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에도 태극기 볼 수 없는 삭막한 아파트 단지

태극기 볼 수 없는 을씨년스런 3.1절

등록 2013.03.02 11:49수정 2013.03.0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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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 내건 3.1절 태극기 ⓒ 윤도균


오늘은 제 94주년 3.1절이다. 한창 꿈나라 여행 중인 6학년 손자 녀석을 깨웠다. "도영아! 오늘이 3.1절인데 태극기 달아야지"라고 말하면 '네, 할아버지'라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녀석은 "할아버지가 다시면 안 돼요."라고 말한다.


나, 참 기가 막혀... 요즘 세상 '핼애비' 노릇 해 먹기 정말 어렵네요. 그 옛날 우리 어려서는 부모님께서 한마디하면 감히 어딜 군소리할 수 있단 말인가? 좋든 싫든 '예 알았습니다'하고 시키는 대로 행하는 것이 도리인데, 이 녀석은 내가 제 아비보다 한 계급 높은 할아버지가 태극기 달라는데 '토'를 단다.

"이 녀석아 할아버지가 태극기 다는 것이 힘들어 안 달았겠느냐?" 우리 집에 하나뿐인 손자 너에게 '태극기의 소중함과 3.1절'에 대한 이야기 들려주며 태극기 달려한 것인데... 하기 싫은 일을 할아버지가 시키니 마지못해 하려다 그만 할머니가 겨우내 고이고이 키워낸 예쁜 봄꽃 화분을 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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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날리는 태극기 ⓒ 윤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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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역광에 비친 태극기 모습 ⓒ 윤도균


마룻마닥은 물론 베란다 창틀에 온통 화분 깨진 흙으로 난장판이 되었으니 할머니 들어오기 전 사태수습을 하려면 할아버지 개고생은 받아놓은 당상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마침 할머니가 없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계셨으면 어휴 상상하기도 싫다. 하여간 할아버지 잔소리 몇 마디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으니, 손자 녀석 오늘 운수대통한 날이다.

그렇게 사고 친 손자 녀석은 제가 저지른 죄가 있으니... 깨진 화분 뒤처리하는 할아버지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그런 가운데 난 내친김에 겨우내 꽁꽁 닫아두었던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 집안 공기도 환기를 시키고 대청소 하는데 세상에 오늘이 분명히 '3.1절'인데, 150세대 아파트에 태극기 단 집은 고작 너덧 집이 채 안 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 국민의식이 지나치게 '편의 위주 간소화'를 선호하는 바람에 오늘같이 중요한 국경일에도 태극기를 안 달고 경시하는 것 같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아마 많은 국민이 3.1절 의미엔 관심 없고, 3.1절이 휴일인 것에만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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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우리집에 내건 태극기 쓸쓸히 외로운 모습이다. ⓒ 윤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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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가 바람에 펄러깁니다. ⓒ 윤도균


그런데 웃기는 일은 3.1절 태극기 달다 본의 아니게 아침들이 대형 사고를 친 손자 녀석은 '호랑이 할아버지'께 한바탕 된통 호되게 야단맞을 줄 알았는데 순순히 그냥 넘어가는 것이 불안했던지 평소 그렇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공부해라.' 할 땐 온갖 핑계를 다 대며 '요리조리 빼기 적'거리며 딴전을 부리던 녀석이 할아버지 대청소 2시간 내내 군소리 없이 자리 지키며 문제집을 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아침 운동 나갔다 귀가한 도영 할머니는 화분 깬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뜻밖에 남편은 집안 대청소를 하고 있고, 손자 녀석은 공부하는 모습에 감동 받았는지... '오늘 점심은 외식합시다.' 하더니 식구들을 데리고 소문난 칼잡이(갈 국수 +수제비)를 한 그릇씩 사 주었다. 맛있게 먹고 돌아오는 길에 손자 녀석이 사고 친 화분 이야기를 했더니 뒤늦게 야단도 치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표정이 깨가 쏟아지도록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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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는 그날까지 제 94주년 3.1절을 맞아 올해 6학년 손자 아이와 태극기 달며 생긴 이야기를 기사로 썼습니다. ⓒ 윤도균


#태극기 #3.1절 #대한민국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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