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시설공단 이사장님, 사과 못하겠습니다

[取중眞담] 턴키설계심의위원 보도에 "제보자 밝혀라" 요구

등록 2013.07.17 10:44수정 2013.07.1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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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SBS 수목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 '합리적 의심'이란 법률 용어가 등장한다. 주인공 박수하의 살인여부를 놓고 검사와 변호사가 공방을 벌인다. 검사는 몇 가지 정황증거를 근거로 박수하가 살인을 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변호사는 다른 정황증거를 내세워 살인하지 않았다며 '합리적 의심'을 한다. 극중 박수하는 '합리적 의심'으로 풀려난다. 하지만 변호사(장혜성)의 모친을 살해한 진범도 '합리적 의심'으로 무죄로 풀려난다.

법률에서 '합리적 의심'은 피고인의 무죄 추정의 원칙에 활용된다. 사실의 개연성에 논리적 의문을 제기해 억울한 상황을 구제하기 위한 논리체계다. 언론에서 '합리적 의심'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독자와 나누는 소통방식이다. 논리적 의문을 통해 감춰진 진실에 다가가는 접근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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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도시설공단 측이 <오마이뉴스>에 보낸 공문 사본 ⓒ 심규상


<오마이뉴스>는 최근 '지난 4월 공공기관인 한국철도시설공단이 발주하는 턴키설계심의위원에 시설공단 이사장의 처남인 A교수가 선정됐다'며 '수 천억원에 달하는 사업자 선정과 관련 사적인 입김이 작용할 우려가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철도시설 공단 측은 "이사장을 비롯 공단 측은 A교수가 이사장의 처남인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다. (관련 기사 : 철도시설공단, 이사장 처남이 설계심의위원?)

<오마이뉴스>는 다시 여러 날 추가 취재를 통해 '철도시설공단 이사장, 처남 턴키심의위원 정말 몰랐나?'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사장이 부, 처장 전결사항에 대해서도 수시로 비대면 보고를 받고 있는 조직운영시스템과 턴키심의위원이 갖는 업무 중요도 등을 근거로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는 내부 직원들의 목소리를 익명으로 소개했다. 취재원의 익명 요청을 받아들인 데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기자와 편집부의 판단이 들어있다.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처럼 내부 직원들이 가진 '합리적 의심'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의심부터 하고 보는 의심증이 아닌 이상 문제제기에 재갈을 물려서는 안 된다. 소통이 막히기 때문이다.

제보자 밝히든지 사과하라?... '합리적 의심'에 재갈 물리나


하지만 보도에 대한 철도시설공단과 김광재 이사장의 반응은 폭력적이었다. 시설공단은 이사장 명의로 <오마이뉴스>에 보낸 공문을 통해 정정보도 및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이를 폭력적이라고 한 것은 공단 측이 밝힌 정정보도와 사과를 해야 하는 이유 때문이다.

공문의 시작은 "귀사가 공정하고 정도를 가는 언론사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다. 이어 "직원들이 믿기 어렵다는 추측과 익명의 직원을 빙자하여 악의적 추측성 내용을 보도한 것은 정상적인 언론보도가 맞는지 의아하다"고 주장했다. 공단 측은 "제보자가 누구인지, 공단 비리에 연루돼 있거나 공단의 혁신을 반대하는 자는 아닌지 확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공문은 "만약 귀사가 사실을 밝히지 않을 경우 공개사과 및 재발방지를 엄중히 요구한다"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편협하고 비정상적인 언론기관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으로 보고 모든 법적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한 마디로 제보자를 밝히고 못하겠으면 사과하란다. 이마저 안하면 비정상적인 언론이기에 법적 조치하겠단다.    

공단 측 입장과 다른 주장을 하면 '비리연루자 이거나 공단 혁신을 반대하는 자'이거나 '정상적 언론이 아니다'는 논리다. 제보자가 누구인지 밝히라는 막무가내 요구는 이게 정말 국토교통부 산하 공공기관이 보낸 공문이 맞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한다. 다른 한편 취재원의 익명 요청을 받아들인 편집부의 판단이 현명했음을 반증해 준다.

공단 측이 취재원을 '비리연루자나 공단 혁신을 반대하는 자'로 몰아 불이익을 주려 하는 이상 <오마이뉴스>가 취재원을 공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정보도나 사과할 까닭은 더욱 없다. 그래서 공단 측이 법적조치를 해 주기를 바란다.

보도 이후 공단 노조가 성명을 통해 "부장급 전결사항까지 비대면 보고를 받는 이사장이 이런 중대한 사안을 몰랐다는 것은 임직원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공단 측이 노조를 '비리연루자나 공단 혁신을 반대하는 자'로 볼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합리적 의문을 던진 이들을 공단 혁신을 반대하는 자로 규정하는 시설공단 측의 인식은 조직의 임원들이 얼마나 경직돼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새삼 철도시설노조 조합원들이 '노사 갈등의 근본 원인'으로 779명(97%, 조합원 1058명 중 803명 응답)이 '이사장의 독단경영과 자질부족(72.3%), 임원들의 소신 없는 업무추진'(23.6%)이라고 답한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김 이사장과 임원들은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 '노조가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고 무사안일에 젖어 이사장 및 임원 등의 퇴진을 목적으로 왜곡된 결과와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거듭 말한다. 힘 있는 자가 합리적 의문을 틀어막을 때 소통도 막힌다.
#한국철도시설공단 #이사장 #합리적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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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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