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8. 16. 낙동강전선 융단폭격지점(다부동전적긴념관).
박도
이날 공습이 끝난 뒤 준기와 순희가 대숲에서 고개를 들자 야전병원 일대는 화산이 폭발한 듯 온통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30여명의 병원 인력 가운데 10명만 겨우 목숨을 부지했고, 그 가운데 다섯 명은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등 중상을 입었다. 병상에 있었던 200여 명의 부상병들도 대부분 그 자리에서 폭사했다.
이 폭격으로 문명철 야전병원장과 행정반 손만호 전사는 그 자리에서 전사했고, 장남철 상사는 왼쪽 귓바퀴가 절반 떨어져나가는 부상을 입었다.
김준기와 최순희 전사는 피폭 순간 야전병원본부 뒤 대나무 숲으로 급히 피하여 눈을 감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기 때문에 천만 다행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구사일생"준기 동무 아니면 나도 죽거나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중상을 입었을 거예요. 고맙습니다.""아닙네다. 내레 최 동무가 밥 먹자고 기러지 않았더라면 수술실에서 꼼짝없이 폭사했을 거야요.""아무튼 우린 서로가 상대를 살린 셈이구먼요.""나두 기런 생각이 듭네다.""정말 기적과도 같이 살아났어요.""기렇습네다.""그런데 미군들은 이렇게 병원에까지 폭탄을 떨어뜨리다니….""길쎄 말입네다. 애꿎은 인민들도 수태 폭사당한 것 같습네다. '야수 미제'란 말이 이래서 생긴 모양입네다.""이렇게 많은 사람을 몰살시키고도 저들은 하느님에게 사랑과 은총, 자비 등을 말하며 기도를 드리겠지요.""기게 전쟁이고, 종교입네다." "도사처럼 말하네요.""뭘요, 어느 책에서 본 말을 기저 얘기했을 뿐이디요." 유엔군은 융단 폭격이 끝나자 전날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대반격 작전을 펼쳤다. 그날 국군 1사단 13연대는 수암산 건너편 328고지를 다시 빼앗았고, 1사단 12연대는 다부동까지 침투한 적을 밀어낸 뒤 유학산 8부 능선까지 탈환했다. 또 1사단 11연대도 가산 고지를 되찾았다.
그날 융단폭격에 살아남은 임은동 야전병원 요원들은 폭격 뒤 수습으로 꼬박 밤을 새웠다. 살아남은 환자들 가운데 일부 중상자는 후송시켰지만, 남은 부상자들은 응급처치만 했다. 융단폭격에 전사한 시신들은 너무 많아 남아 있는 의료요원으로는 사체 매장은 엄두를 낼 수 없어 군데군데 모아 우선 거적만 덮었다. 그 대신 의료요원들은 살아남은 부상자 치료에 골몰했다.
융단폭격 이후 임은동 야전병원은 의료진과 장비 부족으로 더 이상 그곳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즈음 전후방을 가리지 않는 미군기의 맹폭으로 병원 장비와 인력 보충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사실을 간파한 인민군 야전지휘부는 8월 20일, 임은동 야전병원을 폐쇄하고 살아남은 의료요원들에게 낙동강 건너 유학산 성곡리 마을로 이동 명령을 내렸다. 의료요원들은 그 명령에 따라 임은동 야전병원을 떠나 다부동 들머리 성곡리 계곡에 터를 잡은 뒤 간이야전병동을 설치했다. 그런 다음 부상자들을 수용했다. 이 일은 장남철 상사가 주도했다.
낙동강 방어와 유학산 정상 839고지를 둘러싼 '다부동전투'는 한국전쟁 중 최대 격전지의 하나였다. 1950년 8월 초순에 시작하여 그 해 9월 24일에 끝난 50여 일간의 다부동전투에서 유엔군 1만여 명, 인민군 1만7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기간 중 유학산 839 고지는 무려 아홉 차례나 주인이 바뀌었다. 유학산 능선과 골짜기는 온통 시체로 산을 이루고, 전사자의 피로 시내를 이룬, 문자 그대로 '시산시해(屍山屍海, 시체의 산 시체의 바다)'의 전투가 거의 날마다 이어졌다.
특히 8월 18일부터 인민군은 대구를 빼앗고자 거의 매일 저돌적으로 맹공을 펼쳤다. 그들은 모든 화력을 집중시켜 유엔군 진지를 포격한 뒤 유학산 고지를 향해 미친 듯이 돌격했다. 낙동강 일대 최전선은 양측 모두 급히 모병한 의용군이나 학도병이 앞장섰는데, 피아 병사들은 수류탄을 너무 많이 던져 어깨가 퉁퉁 부었다.
양측 모두 초기에 투입된 병사들은 그간 전투로 죽거나 부상을 당해, 거의 신병으로 교체되었다. 신병 가운데는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하고 일주일 정도 현지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된 의용군이나 학도병들도 많았다.
양측 병사들은 전투에서 수류탄이 떨어지면 육박전을 벌였다. 인민군 지휘부에서는 전선에서 이탈하거나 돌격조에 가담하지 않는 전사들이 나오자 이를 막고자 독전대를 만들어 전선에 배치 감독케 했다. 이 독전대는 자기 편 병사들을 감시 감독케 하며, 전선에서 낙오한 자나 전투에 태만한 전사에게는 즉결 처분권도 줬다. 그러자 그 무렵 독전대는 인민군 전사들에게 저승사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8월 21일 다부동전투는 한국전쟁 개전 이후 최대 격전이었다. 이날 인민군은 '워커라인' 돌파를 위한 옥쇄작전으로 전선의 탱크나 야포로 전방을 포격한 뒤 돌격을 감행했다. 이에 국군도 뒤질세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이판사판 강대강 전술로 기습에는 기습, 돌격에는 돌격으로 맞섰다.
인민군이 제1열, 제2열, 제3열, 제4열, 제5열까지 각 전열 전후좌우에 독전대를 배치하여 돌격을 감행하자 유엔군은 계속 덤비는 적으로 지쳐버릴 정도였다. 이런 전투가 여러 날 계속되자 전선 곳곳에는 피아 병사들의 시체로 뒤덮였다.
전투가 끝나면 까마귀 떼가 날아와 사람의 시체를 마구 뜯어먹어도 누구 한 사람 쫓는 이도 없었다. 심지어 국군 진지에서는 인민군의 시신에 흙을 덮어 연락호를 쌓기도 했다. 낙동강 다부동전선의 양측 병사에게는 삶과 죽음이 '명재경각', 곧 찰나에 있었다. 날이 갈수록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병사들이 채반의 누에처럼 널브러진 채 유학산 일대를 덮었다. 그 어느 병사인들 귀한 자식이 아니겠는가.
전후방 백성들은 이 동족상잔의 혈투에 그저 통곡할 따름이었다. 아마도 하늘에 계신 선열도 이를 내려다보며 통곡하셨을 것이다.
1950년 여름은 그렇게 악몽처럼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