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감시당한 아버지 "눈물납니다"

[공모-나의 아버지] 오징어잡이 갔다 납북된 아버지의 비애

등록 2013.05.29 22:42수정 2013.05.29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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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어부로 생활하신 아버지는 바다가 '인생의 무대'였다. ⓒ 심명남


한때 아버지는 나에게 원망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바로 술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날이면 가정불화가 잦았다. 어머니와 싸우는 술 드신 아버지의 모습은 사춘기 때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버지에게 가졌던 원망이 어쩌면 아버지를 더 빨리 돌아가시게 했는지도 모른다. 불효자식이 따로 없다.


아버지는 55세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어느덧 자식들이 크니 항상 며느리를 기다렸던 아버지. 당신이 그렇게 빨리 가실 줄 미리 알았던 까닭이었을까? 7남매 중 살아생전 누구도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 드리진 못했다. 하지만 장성한 자식들이 낳은 손주가 20여명이나 된다. 하늘에서 이런 모습을 보고 기뻐하실 아버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40대 후반 혼자 몸이 되신 어머니는 어느덧 일흔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어머님은 일편단심 아버지밖에 몰랐다. 지금껏 홀로 사시는 어머니께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또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뿐이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아버지 얘기를 자주 들려주신다.

"느그 아부지와 처음 선을 보던 날 노란 셔츠를 입고 백구두를 신고 나왔는디 꽃미남이 따로 없어. 병이 나고 항상 나한테 미안해라 하던 느그 아버지는 참 인정이 많으신 분이었다. 느그 아부지는 잠수도 잘했어. 수경만 쓰고 물 속에 들어가면 이따만한 감성돔을 잡오는디 어찌나 숨이 찍든지. 똑 니가 느그 아부지를 꼭 빼 닮아 부렀어야."

바다가 인생의 무대였던 아버지

아버지의 피가 흐르는지 난 아버지를 빼 닮았다. 일예로 취미로 하는 다이빙이 그렇다. 물 속에 들어가면 아버지의 기를 이어받았는지 하나도 무섭지 않다. 평생을 어부로 생활하신 아버지는 바다가 '인생의 무대'였다. 지금에야 배를 굶는 일이 없지만 보리흉년 시절 아버지는 바다에서 일해 집안 어른들을 모셨다. 또 7남매의 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던 아버지는 한때 섬에서 여수까지 나가 동해로 오징어잡이를 떠났다. 오징어에 얽힌 아버지의 사연은 참 기구하다.

오징어잡이는 한없이 고달프기만 하다. 험한 파도에 시달리며 밤잠을 못 자면서 고기를 낚지만 수익은 점점 줄어들기만 한다. 고기떼를 쫓다가 납북되어 곤혹을 치르기도 하고 집채만한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으면서도 어부들은 먹고 살기 위해 다시 배를 타고 바다를 가른다. (중략)


어부들은 어제도 오늘도 서글프기만 하다. 속초, 주문진, 묵호, 울릉도 등 동해안에 있는 1천2백여 척의 오징어잡이 배를 타고 육지가 보이지 않는 원해의 검푸른 물에 낚싯줄을 던져 생활하는 어부는 2만5천여 명.

이들은 자비 3만여 원을 들여 낚시도구 장화 등 필요한 장비를 갖추고 제각기 식량을 준비, 1년에 6개월을 바다에서 보낸다. 때로는 풍랑, 때로는 눈비와 우박 그리고 납북의 위험 속에 추위에 시달리고 밤잠을 제대로 못 자면서 일해도 월평균 7만 원 이상을 벌지 못한다.

1976년 11월 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다. 속초 이규석, 사상길 기자는 '가난만 낚는 오징어잡이의 비애(悲哀)'를 이렇게 썼다.

오징어는 난류성 어류다. 수온이 높아야 많이 잡힌다. 오징어의 성수기는 여름부터인데 특히 9월~11월 동해안 어민들의 효자어종은 바로 오징어였다. 오징어에 얽힌 사연은 바닷가 어부의 자식이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듯싶다. 언젠가 아버지의 얘기를 글로 쓰고 싶었다. 때마침 아버지에 대한 공모기사가 떴다. 아버지에 대해 이제는 말할 때가 온 것 같다.

오징어잡이 나섰다 납북된 아버지 "무슨 지령받았냐"

71년 8월 31일자 <경향신문>은 아버지가 탄배인 탁성호가 '동해 표류중 북괴무장선에 30명 탄 오징어 배 납북'이라는 기사를 보냈다. 납북선원명단중 당시 30세의 아버지는 심여종이었으나 심여동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 심명남


나의 아버지는 '납북어부'다. 정확히 말하면 오징어잡이를 나갔다가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치당했다. 아버지가 납북된 것은 1971년 8월 30일 오전이다. 아버지가 탄 배는 '탁성호'였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지 6개월이 막 지날 무렵이었다. 30명의 어부들과 함께 아버지 는 여수에서 동해안으로 오징어잡이에 나섰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운명을 바꾼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당시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다.

오전 8시 40분쯤 동해 어로저지선 근해에 오징어잡이를 나간 여수항 소속 탁성호(19.65톤 선장 곽성주 41)가 북괴무장선박에 의해 납북됐다. 짙은 안개와 높이 3m의 물결로 표류 중 어로저지선 해역에서 납치되었다. 이후 해군경비정이 출동하여 탁성호를 사이에 두고 6시간이나 대치해 구출하려 했으나 이날 하오 강제 납북됐다.(중략)

당시 일명 탁성호 사건은 연일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당일(30일) <동아일보>는 '동해 분계선 우리함 북괴정과 대치', 31일 <경향신문> '동해 표류 중 북괴무장선에 30명 탄 오징어 배 납북', <매일경제> '오징어잡이 배 납북', <동아일보> '탁성호 끝내 납북'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오징어잡이에 함께갔던 아버지보다 한 살 많으신 동네 어르신 김도암(75)씨는 당시의 긴급했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오징어잡이 나간 지 이틀 만에 태풍이 온다고 남쪽으로 피신을 하라고 교신을 주고받았어. 그날따라 안개가 짙고 파도가 높아 바다에서 쫓겨 들어왔지. 피신을 오는 중 북괴경비정을 만났어. 100m 앞에서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엎드려 총을 겨누고 있었어. 총 앞에는 꼼짝을 못하는 거지. 북괴경비정이 깃발로 신호를 해서 우리를 북측으로 유도를 하더라고. 선장은 계속 우리측 경비정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SOS를 보냈지. 해군 함정은 무전 상으로만 연락을 했지 직접 오지는 못했어. 북한 경비정이 이미 접근한 상태니까."

아버지는 30세의 나이에 납북되었다. 섬에서 먹고 살기가 급급했던 시절 이곳 사람들은 동해로 오징어를 낚으러 가면 돈벌이가 좋았다. 당시 우리 마을에서 아버지를 포함해 5명의 고향 어른들이 오징어잡이에 나섰다 변을 당했다. 어머니는 방송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없던 1년간 어머니는 내 위로 형님 둘과 태어난 지 6개월 된 나를 업고 힘들게 생활했다. 섬에서 국수와 잡화를 팔러 다니며 끼니를 연명했다. 물건을 이고 동네 골짜기 마을까지 팔러 다녔는데 사람들은 어머니가 짠하다며 필요 없는 물건도 사주며 십시일반 도움을 주셨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여수에 나들이 왔다 돌산대교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 심명남


그 후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다행히 아버지는 9월 7일 송환됐다. 송환된 선원은 탁성호 뿐이 아니었다. 당시 신문은 납북된 어선 7척과 납북어부 161명이 1년 만에 속초항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이때 돌아온 배는 탁성호(여수), 명성3호(속초), 해부호(속초), 제2승해호(속초), 대복호(주문진), 고흥호(속초), 승운호(아야진)다.

속초항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또 현장에 파견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후 여수로 돌아온 아버지와 선원들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어 순천교도소에서 3개월간 감방을 살아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노릇이었다.

납북된 어부들이 무슨 죄란 말인가? 배가 납치되어 SOS 구조를 요청했지만 우리 군이 어부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이럴진대 당국에서는 위로는커녕 무슨 지령을 받았냐며 간첩이나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당시 반공법으로 아버지처럼 힘없는 약자들이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는지 알 수 있는 한 대목이다. 어린 나를 업고 면회에 갔던 어머니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느그 아부지가 원주시청에서 조사 받을 때 참 많이 맞았어. 얼마나 두들겨 맞았으면 다리가 퉁퉁부어 용갈이 팬티를 잘라서 옷을 벗었어. (정보부 직원들이) 북한에서 무슨 지령을 받았냐면서 빨갱이로 몰렸어. 아버지와 선원들은 정보부 직원들에게 안 죽을 만큼 맞고 전기고문도 당했어. 느그 아부지는 북한 얘기는 몸서리 난다면서 술을 그리 드셔도 말을 안 해. 죽을 때까지 안 하드만. 오죽했으면 북쪽을 보고는 오줌도 안 싼다고 그랬겠냐."

평생을 감시당한 아버지..."어떻게 이럴 수가"

이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시'였다. 고향에서 생업에 종사했지만 납북자라는 꼬리표를 단 아버지와 선원들은 경찰로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당해 왔다. 경찰은 계속적으로 이들의 동향 파악과 함께 보고가 이어졌던 모양이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 나이 22살 때다. 난 군 생활을 섬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했다. 당시 OO지서에는 전·의경이 없었다. 그래서 무기고를 지키는 방위병들이 지서의 행정업무를 보조했다. 졸병 때부터 행정업무를 계속적으로 봐 왔던 난 18개월 동안 지서에서 근무했다. 상병을 달고 고참이 된 어느날 지서에서 서류 정리를 하다 나도 모르게 내 눈을 의심하는 문구에 눈이 멈춰 섰다. 그것은 3급비밀 서류였다. 그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최근까지의 동향파악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납북된 지 20여 년 전의 일이었다. 아들이 장성해 군복무를 하고 있는데도 계속적으로 감시를 당한 사실에 난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순간 다리에서 힘이 쫙 빠졌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민간인 사찰인 셈이다. 그날 밤 충격에 난 술로 밤을 지새우고 눈물을 흘렀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국가의 이중성에 더 화가 치밀었다. 이런 사실은 우리 식구들 누구도 모르고 지냈다. 아버지는 이같은 사실을 알고도 뾰쪽한 방법이 없어 그냥 모른척하고 지냈을지도 모른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

가족을 위해 오징어잡이를 나갔다 납북되어 1년간 자유 없는 세상에서 지낸 아버지는 술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자식들을 불러놓고 훈계도 하고 여러가지 잔소리도 늘어 놓으셨다. 하지만 지금껏 아버지께 북한에 다녀온 얘기는 한 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납북의 트라우마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누구보다 강한 분이셨던 아버지. 그런데 그날따라 아버지의 목소리는 너무 기력이 없으셨다. 항상 강하고 힘 있는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전화로 들려오는 기력이 없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울컥해 난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버지도 눈치를 챘는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단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버지의 흐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부자지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화로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것이 아버지와 잊을 수 없는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이야….

노젖는 배인 풍선으로 어장을 하신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1학년때 발동선을 무었다. 아버지와 함께 남면 면사무소에서 검사를 받으러 가서 찍은 흑백사진 ⓒ 심명남


이후 아버지는 며칠 만에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추석을 이틀 앞둔 무렵이었다. 자식들을 위해 횟감을 준비한다고 고기잡이에 나갔던 아버지는 고기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그만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됐다. 이후 다시는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명절을 앞두고 당한 아버지의 죽음은 더 안타깝고 서글펐다. 훗날 가족들은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선물을 주고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제삿날이 추석 바로 전날이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해마다 추석에 모여 제사를 모신 후 처가, 시댁으로 곧바로 떠난다. 어머니께서는 자식들에게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다.

"남들은 제사 한번 지내려면 객지에서 휴가 내고 고향을 찾는데 우린 추석 쇠러 와서 제사를 모시니 얼마나 좋노. 돌아가시면서도 자식들을 생각하는 느그 아부지는 참 욕심도 많지."

이제는 당시 납북되었던 선원들은 아버지마냥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분단의 아픔과 함께 희생당한 아버지 세대의 오징어잡이 어부들은 아직도 납북어부로 분류되어 철 지난 감시의 그늘에서 사라졌는지 모를일이다.

납북으로 인해 일생을 감시당한 아버지와 납북자들의 피해는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까? 오늘따라 아버지가 더 그리운 건 가정의 달인 5월 때문만은 아닐 듯싶다. 살아생전 한 번도 못해본 이 말이 왜 그리 힘들었는지 모른다. 아버지께 꼭 해주고 싶었던 간절한 한 마디로 모든 용서를 구하고 싶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탁성호 #납북자 #공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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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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