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더러워지는, 여기가 '진짜 놀이터'

[행복하려면 풀뿌리부터⑤] 독일 프라이부르크시 '주민참여 놀이터'가 주는 교훈

등록 2013.07.24 11:35수정 2013.07.2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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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녹색당은 앞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지역에서부터 대안을 만들어가는 얘기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작더라도 눈에 보이고 경험할 수 있는 사례를 통해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불행의 악순환에 빠져 있습니다. 좌절과 무기력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우리의 생활과 동네, 지역부터 바꿔야 합니다. 그것이 국가를 제대로 바꿀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하려면 풀뿌리부터'입니다. [편집자말]
지난 2일 환경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모래놀이터 100개소 중 14개소에서 기생충(란)이 검출돼 어린이 활동공간의 환경오염상태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실외놀이터 700개소에 사용된 목재 중 사용이 금지된 방부제를 사용한 시설이 57개소로 8.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합성고무 바닥재가 시공된 369개소 중 30개소에서는 중금속 기준을 초과했다고 한다.

참 암담하고 어린이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세상에는 이런 놀이터밖에는 없을까?

자연친화 놀이터는 어떤 곳?

지난 6월 초 독일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를 방문했었다. 프라이부르크는 에너지자립을 이룬 생태도시로 유명하지만, 방문 일정이 거의 확정된 시점에서 나는 꼭 놀이터 담당자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시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한글판 자료 '프라이부르크 녹색도시'를 읽다가 눈길이 멈춘 다음의 문장 때문이었다.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150개 놀이터 중 이미 46개가 어린이들과 부모들의 협력하에 자연 친화적으로 개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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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부르크시 시청 근거 시내 중심부의 놀이터. 여기 깔린 것처럼 6-8mm의 모래자갈이 가장 안전한 바닥이라고 담당 공직자는 말하네요. 합성고무보다도요! ⓒ 서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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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이부르크시 놀이터. 자연친화적 놀이터로 만들었다. ⓒ 서형원


우리나라의 획일적이고 인공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놀이터를 보면서 늘 답답함을 느꼈던지라 '자연친화적 놀이터'라는 개념을 보는 순간, 우리 과천시에 꼭 필요한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놀이터를 어린이와 부모들과 협력해서 개조했다니 어떻게 했을까? 그 과정에 대해 꼭 들어보고 싶었다.


운이 좋아서 프라이부르크시청에서 담당공무원인 크리스티나 부흐만(Christina Buchmann)을 만날 수 있었다.

도대체 자연친화 놀이터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크리스티나는 "오직 자연에서 나오는 재료만을 쓰는 놀이터"라고 말한다. 나무, 모래, 자갈, 돌 같은 자연재료만을 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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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부르크시 놀이터. ⓒ 서형원


큰 도시에서 많이 까는 화학물질로 만든 고무바닥은 어린이들이 만지고 놀 수 없다. 언젠간 딱딱해지고 닳기 때문에 꼭 안전하다고도 할 수 없다. 반면 프라이부르크시의 놀이터는 가장 안전한 것으로 평가되는 6-8mm 모래자갈을 깐다. 목재 칩이나 고운 모래를 까는 경우도 많다. 모래는 1~2년에 한 번 전문 업체가 세척한다. 화학약품은 쓰지 않는다.

크리스티나의 말에 의하면 어린이들은 더러워지고 자연에서 뒹굴기 위해 놀이터에 간다. 놀이터는 그런 곳이다. 더러워지려면 물이 나오는 펌프도 필요하다. 물은 먹을 수 있는 수돗물을 쓴다. 모래와 펌프를 통해 어린이들은 더러워진다. 그것이 진짜 놀이터의 모습이다.

10곳 이상 둘러본 프라이부르크시의 놀이터에서는 색칠도 하지 않은 구불구불한 나무로 만든 그네와 미끄럼틀이 눈에 띈다. 알록달록한 플라스틱이나 페인트 칠한 철근은 찾을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놀이터에 페인트칠 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나도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의 놀이터에는 페인트칠한 철근과 플라스틱들이 가득차 있다.

어린이·시민들과 함께 만드는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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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놀고 간 흔적들. ⓒ 서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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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부르크시 놀이터에서 아이가 그네를 타고 있다. ⓒ 서형원


자연친화적 놀이터는 크리스티나 같은 공무원이 만드는 놀이터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재료보다 더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 점이다.

프라이부르크 시는 한정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2009년부터 3년마다 놀이터 전부를 조사하고 있었다. 놀이터는 4가지로 분류가 된다. ▲ 첫째, 상태가 좋아서 그냥 두어도 되는 놀이터 ▲ 둘째, 일부 개조가 필요한 놀이터 ▲ 셋째, 완전한 개조가 필요한 놀이터 ▲넷째 최악의 놀이터로 분류된다.

그리고 개선할 놀이터가 선정되면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일이 진행된다. 이런 단계를 통해 행정을 주민과 일하는 하나의 전형으로 삼을 수 있다. 사실은 행정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는 의사결정의 촉진가(facilitator)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기본 단계라고 보아도 된다.

1단계- 알림과 의견 모으기

보수공사를 시작할 때 언제, 어디서 만나 의견을 모은다고 주민들에게 먼저 알린다. 직접 찾아가 말하고, 신문에 내고, 포스터를 붙인다. 어린이들도 읽을 수 있도록 한다. 놀이터 개조를 위한 의견수렴이 시작되는 것이다.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고 그렇지 않은지, 적거나 그림을 그려 가져오길 부탁한다. 많이 참여하고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오길 환영한다. 모임은 놀이터에서 열리는데, 비가 오면 옮길 레스토랑도 안내되어 있다. 물론 이날은 설계자도 직접 참여한다. 놀이터에서 열린 모임에는 음료수와 간식도 준비되었다.

2단계-설계안 소개와 토론

역시 포스터 등으로 미리 알리며, 놀이터에서 열린다. 놀이터 보수를 담당하는 업체의 전문가가 참여해서 어린이와 주민들에게 설계안과 그 다음의 과정을 설명한다. 어린이와 부모들은 우리가 낸 의견이 얼마나 충실하게 반영됐는지, 이런 의견들이 모여 멋진 놀이터가 될 것인지 확인한다. 불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다시 의견을 내고 설계를 수정하는 기회도 된다.

3단계- 함께 만들기

놀이터를 만드는 날, 어린이와 학부모들도 함께 참여한다. "함께 만들 어린이와 부모들은 모이세요!" 하는 포스터가 동네에 붙는다. 좋아하는 돌, 휴가 때 해변에서 가져온 조개, 물뿌리개, 삽 등 놀이터를 꾸미고 조성하는 데 필요한 걸 가지고 오도록 한다. 어린이들은 가져온 돌과 조개 등으로 놀이터를 꾸미고, 어른들은 나무를 심는다. 물론 사고 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전문가 두 명이 참여해 작업을 관리한다. 일을 했다고 보상을 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 자기 몸으로 작은 것 하나라도 같이 만들면 놀이터의 의미는 달라진다.

4단계-완공 행사

놀이터가 완성되면, 이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과 주민들이 함께 축하한다. 완공식은 동네 잔치 같다. 시장이나 유명인이 와서 자연친화 놀이터의 완공을 축하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놀이터를 관리하는 것은 프라이부르크시의 책임이지만 주민들도 참여한다. 비가 올 때 필요한 파라솔이나 장난감을 큰 통에 넣어두고 주민들에게 열쇠를 맡겨 직접 관리하고 꺼내 쓰도록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주민들은 놀이터의 기능에 대해, 어떤 놀이터가 좋은 놀이터인지에 대해 배울 기회도 갖는다.

우리나라에는 이렇게 만들어진 놀이터가 얼마나 될까? 우리 동네 놀이터의 모습은 어떤가?

우리 동네 놀이터부터 바꿔보자

놀이터가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이라면, 어린이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 맞다. 어린이들이 원하는 것은 미끄럼틀 한 번, 그네 한 번 타고 가는 식으로 계획된 놀이터가 아니다. 자기 뜻대로 창의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놀이터는 중요한 동네 공간이다. 여기에서는 어린이들과 부모들의 사귐이 이뤄진다. 공터가 점점 없어지는 현실에서 위험 없는 만남의 장소가 된다.

크리스티나의 얘기를 들으면서 생태도시로 알려진 프라이부르크시의 비결을 살짝 엿본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업무 방식이 이상한가? 특출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놀이터를 만들 때 어린이들, 그리고 주민들의 의견을 들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부터 이런 변화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상식적인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이고, 모델이 되며, 주민을 자치의 주인으로 만드는 일이니까. 프라이부르크의 놀이터를 보고 오니 주차장과 조경수가 차지한 우리 시청 앞마당부터 개방, 만남, 소통이 살아 숨 쉬는 모든 주민의 놀이터로 바꾸고 싶어졌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과천시의회 의원입니다.
#풀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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