고 죽인 것이 아니다. 그들의 땅을 빼앗기 위해 무조건 죽였다. 누가 더 야만인인가? 카리브 족인가 아니면 백인인가?

바닷가 풀밭에 잠시 누워 휴식을 취했다. 처음으로 바닷 바람을 쐬며 한참을 누워 보냈다. 정 선생이 예약해 준 자유광장에 있는 벨라스코(Velasco) 호텔로 갔다. 하룻밤에 60세우세로 우리가 묵었던 호텔 중 가장 비싼 호텔이다. 방은 작았으나 천정은 높았고 그런대로 운치가 있는 호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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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서 처음 만난 바다, 너무 예뻤다. ⓒ 이규봉


마음씨 고운 떠벌이 흑인 청년

한참 휴식을 취한 후 저녁때가 되어 나왔다. 산책을 하다가 한 쿠바 커플을 만났다. 결혼한 지 17일 되었다고 하는데 마이클이라고 하는 그 쿠바 남자 너무 말이 많았다. 원래는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왔다고 하는데 그곳에 있는 호텔에서 일을 하면서 영어를 배웠다고 했다. 그는 여자 쪽 집안이 마탄사스라 이곳에서 비즈니스를 할까 하고 이곳에 정착하려고 한단다. 그런데 한시도 말을 끊지 않고 떠드는 완전 떠벌이였다. 그러나 마음은 고운 것 같다. 부인은 백인이고 마이클은 흑인이다.

그들에게 우리는 지금 쿠바노 식당을 찾고 있으니 좀 알려달라고 했다. 그들이 우리를 쿠바 식당 여기저기로 안내했으나 때가 올해의 마지막 날인지라 열려 있는 식당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안내했는데 식당이라기보다는 술집이었다. 비디오를 틀어놓고 노래방 기계로 노래하는 사람이 박스 같은 곳에 들어가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이 비디오 바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의 처가가 바로 근처였는데 식사 후에 오더니 자기 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성문 같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길죽하게 현관이 이어지며 방들이 붙어 있고 천장은 얼마나 높든지 아주 시원했다. 그는 우리에게 커피를 타 주었다. 물론 에스프레소이다. 그의 처형은 집 앞에다 불법으로 음악 CD를 구워 팔고 있었는데 영업이 끝나서 그런지 집 안에 매대를 들여놓았다. 우리에게 커피도 대접하고 해서 예의상 CD 여러 장을 사주었다. 

글래머러스한 아줌마의 포옹 세례를 받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어떻게 그냥 이 날을 보낼 수 있는가? 고 원장 부부는 이미 방으로 들어갔고 전 선생은 잠이 들었다. 결혼한 이후 연말연초를 아내와 떨어져 지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 해의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낼 수 없어 호텔 로비로 나갔다.

로비에서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시계는 점점 12시에 가까워져 간다.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는 모히또 한 잔을 기울이며 TV를 보고 있었다. 쿠바의 새해맞이는 어떤가 보려고. 12시 될 때까지 음악이 흐르더니 12시를 지나면서 마침내 피델 카스트로가 보이고 정치적인 화면이 나왔다. 처음 보는 피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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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히 모히또를 마시며 새해를 맞다. ⓒ 이규봉


민주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의 얼굴이 자주 TV에 나오나 사회주의 국가이며 1당 독재국가라는 쿠바에서 나는 이 날 처음으로 TV에 나온 카스트로를 보았다. 12시가 지나면서 로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옆 사람과 포옹을 한다. 나도 옆에 있는 글래머러스한 아줌마의 포옹 세례를 받았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부터 자전거로 오면서 길가에서 본 풍경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피델의 형상이나 사진보다는 체의 사진과 형상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아니 피델의 상징물은 거의 없었다. 쿠바 정부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미지로는 외형적으로 체를 내세워 국민들이 정신적으로 연대감을 갖도록 하고, 내부적으로는 피델과 그의 동생이 정권을 쥐고 정치적인 지배력을 가져가는 듯한 구조같이. 그러나 북한과 달리 쿠바는 살아있는 사람을 숭배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방으로 들어 왔으나 역시 로비에서는 새벽 2시까지 음악을 연주하였다, 물론 잠을 잘 잘 수는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음 해가 밝았다. 2012년이다.

피델의 약속, 바꾸나야구아 다리 완공

새해 첫 날이며 일요일이다. 쿠바를 완주하는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호텔을 나와 광장을 한 바퀴 돌고(광장은 길이 한 방향이다) 왔던 반대 방향으로 가니 우리가 올 때 봤던 바다가 나온다. 4km까지 완만한 언덕이 이어진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 빛깔이 너무도 환상적이다. 뉴질랜드 남섬의 중부에 있는 테카포 호수의 환상적인 빛깔에 놀란 이후로 두 번째이다. 도로는 지금까지 지나왔던 기존 도로와 달리 포장이 너무 잘 되었고 상태가 매우 양호했다.

쿠바의 7개 수려한 토목건축 중 하나인 바꾸나야구아 다리(Puente de Bacunayagua)가 보인다. 다리는 매우 깊은 계곡을 가로질러 있다. 약속의 다리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카스트로가 쿠바 혁명 당시 이 주변 주민에게 완성시켜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에 성공한 후 바로 이 다리를 완성했다. 바티스타 정권인 1956년 시작하여 혁명을 완수한 1959년 9월 26일 준공했다. 이 다리는 아바나와 마탄사스를 가르는 경계선 역할을 하며, 높이 110m, 길이 310m, 폭 16m이다.

다리 중간에서 내려보면 아래가 까마득한 이 다리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쿠바가 혁명을 이루고 나서 2년 후인 1961년 4월 미국이 훈련시킨 용병이 피그스 만을 침공하여 잠시나마 전쟁을 한다. 이 전쟁 이후 쿠바는 군복무가 의무화되었다. 당시 혁명 반대세력들은 이 새로운 군복무 제도에 대해 흑색선전을 했다. 일단 군대 들어가면 다시는 못나온다, 어디로 끌려가서 죽도록 고생할지도 모른다, 피델이 어디론가 멀리 보낸다는 등 엄청난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한 젊은 청년이 군 입대를 앞두고 애인이랑 함께 이 다리에서 떨어져 자살했다고 한다. 어디고 높은 곳이 있으면 떨어지도록 유혹하는가 보다.

다리 초입에서 경치를 구경했다. 숲 너머로 멀리 바다도 보였다. 마침 소풍 나온 한 일가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리를 건너니 이 다리에 대한 초석이 세워져 있다. 지은 지 50주년을 기념해서 세워진 것 같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쿠바 토목공학의 경이로움
    1959년 9월 26일
    설계자 : 토목공학자 루이스 사엔스 두쁠라쎄Luis Sáenz Duplace 
    건축 : 사엔스ㅡ깐씨오 이 마르띤 회사
    50주년 기념
    우나익-마탄사스
    2009년 9월 26일

다리 끝에 다다르니 인접한 산마루에 전망대가 있었다. 다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전망대에서는 여러 가지 상품을 팔고 있었다. 우리는 열대 과일을 현장에서 짜 만든  피나콜라다 쥬스를 마셨다. 무려 한 잔에 2.75세우세였다. 기념품은 주로 수제 가죽 작품이었다. 사고 싶어도 자전거 여행이라 무게를 늘릴 수 없어 살 수가 없었다.

전 선생은 가죽으로 만든 야구공을 하나 샀다. 한 가지 이상 한 것은 쿠바 사람들이 야구를 무척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지금까지 자전거로 여행하는 동안 야구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과 야구장 같은 시설도 보질 못했다는 것이다. 아님 우리가 야구장을 피해 다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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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나야구아 다리 ⓒ 이규봉


쿠바 유전 개발에 성질난 미국

해수욕장에 인접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의 한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려는데 펑크 난 자전거 타이어를 들고 한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캐나다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사는지 아니면 관광하러 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펑크 난 곳을 때워주었고 바람도 넣어 주었다. 그는 분명 생각했으리라. 자전거 족인 우리가 그 연장을 반드시 갖고 있을 거라고.

나는 그 사이 마을을 좀 더 둘러 봤다. 조금 더 가니 길가에 비키니만 입고 돌아다니는 아가씨들이 많았다. 버스가 오고가는 교차로에는 좀 더 근사한 식당이 있었다. 카페테리아 같은 현대식 건물이었다. 다시 되돌아가 보니 아직 주문도 안 한 상태여서 이곳 식당으로 데리고 왔다. 윤 원장이 우리나라의 갈비찜 같은 음식을 시켰는데 우리가 시킨 음식 중 가장 맛이 있었다. 그 이후에도 이 음식을 주문하려 했으나 이름을 알아 두지 않아 결국 더 이상 맛보지 못 했다.

윤 원장에 대해서 한 마디. 윤 원장은 고 원장과 같은 대학 같은 학과 1년 차이의 선후배 사이였다. 이미 말했지만 젊었음에도 둘은 과감하게 운영하던 치과병원을 그만두고 가족들과 함께 유럽여행을 떠났다. 그것도 1년 여정으로. 고 원장도 그렇지만 윤 원장의 배포가 대단하다. 여자로서 남편의 1년 수입을 모두 거부하고 여행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아내와 함께 가고 싶다고 졸라대는 남편의 뜻을 따라 열심히 자전거 연습도 하고, 연말연초에 근 3주일 가까이 병원을 쉬게 하는 마누라가 얼마나 될까? 그는 돈 잘 버는 것 보단 덜 벌더라도 하고 싶은 것 하며 사는 것을 좋아하는 매우 이상적인(혹자에겐 이상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병원을 남편에게 온전히 맡기고 자신은 자기 계발에 힘쓰고 있다. 한국무용에 남다른 소질을 갖고 있는 그는 무용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쿠바도 유전 국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해변가에 유전지대가 듬성듬성 있었고 메뚜기 모양을 한 펌프로 기름을 퍼 올리는 게 보였다. 시설은 아주 초라해 보였다. 아마 미국의 경제 제재 때문일 것이다. 유전 지대를 지나가니 냄새도 좀 나고 민가는 거의 없어 매우 삭막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쿠바의 유전이 기사화 된 것을 봤다. 쿠바가 국제 컨소시엄을 통해 유전개발을 하는 것에 미국이 몹시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정말 웃겨. 수 십 년에 걸친 경제 제재에도 망하지 않고 게다가 유전개발까지 한다니 몹시 성질나는가 보다.

자전거를 택시에 싣고 아바나에 입성하다

마침내 아바나 입구가 보였다. 아바나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두 군데였다. 바다가 호처럼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어 만을 따라 뺑 돌아서 가는 방법과 해저터널을 지나 바로 가는 방법이다. 자전거가 터널을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에 지도도 잘 살폈고 오는 도중 이정표도 열심히 살폈으나 단 한군데도 자전거 출입을 금하는 표시가 없었다.

고속도로도 자전거가 다니는 나라이니 갈 수 있겠다 싶은 막연한 추측으로 잘 뻗은 길을 따라 질주했다. 해저 터널 입구에서 모두 함께 가기 위해 기다렸다. 쉬고 있는 사이 제복 입은 한 관계자가 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전거는 갈 수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통행하는 자전거는 한 대도 없었다. 다시 돌아가기는 너무 멀어 생각 끝에 지나가는 차를 타기로 했다.

일행이 모두 도착하고 우리는 택시를 잡았다. 5세우세로 협상하고 택시 두 대에 자전거를 나눠 싣고 순식간에 해저터널을 빠져나갔다. 터널을 빠져 나오자마자 우리가 한 번 와봤던 말레꼰 방파제가 보인다. 우리가 처음 묵었던 까사도 여기서 멀지 않다. 근사한 스페인의 엘모로 성(Castilo de los Tres Reyes del Morro)을 바라보며 모든 일정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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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모로 성이 바라보이는 멜라콘 방파제에서 아무런 사고 없이 완주함을 기념하다 ⓒ 이규봉


엘모로 성은 신성한 세 왕들의 성으로 16세기 말 스페인이 해적들로부터 아바나 항구를 보호할 목적으로 해안 암초에서 떼어낸 산호 덩어리로 세웠다고 한다. 19세기 들어 대부분 성벽을 철거하고 시민들은 해안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세찬 파도를 막기 위해 8km에 달하는 방파제를 건설했다.

아바나는 카리브 해의 진주라고 불릴만큼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다. 16세기 초반에 세워진 아바나는 1607년에 수도가 되었다. 이전에는 산티아고 데 쿠바였다. 지리적 위치로 유럽 국가들이 중남미에서 획득한 보물을 본국으로 운송하는 선단의 집결지가 되어 아바나는 식민지에서 중요한 도시로 발전했다. 몰려드는 해적을 방어하기 위해 주변에는 성채를 쌓았다.

1837년에 식민지 최초로 철도가 놓여졌다. 20세기 초 거의 미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아바나는 갱들이 몰려드는 최대의 향락가로 전락했다. 그러나 혁명으로 카지노와 매춘이 사라졌다. 슬럼가가 철거되고 대신 저렴한 아파트가 건설되어 시민생활이 크게 향상되었다. 농촌 개발을 우선시 한 혁명정부는 불필요한 도시 재개발을 하지 않아 수백 년이 된 건물들은 아주 낡았다, 하지만 예전 시가의 모습 그대로 담고 있어 198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마탄사스에서 아바나까지는 언덕이 고루 섞여 있고 포장 상태도 매우 좋아 자전거 타기에 최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자전거를 타는 많은 외국인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아바나에 거의 도착할 즈음에 아바나에서 출발한 듯한 자전거 여행자를 볼 수 있었다. 우리보다 더 많은 짐을 자전거에 싣고 우리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그들을 보면서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길 기원했다.
#완주 #다리 #칠면조 #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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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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