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겉표지
이야기공작소
3년 동안이나 베트남 전역을 누비며 베트남 전쟁 당시의 현장과 생존자를 만나 확인한 이야기들은 결국 기억의 전쟁에서 지지 않기 위한 저자 나름의 노력이다.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이라는 기억을 되살림으로 우리가 일제의 종군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에 비로소 균형있는 시선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 평화를 목마르게 갈구하게 한다.
곧 치러지는 12월 19일의 18대 대통령 선거에 우리는 또 다른 '기억의 전쟁'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기억의 전쟁에서 이겨야 온전한 미래를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책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이야기공작소 펴냄)를 쓴 저자 방현석의 의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밤 새워 읽은 책의 끝장을 덮으며 든 생각이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아니면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부를 때. 이 순간이 얼마나 참혹한 무너짐의 순간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누군가의 실명을 불면서 고문 앞에 무릎을 꿇어 본 사람만이 안다. 김근태가 견뎌야 했던 남영동 대공분실 5층. 키 높이에 겨우 장작개비만한 창문이 세로로 딱 하나 박혀있는 그 까만 먹방에 들어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방현석이 이런 뜻으로 책의 제목을 정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 차라리 김근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한 김근태의 바람을 담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어울릴 수 있지만 내가 겪은 남영동에서의 '기억의 전쟁'은 다르게 해석한다.
해외유학 포기하고 험한 길 선택한 김근태저자가 평전이 아니라 소설 형식을 취한 것은 탁월한 선택으로 읽힌다. 작가의 상상력 때문만이 아니라 구성의 자유로움이 돋보인다. 기억의 조각들을 원활하게 이어주는 글의 흐름 때문이다. 재야 사학자 이이화 선생이나 성공회대 한홍구 선생의 현대사 강의를 듣는 느낌이다. 김근태의 삶을 따라 1970년대와 80년대 우리 역사의 격랑을 접하게 된다. 남자건 여자건, 동생뻘이건 조카뻘이건 '근태형'으로 불리던 바로 그 김근태.
이야기의 전개는 중국의 작가 위화(余华)가 쓴 장편소설 <인생>을 떠올리게 한다. 장예모감독과 여배우 공리로 기억되는 그 작품 말이다. 시골 촌로 '푸구이'의 가정사를 다룬 작품이지만 산다는 게 뭔지에 대한 서늘한 감상을 주는 역사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유년기의 재치어린 일화들, 중고등학교 시절의 못 말리는 범생이 김근태는 대학 1학년까지만 해도 이후의 행로를 상상하기 쉽지 않다. 전형적인 학자가 될 모습이다. 은사인 변형윤 교수가 김근태를 장학생으로 추천하여 해외유학을 권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때 김근태는 갈등을 거듭하다 용감한 결단을 내린다.
나는 가방을 손에 든 채 오래 강의동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켰던 강의실의 창문들이 눈에 와 박혔다. 빈 강의실을 지키며 밖을 내다보던 창을 오늘은 밖에서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학원방위 상대 학생총회'가 열리는 본관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얼마나 먼 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는지, 나는 그 순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95쪽)유학을 마다하고 험하고 먼 길 나서는 김근태의 이날 결단은 그 뒤에도 고비마다 이어진다. 고문실에서 내가 인간 백정들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가 있다. 김근태의 진술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말이었다.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명단을 짜 맞추기 위해 가해지는 고문을 김근태처럼 견뎌내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1983년에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만들기 위한 사전모임이 역곡 전철역에서 걸어가면 20분 남짓 되는 김근태 집에서 열렸을 때 나도 갔었다. 박계동, 이범영 등등이 모였다. '근태형'이 왜 나를 불렀는지 당시에는 몰랐다. 노동쪽과 청년쪽에 대한 이중 구상을 이런 식으로 내게 전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공개적으로 활동하던 1980년 늦가을, '근태형'이 인천 구월동 주공아파트에 살 때는 내가 집에 가더라도 다른 쪽 사람은 못 만나게 하던 사람이었다.
'2012년을 점령'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이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