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어머니가 여수에 나들이 왔다 돌산대교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심명남
그 후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다행히 아버지는 9월 7일 송환됐다. 송환된 선원은 탁성호 뿐이 아니었다. 당시 신문은 납북된 어선 7척과 납북어부 161명이 1년 만에 속초항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이때 돌아온 배는 탁성호(여수), 명성3호(속초), 해부호(속초), 제2승해호(속초), 대복호(주문진), 고흥호(속초), 승운호(아야진)다.
속초항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또 현장에 파견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후 여수로 돌아온 아버지와 선원들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어 순천교도소에서 3개월간 감방을 살아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노릇이었다.
납북된 어부들이 무슨 죄란 말인가? 배가 납치되어 SOS 구조를 요청했지만 우리 군이 어부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이럴진대 당국에서는 위로는커녕 무슨 지령을 받았냐며 간첩이나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당시 반공법으로 아버지처럼 힘없는 약자들이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는지 알 수 있는 한 대목이다. 어린 나를 업고 면회에 갔던 어머니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느그 아부지가 원주시청에서 조사 받을 때 참 많이 맞았어. 얼마나 두들겨 맞았으면 다리가 퉁퉁부어 용갈이 팬티를 잘라서 옷을 벗었어. (정보부 직원들이) 북한에서 무슨 지령을 받았냐면서 빨갱이로 몰렸어. 아버지와 선원들은 정보부 직원들에게 안 죽을 만큼 맞고 전기고문도 당했어. 느그 아부지는 북한 얘기는 몸서리 난다면서 술을 그리 드셔도 말을 안 해. 죽을 때까지 안 하드만. 오죽했으면 북쪽을 보고는 오줌도 안 싼다고 그랬겠냐."평생을 감시당한 아버지..."어떻게 이럴 수가" 이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시'였다. 고향에서 생업에 종사했지만 납북자라는 꼬리표를 단 아버지와 선원들은 경찰로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당해 왔다. 경찰은 계속적으로 이들의 동향 파악과 함께 보고가 이어졌던 모양이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 나이 22살 때다. 난 군 생활을 섬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했다. 당시 OO지서에는 전·의경이 없었다. 그래서 무기고를 지키는 방위병들이 지서의 행정업무를 보조했다. 졸병 때부터 행정업무를 계속적으로 봐 왔던 난 18개월 동안 지서에서 근무했다. 상병을 달고 고참이 된 어느날 지서에서 서류 정리를 하다 나도 모르게 내 눈을 의심하는 문구에 눈이 멈춰 섰다. 그것은 3급비밀 서류였다. 그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최근까지의 동향파악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납북된 지 20여 년 전의 일이었다. 아들이 장성해 군복무를 하고 있는데도 계속적으로 감시를 당한 사실에 난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순간 다리에서 힘이 쫙 빠졌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민간인 사찰인 셈이다. 그날 밤 충격에 난 술로 밤을 지새우고 눈물을 흘렀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국가의 이중성에 더 화가 치밀었다. 이런 사실은 우리 식구들 누구도 모르고 지냈다. 아버지는 이같은 사실을 알고도 뾰쪽한 방법이 없어 그냥 모른척하고 지냈을지도 모른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가족을 위해 오징어잡이를 나갔다 납북되어 1년간 자유 없는 세상에서 지낸 아버지는 술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자식들을 불러놓고 훈계도 하고 여러가지 잔소리도 늘어 놓으셨다. 하지만 지금껏 아버지께 북한에 다녀온 얘기는 한 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납북의 트라우마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누구보다 강한 분이셨던 아버지. 그런데 그날따라 아버지의 목소리는 너무 기력이 없으셨다. 항상 강하고 힘 있는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전화로 들려오는 기력이 없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울컥해 난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버지도 눈치를 챘는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단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버지의 흐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부자지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화로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것이 아버지와 잊을 수 없는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