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안 받으면 계약 안하는 줄 알아야지, XXX야"

[공모-웃다가 병든 사람들] 공인중개사 9년차의 애로사항

등록 2013.06.20 15:01수정 2013.06.20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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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여사가 나오는 개그프로를 보면서 웃는 건지 쓰린 건지 모르겠다. "바꿔줘"를 연발하며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것이 풍자로 보이기보다 현실로 보여서 쓰리다.


왜 난 매일 이래야만 하는 걸까? 매일 미안해야 하고 매일 죄송해야 하며 죄스럽기까지 해야 하는 걸까? 불편해야 하고 그것이 만성이 되어 자기 전 누워 있어도 편하지 않다. 어디를 가도 불평불만이 들리는 것도 모자라, 이유 없이 나를 힘들게 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심지어 날 괴롭히면서 즐거움을 얻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몸이 날씨처럼 눅눅해지는 것이다. 썩는 것 같다. 내 영혼은 병들어 지쳐 이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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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부동산 간판 ⓒ 연합뉴스


나는 공인중개사다. 장기간 이어지는 불황으로 서민들의 생활은 팍팍해지고 그 팍팍해진 만큼 마음도 걍팍해지는 것 같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 이럴 땐 마음부터 여유가 생겨야 하는 걸까? 주머니부터 여유가 생겨야 하는 걸까?

"애완견 아닌 토끼 기르는 게 뭔 잘못이냐"는 임차인

일을 그만 둘 수도 없는 입장이다. 일정하고 꾸준하진 않지만 가뭄에 콩나듯 큰 계약건들이 눈 앞에서 아른아른 거린다. 그나마 그것조차 될듯 될듯 뭔가가 부족한 듯 희망고문 하는 느낌이다.


딱히 다른 뭔가를 시작하기에도 시작하지 않기에도 애매해진 나이와 경력이다. 세상에선 말하길 가장 늦은 때가 가장 빠른 때라 하지만  그것도 통하는 시기가 있다는 걸 알아 버린 나이가 되었다. 늦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늦을지도 모른다.

요즘 나보다 젊은이들의 직업이 어떠한지 잘 알지 못하나 계약직 혹은 파견으로 1년 단위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그러다 보니 임대인의 뜻대로 2년보단 1년으로 계약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주택임대차보호법 취지에 따라 임차인에게 2년을 보장해주는 것이 옳다고 본다. 임대인들이 자기만의 이익만 앞세우기보단 좀 더 여러 사람을 배려했으면 한다. 또한 임차인들도 주택임대차보호법 및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의 취지를 잘 이해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애완동물은 키우시면 안 됩니다"라고 설명을 하고 계약서에도 애완견 사육 금지를 넣어뒀다. 입주 후 임대인에게 연락이 와서 한다는 말이 임차인이 토끼를 키운다고 격하게 항의한다. 임차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처음에는 평범하게 이야기 하다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 아닌가.

"그게 왜 그게 뭐 애완견 아니잖아! 토끼잖아! 토끼는 그런 얘기 없었잖아!!! 아침부터 재수 없게!!!"
뚜 뚜 뚜~

다음부턴 모든 생물 사육 금지라고 특약사항에 적어야 할까보다.

아름다운 아가씨 입에서 나온, 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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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인중개사다. 장기간 이어지는 불황으로 서민들의 생활은 팍팍해지고 그 팍팍해진 만큼 마음도 걍팍해지는 것 같다. ⓒ sxc


또 한 번은 금요일에 원룸을 보고 일요일에 입주하기로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도배를 요청하고 계약금 보낼 테니 다른 곳에 주지 말라고까지 했다. 그랬던 그가 토요일에 연락이 없기에, 여런 번 전화를 시도했다. 그는 입주하겠다고 약속한 일요일에 입주를 하지도 않았고, 그러고 나서 나에게 한다는 소리가, 적반하장이었다.

"도대체 몇 번이나 전화를 하는 것이냐, 전화 안 받으면 (계약)안 하는 줄 알아야 하지 않느냐. 내가 사회생활 몇 년을 했는데 당신 그 일 몇 년이나 했느냐. 안 받으면 안 한다고 알아먹어야지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 일을 하느냐 이 싸XX XX야 사과해!"

아름다운(?) 아가씨 입에서 참 예쁜 소리가 났다.

건국 이래 최고의 학력들이 배출된 시기라고 한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우리네 문화적 인식도 성장하였는가를 생각해 볼 때, 엄청난 '문화지체'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얼른 잡념을 흔들어 털고 일어나야 한다. 열 받았다고 같이 소리소리 지르고 열내봐야 나만 손해다. 서비스업이다. 그 놈의 서비스업.

공인중개사 9년차에 자리를 잡고 버틴 지 5년차. 조금만 더 버티면 빛이 보이겠지라는 희망으로 살았는데, 이제 어느 정도 오래 했구나란 소리를 들을 시기가 되어간다.

어찌어찌 오늘 하루도 살아지며 썩어가는 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웃는다. 세상에 적응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먼저 속인다. 사람들에게 내 미소를 보이기 위하여 나를 먼저 속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도 마음 한 구석에서 다짐을 해본다.

난 서비스업 종사자지만, '종' 은 아니다. 그럼에도 출근 전에 자존심은 냉장고에 넣어두려고 한다. 또 서비스업이지만 전문가의 자세로 더욱 더 정진하련다. 아울러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공부하려고 한다. 그리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서 받고, 이해하려고 한다. 또 인사를 궁하게 하지 말자. 자존감은 머리에 있지 않다. 무릎에 있다.

오늘도 살아보자.
덧붙이는 글 웃다가 병든 사람들 응모글입니다.
#서비스업 #공인중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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