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술마시는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잖아!

[공모- 혐오와 차별] 당신의 혐오와 나의 차별

등록 2013.07.01 15:52수정 2013.07.0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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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가산디지털단지'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10년 전만 하더라도 이 역의 이름은 '가리봉'이었다. 왠지 촌스러워 보이는 이 역의 과거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했던 곳이 바로 가리봉역 근처였기 때문이다(이하 '가리봉역'으로 총칭하겠다). 그리고 그 당시 생활을 기억하다보면 선입견과 관련된 하나의 장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구로디지털단지역'의 이름도 '구로공단역'이었다.


지금이야 9호선이 개통했기 때문에 2호선 대림역에서 9호선으로 갈아타면 더 편하게 그리고 더 빨리 가리봉역에 도착할 수 있지만, 내가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 2호선을 타고 신도림역까지 올라간 다음에 그곳에서 수원 방면으로 향하는 1호선을 갈아타야 가리봉에 도착했다.

가리봉역은 서울의 남서쪽 끝이고 내가 살던 잠실은 서울의 남동쪽에 위치한다. 잠실에서 가리봉까지 가는 길은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거의 여행길에 맞먹는 거리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 직장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IMF 때문에 거의 1년 가량 백수생활을 했던 나에게 찾아온 첫 직장이었기에 나는 힘든 것도 모른채 열심히 출·퇴근하며 직장생활을 했었다.

당시 가리봉역 주변은 온통 공단이었다. 크고 작은 공장들이 그곳에 모여있었고 내가 다니던 직장 옆에는 넓은 운동장도 하나 있어서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퇴근 이후에 직원들끼리 모여서 그곳에서 축구도 하곤 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보기 힘든 장면을 목격했던 매점도 그 운동장에 붙어있었던 것 같다. 이름이 '공단매점'이었던가. 일반 가게처럼 담배와 과자, 컵라면을 비롯한 여러가지 잡화를 팔던 곳이다. 그 매점 안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도 있어서 손님들은 그곳에서 산 술이나 음식들을 그 테이블에 앉아서 즉석에서 먹을 수도 있던 그런 곳이었다.

공단에서 보았던 의외의 장면


그날도 늦게까지 근무하고 혼자서 퇴근했던 나는 지하철역으로 향하기 전에 그 매점에 들렀다. 지금은 끊었지만 당시에는 피우던 담배를 사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점에 들어서자 두 명의 남성이 안쪽 테이블에 앉아서 소주를 마시는 모습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퇴근하고 술 한 잔 하는구나, 맛있겠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담배를 한 갑사고 또 뭐 군것질할 게 없을까 두리번거리느라 약간의 시간을 그 안에서 보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아까부터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것이다. 말없이 술을 마시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작은 매점에 앉아서 부실한 안주에 소주를 마시러 왔다면 뭔가 할 얘기가 있어서 아니었을까.


"말도 없이 술을 마시네, 하긴 꼭 말이 필요한 건 아니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밖으로 나가면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웬걸, 이 두 사람은 수화로 열심히 떠들어대며 소주를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이 사람들이 언어장애인들이구나!"

이 사실에 나는 살짝 놀랐다. '언어장애인들이 수화로 대화를 하며 소주를 마신다'는 사실이 왠지 의외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면서도 왜 그 장면이 의외라고 느껴졌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정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장애인이라고 술을 못마시는 것도 아닐테고 어쩌면 일반인들보다 더 맛있게 더 자주 마실 수도 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그건 아마도 '술과 말'의 상관관계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술을 마시고 술기운이 올라오면 가장 먼저 변화가 생기는 쪽은 '행동'이 아닌 '말'일 가능성이 많다.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지거나 아니면 반대로 말이 없어진다. 사소한 일에도 언성이 높아질 수 있고 별 거 아닌 일에 깔깔대며 웃을 수도 있다. 술기운을 빌어서 평소에 못하던 이야기를 하게 될 수도 있다. 어느쪽이건 간에 '말'과 관계된 일이다.

언어장애인들은 이 '말'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처럼 술자리를 즐기지 못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니 내 의식 어느 한 구석에 그런 선입견이 자리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말도 못하면서 술을 마셔? 무슨 재미로?

그날 지하철 안에서도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언어장애인들은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될까. 일반인들이 혀가 꼬이듯이 수화도 꼬일까. 말이 빨라지듯이 수화도 빨라지고 과격해질까. 그 이전에 그 언어장애인들은 공단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고 사라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술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기분좋은 일을 기념하거나 아니면 안좋았던 일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 그리고 어색한 사이에 있는 사람과 관계를 개선하거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꺼내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

그렇다면 언어장애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주보고 앉아서 술을 마시고 수화를 하면서 하루의 피로를 씻고 다음날을 준비한다. 평소에 하기 힘들었던 이야기도 술을 마시면 좀더 쉽게 꺼낼수 있다. 술을 마시면서 수화를 하면 좀더 솔직하게 상대에게 다가갈 수도 있을 것이다. 꼭 입으로 말을 해야지만 대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리봉동에 얽힌 추억들

가리봉에서의 직장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IMF의 여파가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사원을 채용하는 회사들도 점점 많아졌고 나는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더 좋은 조건의, 그리고 집에서 더 가까운 회사로 이직했다. 그 이후로 다시 가리봉을 찾기까지는 거의 1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것처럼 그 지역도 변했다. 가리봉역은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과거의 공단은 흔적만 남은채 지금은 크고 높은 현대식 대형건물들이 잔뜩 들어서 있다. 그 운동장도, 그리고 그 옆에 붙어있던 매점도 없어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 매점에서 술을 마시던 그 언어장애인들도 그곳을 떠났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니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간에 일을 마친 저녁시간에는 그때처럼 맛있게 술을 한 잔하고 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혐오와 차별' 응모글입니다.
#가리봉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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