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배축제장, 군 장병들이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신광태
화천에는 2만5천 명의 주민이 산다. 그런데 군 병력이 무려 3만5천 명에 이른다. 특이하게 화천은 군인이 주민들보다 많다는 게 흥미롭다. 화천에 위치한 3개 사단에서 연간 배출(제대)되는 인원만 1만5천여 명에 이른다.
이에 군(郡)에서는 제대군인에 대한 활용방안에 착수했다. '군 장병 화천 보여주기' 및 '축제 무료참여'가 그 일환이다. 과거 (군 생활을 했던) 화천 방향으로 소변도 보지 않겠다는 제대군인을 대상으로 인정이 넘치는 마을로 인식하게 만들자는 거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들이 홍보맨이 되지 않겠느냐는 거다.
왜 군인들이 환영받지 못했을까1982년, 고향이 화천인 나는 집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7사단으로 배치됐다. '집이 가깝기 때문에 편했을 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집에 가려면 검문소를 3곳이나 거쳐야 했기 때문에 (집에 가지 못하는 것은) 멀리 남쪽이 고향인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촌놈이란 이유로 '산 더덕 캐기', '화목 구해오기' 등의 잡다한 일만 맡았다.
주특기가 포병이었던 나는 포병전술훈련에 참여하게 됐다. 화천읍내를 지나간 곳이다. 내가 소속된 부대는 민통선 안이라 입대 후 4개월 동안 민간인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기에 읍내를 통과한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105미리 포를 견인한 차 위에서 철모도 고쳐 쓰고 폼나게 사주경계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읍내를 지나가는 주민들은 아무도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손이라도 흔들어줄 만도 한데,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에이 군바리 새끼들 때문에 시끄러 죽겠어."읍내를 거의 빠져나왔을 즈음 초등학생 한 무리가 지나가면서 우리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팔뚝질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주민들에게 내 멋진(?)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고 기대에 부풀었던 것이 한순간에 비참함으로 변했다.
장병들이 왜 지역주민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할까. 이유는 이렇다. 70년대. 군부대 보급품이 풍족하지 못하던 시절. 군인들이 민가에 들어가 밥을 훔쳐 먹기도 하고 감자나 옥수수 등을 주인 허락도 없이 가져가는 일이 빈번했다. 심지어 낫이나 톱, 도끼도 가져갔다. 닭을 잃어버렸다는 사람도 있었고, 개가 없어졌다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군인들을 의심했다. 그러니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엄마, 저기 군인하고 사람하고 싸워요."어느 군인과 주민의 다툼을 보던 어린 꼬마 아이가 한 말이다. 부모들이 군인들을 경시하는 것을 보고 아이도 그렇게 배운 모양이다. '군바리'라는 비속어도 이 시기에 나왔던 것 같다.
"군인들이 무슨 죄가 있나, 정치권 제도가 문제지."당시 열악한 국방예산은 군인들이 지역주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 장병들은 불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