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마산지역 중학생들은 매우 어려운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인구에 비해 인문계고등학교 숫자가 턱없이 적었기 때문이다. 야간자율학습 뿐만 아니라 새벽등교까지 하곤 했다.
김대홍
*필자의 학창시절과 당시 상황을 엮었습니다. 1987년 경남 마산 소재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은 심란했다. 당시의 민주화 바람 때문도, 마산을 대표하는 스포츠스타 이만기가 '인간기중기' 이봉걸에 잇따라 패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해 고등학교 입학시험인 연합고사 커트라인이 역대 가장 높을 것이란 전망 때문이었다.
교사들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잔뜩 겁주며 공부를 독려했다. 2학년 때는 야간학습반이 생겼고, 새벽반을 만드는 학교도 있었다. 80년대 마산의 고교 입시 커트라인은 평균 170점(200점 만점)이 넘었다. 87년엔 180점이 넘을 것이란 게 대다수 교사들 생각이었다.
반에서 10등 안에 드는 아이들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한 교사는 "대학도 아니고 고등학교에서 떨어지면 창피해 마산에서 얼굴 들고 다닐 수 없다"며 아이들을 긴장시켰다. 중3 아이들은 답답한 가슴으로 지냈지만 어른들 술자리 화제는 달랐다.
일단 한일합섬이 화제였다. 대다수 도시 사람들에게 '내 고장 기업'이 잘 나가는 건 큰 자랑거리다. 울산에는 현대차와 중공업, 포항에는 포항제철이 있다면, 마산엔 한일합섬이 있었다.
1970년대 10대 기업에 든 한일합섬. 1980년대에도 꾸준히 30위권 대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현대나 럭키금성, 삼성, 대우 같은 '진짜' 대기업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부터 뭔가 다른 바람이 불었다. 1985년 10대기업이었던 국제그룹 일부를 한일합섬이 인수하면 재계 순위 15위 권으로 대폭 뛸 전망이었다.
게다가 87년 6월엔 한일합섬이 그 대단하다는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다고 발표했다. 마산시민은 "이제 한일합섬도 진짜 대기업에 포함된다"고 기대했다. 지역민들에겐 모든 게 얘깃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