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게 묻다> 겉표지
문예미학사
"2008년 9월 안동 하회마을 나룻터. 밧줄에 매여 있는 나룻배에 올라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았다. 가을바람 탓에 몸마저 이리저리 흔들리고 구구절절 살아온 이야기는 쉴 틈 없이 뿜어대는 담배연기 속으로 흘러 나왔다. 캔 맥주를 준비해간 것에 대한 답례였을까? 할 말이 거의 바닥나자 풀밭에 숨겨 놓은 삿대를 가져와 물살을 가르며 건너편 부용대를 한 바퀴 돌아왔다. '자드락길 세상'의 첫 방송 '어이~ 뱃사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내게 묻다> 11쪽, 감사의 글 중)지난 11월 27일, 제18대 대통령을 뽑는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그날 대구의 '인문학 놀이터'라는 공간에서는 색다른 모임이 있었다. <내가 내게 묻다> 출판 기념 오픈라디오였다. 그 자리에는 아흔이 넘은 교육운동가부터 여든의 옛 주점 주인, 시인 등 책 속에 나온 주인공들이 함께 했다. 그들은 지난날에 겪은 고초나 속 쓰린 이야기보다 당장의 희망을 말하고 싶어 했다. 그 희망은 무엇일까?
<내가 내게 묻다>는 대구·경북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그다지 대구·경북답지 않은 이야기다. 특별한 사연을 가졌지만 어디에나 있을 법한 보통 사람들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삶의 흔적을 담은 인터뷰 에세이다. 저자가 공동체 라디오인 대구 성서공동체 FM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박창원의 자드락길 세상'을 5년째 만들며 만난 많은 사람 가운데 14명의 라이프스토리를 녹여 쓴 것이다. 지난 2009년 공동체라디오 어워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니 나름의 의미는 이미 인정받은 셈이다.
<내가 내게 묻다>는 제목과 '자드락길 세상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부제부터 책장을 넘기기 전 멈칫 하게 한다. '자드락길 세상'은 무엇이고, 내가 내게, 무엇을? 왜? 묻는가? 등의 호기심이 생겨서다. 그런데 숨을 고르고 한 번 더 쳐다보니 느낌이 딱 온다. 책 본문을 전부 읽지 않고 목차만 봐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듯 잘 지어진 제목이라면 제목만 봐도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게 한다. 이 책의 제목이 그렇다.
자드락길은 산기슭 비탈진 땅에 난 좁은 길이다. 자드락길은 대로나 신작로가 아닌 비탈길, 오솔길이다. 서울이 출발점이요 종착점인 대로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중앙과 자본이 지배하는 쭉 뻗은 일방통행 길이다. 그러나 자드락길은 그 옛날 어느 산골에서 다른 동네의 산골로 연결된 좁고 비탈지지만, 굽이쳐 흘러 세상 모든 곳으로 연결되는 소통의 길이다.
자드락길을 생각하면 '길을 가는 자 흥하고, 성을 쌓는 자 망하리라'는 징기스칸의 말에서 시작하였다는 신영복 선생의 <변방을 찾아서>가 떠오른다. 자드락길 세상이 변방과 겹쳐 보인다. 변방을 단순히 지역적으로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이나, 주변부라는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된다. 자드락길을 잘 다듬어진 대로의 대칭어로 읽어서는 안 되듯이 말이다.
변방을 변방성·변방의식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듯이 자드락길 세상도 저자의 바람대로 변화와 소통의 공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영복 선생의 변방이든 저자의 자드락길 세상이든 새로운 역사가 찾아올 중심으로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는 곳으로 바라봐야 한다. 변방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변방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원동력이요 잠재력이다.
문명의 역사는 언제나 변방에 의해 새롭게 시작되고 쓰여 왔단다. 문명의 중심지가 끊임없이 변방으로 이동해 간 역사라고도 한다. 수많은 지역과 인물들이 변방에서 살다가 역사의 중심으로 나아갔다. 변방의 핵심은 공간이 아니라 의식이며, 변화와 소통하는 힘이다. 변방의식을 통해 늘 갇혀 있는 틀을 깨뜨리고 스스로 성찰하고 부단한 변화와 소통을 통해 새로워질 때 생명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구경북의 경우 고립된 섬처럼 폐쇄적 사고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난다든지.
<내가 내게 묻다>는 자드락길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곡주사 이모, 하회마을 뱃사공, 고서점주인, 비구니 교사, 작은 교회운동 목사다. 또 교육이나 통일·언론·노동·학생운동을 하며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몸을 섞은 이들이다. 장승쟁이와 음악가, 참여시인 같은 민초들의 따듯하고 가슴시린 이야기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