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불쌍하지 않습니다, 모범적인 편입니다

[백수분투기③] 백수생활 한달... 20대를 우울하게 하는 것들

등록 2013.03.23 10:34수정 2013.03.23 10:3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밥풀이 묻은 더러운 추리닝에 일주일 째 안 감은 머리, 쌓여있는 만화책과 24시간 꺼지지 않는 컴퓨터. 백수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 인터넷 검색 창에 '백수'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니 같은 말에 백수건달이 뜬다.


"돈 한 푼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건달…."

나는 얼마 전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생, 그러니까 새내기 백수가 됐다. 그리고 원하지도 않는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가 백수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을 만난다.

백수라는 타이틀을 인정합니다

a  취업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SBS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와 <샐러리맨 초한지>의 한 장면.

취업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SBS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와 <샐러리맨 초한지>의 한 장면. ⓒ SBS


#1. 대학을 졸업한 지 한달 째, 어느 날 '조교실'이라는 이름으로 전화벨이 울렸다.

매년 학교에서는 전 학생들의 취업률과 각 과의 취업실적을 조사한다는 목적으로 학생들에게 전화를 돌려 취업유무를 확인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취업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화는 일주일 내내 계속 됐고 나는 끝까지 받지 않았다. 며칠 뒤 친한 친구와 카톡을 하던 도중 친구가 말했다.

"OO이가 취업률 조사하는데 너 전화 안 받는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원래 걔는 연락 잘 안 돼~ 이랬어."


대변인이 돼 준 친구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안심하고 있는데, 얼마 못 가 결국 전공교수님께 전화가 오는 바람에 고분고분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취업은?"
"아직 못 했어요." 
"생각하고 있는 데는 있니?"
"네. 준비하고 있어요."

전화를 끊은 뒤, '2013 졸업생의 취업률조사'에서 실업자 명단의 한 켠에 조용히 오르는 내 이름이 머릿속에 그려져 나는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2. 일주일 전, 나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 헬스클럽에 등록했다. 건강미 넘치는 내 모습을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러닝머신을 뛰고 있는데, 처음 본 트레이너가 반갑게 웃으며 내게 왔다.

"학생이세요?"
"아뇨, 취업준비중이에요."

그러자 트레이너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안 됐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더한다.

"아 그러시구나. 빨리 취업하셔야죠. "

운동을 다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에 들어가자 한 아주머니께서 내게 말을 걸었다.

"원래 낮에는 이렇게 사람이 없어요?"
"네. 저는 늘 이 때 오는데 항상 이래요~"
"그렇구나. 학생이에요?"
"아뇨... 이번에 졸업해서 취업준비중이에요."

그러자 이번에도 아주머니께선 쓴웃음을 지으며 충고의 한 마디를 더한다.

"취업준비? 열심히 운동해서 몸매 가꿔야겠네, 면접보려면."

#3.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모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기 위해 내 신상정보를 입력하다 '회원유형'이라는 칸에서 나도 모르게 학생을 클릭했다. '맞다 나 졸업했지' 하고 다시 취업준비생으로 슬며시 마우스를 옮겼다. 순간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트레이너와 쓴웃음을 짓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회원유형 학생과 직장인 사이에 끼어있는 취업준비생란을 클릭한다.

회원유형 학생과 직장인 사이에 끼어있는 취업준비생란을 클릭한다. ⓒ 김아나


취업률조사를 한다는 학교의 전화에서, 처음 등록한 헬스클럽의 트레이너에게서, 처음 보는 아주머니에게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서, 취업하셨냐는 후배의 문자에서, 학원 상담원과의 전화에서, 심지어 인터넷에서 회원가입을 할 때조차 나는 백수라는 화려하지 못한 내 상황을 직시하고 만다.

나는 내 삶에 당당해지고 싶은데 백수라는 이름표를 단 이후 나는 어딜 가나 안쓰러움의 대상이 되고 만다.

20대 백수의 삶에서 빠지지 않는 '자기계발서'

얼마 전 일본에 있는 아는 오빠에게 '그것은 알기 싫다'라는 팟캐스트를 추천받았다. 제일 재미있어 보이는 방송을 찾다가 '안 아픈데 청춘이다'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와 클릭했다. 끝없이 쏟아지는 자기계발서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디딘 청년들은 끊임없이 힐링과 멘토를 찾는다는 이야기였다. 

20대 청년들은 자기계발서를 탐독한다. 뒤처진다는 불안감이 들 때는 늘 자기계발서를 펼쳐 들고 밑줄을 긋는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는 위로의 말을 찾기 위해, 뒤늦게라도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 혹은 빨리 성공하는 법이 있는지, 있다면 그 법을 배우기 위해 늘 자기계발서에 적힌 희망의 말을 찾는다. 나에게 반문해본다. 나도 그럴까?

문득 내 수첩을 들여다 봤다. 평소 자기계발서적을 쉼 없이 비판하던 내 수첩에는 '~하라'는 누군가의 조언과 '걱정하지 말라'는 힐링의 말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내 수첩 수첩을 가득 채운 힐링의 말

내 수첩 수첩을 가득 채운 힐링의 말 ⓒ 김아나

나는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외국어 공부를 하고 컴퓨터학원에 가고 꼬박꼬박 신문을 챙겨보며 일주일에 세 번 운동을 하고 책은 최소 한 권 이상 읽는다.

물론 이 일들은 뒤늦게 찾은 내 꿈을 위해서다. 놀고 먹는 백수건달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바쁘고 그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백수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그럼에도 나는 불안하다. 백수가 된 이후로 '한 번 만나자'는 친구들의 전화에도 나는 '일주일에 한 명만'이라는 계획을 정해놓고 수많은 제안을 거절한다.

누군가 내게 뭐하냐고 물으면 취업준비 한다는 말과 함께 '이제 막 졸업했다'는 말을 꼭 덧붙인다. '잉여스럽지 않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혹은 '안쓰러움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백수라는 타이틀을 인식하게 될 때면 나는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때마다 책이나 트위터를 뒤지며 위로의 한 줄을 찾아 수첩에 옮긴다. 20대 취업난, 청년실업 100만, 매서운 고용한파 등의 끔찍한 문구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젊은이들이여 힘을 내라'는 등의 꿈 같은 한마디로 눈을 돌린다. 불안한 현실 속에서 꿈꾸고 싶은 개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한다.

수첩에 적힌 위로의 말을 보며 한달차 새내기 백수는 오늘도 꿈을 꾼다. 백수라는 불안함에 쫓기지 않고 나아갈 수 있기를. 노력한 만큼 성과가 늘 따르기를.
#취업 #백수 #20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