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나면 쏜다"... 순희는 철교에서 뛰어내렸다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65) #17. 골로 가다 ④

등록 2013.10.18 11:16수정 2013.10.18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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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중부전선 어느 산아래에 중국군 시신들을 모아 둔 곳(1951. 5. 17.)

중부전선 어느 산아래에 중국군 시신들을 모아 둔 곳(1951. 5. 17.) ⓒ NARA, 눈빛출판사


권총

헌병대장 조철만 대위는 순희가 방안에 들어온 줄도 모른 채 야전침대에 쓰러져 코를 드렁드렁 골았다. 순희는 헌병대장의 발을 건드려 보았다. 그래도 그는 세상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순희는 먼저 책상 위에 풀어놓은 헌병대장 조 대위의 권총집에서 권총을 잽싸게 뺐다. 순희는 임은동 야전병원 시절 문명철 병원장의 권총으로 몇 차례 사격 연습을 한 적이 있었다. 권총 종류는 소련제와 미제로 달랐지만 구조나 격발 장치는 비슷했다. 순희가 먼저 약실의 총알을 검사하자 아직도 네 발이나 남아 있었다. 순희는 권총을 자기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젠 네 차례야. 이렇게도 복수의 시간이 빨리 오다니….' 

다음은 자신을 묶었던 포승줄을 들고 간이 침대로 가서 헌병대장의 발목을 묶었다. 순희는 그 순간 여차하면 권총을 뽑을 자세를 취했다. 제 놈이 그동안 권총의 힘을 빌려 나에게 큰소리치고, 가슴을 더듬고, 뺨을 때렸을테지. 이제 잠에서 깨어난데도 권총이 없는 빈손으로 권총을 가진 나에게 큰소리치거나 어찌 감히 손찌검을 하겠는가. 순희는 그 포승줄로 다시 조 대위의 손을 묶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코를 드렁드렁 골았다.

순희는 권총을 뽑아들고 총구로 조 대위의 가슴을 찔렀다. 그래도 그는 잠에서 깨지 않고 오히려 이까지 뽀득뽀득 갈며 코를 골았다. 순희는 방문을 열고 건너편 당번병 방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 방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아마도 당번병은 총소리가 나도 근접치 말라는 대장의 명령에 순종하며, 자기가 먹지 않은 백숙과 대장이 남긴 주전자의 술을 들고는 단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헌병대장의 이런 고약한 일들이 잦은 지라, 그는 관심도 접고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역전


순희는 권총을 주머니에 넣은 채 우물가로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린 뒤 세수 대야에 가득 담아 방으로 돌아온 뒤 헌병 대장 얼굴에 끼얹었다. 그제야 헌병대장 조 대위는 눈을 치켜뜨고는 깜짝 놀랐다.

"야, 내가 누군지 알겠어?"
"최 … 순… 희…"
"이제 정신이 드나?"


헌병대장은 눈을 부릅뜨고 덤빌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손과 발을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포승줄에 묶인 채 꼼짝하지 못했다. 그는 큰 소리를 지르려고 목을 쳐들었다. 순희는 권총 총구를 헌병대장 가슴에다 겨누고 말했다.

"너 여기서 고함을 치면 당장 이 방아쇠를 당길 거야!"

그 말에 헌병대장은 얼굴빛이 금새 사색이 되어 부들부들 떨면서 말없이 묶인 손을 흔들었다. 아마도 잘못을 빈 듯했다.

"야, 조철만!"
"……."

순희의 손가락이 방아쇠 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헌병대장 조철만이 부들부들 떨면서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뭘?"
"심문방법이…. 죽을 죄를 졌습니다."
"네 놈도 총구 앞에서는 별 수가 없군. 네가 헌병대장인가?"
"… 네."
"헌병 임무는 무엇인가?"
"…군기 확립과 …군 범죄 예방과 …그리고 대민 봉사와…."
"그래, 넌 그 가운데 하나라도 제대로 실천했나?"
"……."

조 대위는 몹시 분하다는 듯 눈알을 부라리며 더욱 몸부림을 쳤다.

"너, 내가 권총을 쏠 줄 모르는 모양이라고 나대는거지. 난 권총을 여러 번 사격해 본 적이 있어. 네 입으로 총소리가 나도 네 당번병에게 근접치 말라고 했으니까, 아주 내가 안심하고 너에게 이 권총을 쏘겠어."
"제발, … 목숨만 …  살려 … 주십시오."

a  주민들이 학살된 시신을 발굴하고 있다(전주, 1950. 9. 29.).

주민들이 학살된 시신을 발굴하고 있다(전주, 1950. 9. 29.). ⓒ NARA, 눈빛출판사


헌병대장

그 순간 헌병대장 조 대위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순희는 권총으로 조 대위를 겨누다가 벽에 걸린 거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거울 깨치는 소리가 '쨍그렁' 났다. 그 소리에 헌병대장 조 대위는 더욱 부들부들 떨며 포승줄에 묶인 두 손을 흔들며 살려달라고 더욱 애원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거짓이 있으면 이 권총으로 내 심장을 쏘겠다. 너 언제부터 헌병이 되었나?"
"…어릴 때 일본 헌병들이 가장 끗발이 좋아보였습니다. 그 시절 가장 무서웠던 일본 순사조차도 일본군 헌병 앞에서 슬슬 기는 걸 보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헌병이 되고자 지원하였으나 조선사람은 받아주지 않아 대신 헌병보조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 우리 지방의 한 비적 일당 숨은 곳을 밀고하여 큰 공을 세우자 그제야 헌병으로 특채해 주더군요."
"그 비적은 일본의 개들을 처단하는 독립군들이 아닌가?"
"그땐 그런 분들을 비적이라 불렀습니다."
"넌 아직도 그 시절을 살고 있군."
"사람의 생각이란 한번 굳어지면 잘 바뀌지 않는 탓일 겁니다. 해방 후 지난 전과를 뉘우치며 새 사람이 되려고 했는데, 해방 분위기도 잠시뿐이고, 오히려 먼저 군에 입대한 옛 동료들이 저를 불러들이더군요."
"그래, 너는 헌병이 된 이래 밤낮 이 권총을 휘두르며 힘없는 백성들이나 부녀자들에게 공갈치며 금품을 갈취하거나 겁탈했지."
"……."
"아주 일본놈들에게 못된 짓만 배웠군. 늘권총을 휘두르며 기고만장하다가 이제 나한테 당한 네 기분이 어때?"
"… 죽을죄를 졌습니다. … 한 번만 봐주십시오."
"너, 나한테 빼앗은 금가락지 돌려 줘."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으니 가져가십시오."
"알았어."

순희는 헌병대장의 책상서랍을 열었다. 책상서랍에는 현금과 금반지, 금목걸이 등, 보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너 이 서랍의 돈과 보석은 누구 것이냐?"
"……."
"야! 너,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위협발사

순희는 권총 총구로 조 대위의 가슴을 겨누었다.

"피난민들이나 범법자들의 것을 압수해 보관하고 있는 겁니다."
"뭐, 피난민들의 것도 압수해?"
"…네."
"그럼, 압수물을 그들에게 돌려준 적이 있나?"
"……."
"좋아, 내 말이 말 같이 않다는 게지. 이 쌍노무 새끼!"

순희는 다시 권총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겼다. 총알이 헌병대장 머리 위를 '휙' 지나 벽에 박혔다. 헌병 대장이 기겁을 하며 침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직 두 발이 더 남았어. 서툴면 언제든지 네 심장을 꿰뚫을 거야."
"잘못했습니다."
"무얼?"
"동족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뭐 '한 것 같습니다'고. 넌 아직도 네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지 않고 있어."

순희가 권총을 쏠 듯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넣고 다시 조 대위의 심장을 겨누었다.

"많이 했습니다."
"역시 네 놈도 총구 앞에서는 별 수 없군."
"제발 살려만 주신다면…."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전쟁은 이길 수 없어. 헌병대장이란 자가 피난민의 재물을 뺏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이러고도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며,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나?"

헌병대장 조철만 대위는 부들부들 떨었다.

"너,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
"나는 한때 인민군 3사단 간호전사였지."

신사협정

헌병대장은 그 말에 더욱 새파랗게 지렸다. 그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장래 간호사가 꿈이었던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어, 그런데 전쟁이 터지자 대통령을 비롯한 고관들은 다 서울을 버린 채 도망가고,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은 학교에 등교하자 붉은 완장을 두른 이들이 적십자 정신으로 부상병 치료라는 말에 선뜻 의용군에 지원 입대했지."
"……."
"근데 유학산 다부동전투 현장에서 우박처럼 쏟아지는 포탄과 폭탄을 보고 살고자 도망친 거야. 너희 헌병들은 검문소를 지키면서 친절히 피난민들을 보호하거나 우리 같은 도망병을 바로 인도해 줘야 하는 것이 당연한 임무가 아닌가. 그런데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여 오히려 재물을 빼앗거나 부녀자를 겁탈하고…."
"잘못했습니다. 그저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바로 살도록 하겠습니다."
"너, 약속할 수 있지?"
"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한 가지 더 일러준다. 너 여자를 무시하가나 한낱 노리개 감으로 대하지 말라. 장개석 군대가 왜 모택동 군대에게 진 줄 알아?"
"……."
"패전 요인 중 하나는 장개석 군대는 여성을 위안부로 썼고, 반면에 모택동 군대는 여성도 당당한 전사로 쓴 때문이야. 장개석 군대는 부대이동 때도 위안부를 데리고 다녔으니까. 아마 일본군도 그랬지."
"……."
"네 서랍에서 우리 어머니가 준 금가락지는 내가 가지고 간다."
"거기 있는 돈과 다른 보석도 다 가져가십시오."
"뭐, 너는 나를 총 든 강도로 본 모양인데, 내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너한테 신사협정이 이루어질지 모르겠다만 내가 이곳을 탈출할 때까지 추적치 않기를 바란다."
"살려만 주신다면…."
"너 같은 놈이 이 다음 이 나라에서 권력을 잡는다면 네 집무실에다 얼굴 반반한 여자들은 불러들여 그야말로 주지육림 속에서 허우적거리겠어. 이 전쟁터에서 피난민에게도 이 행패를 부리는데, 돈과 금력, 권력을 쥐면 넌 무슨 짓인들 못하겠니. 정말 이 자리서 너를 죽여야 마땅하지만 내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 나는 이 길로 간다."
"안녕히 가십시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순희는 권총을 제자리에 꽂아둔 채 방을 슬그머니 나왔다.

a  경부선 금강철교(2013. 7. 30.).

경부선 금강철교(2013. 7. 30.). ⓒ 박도


금강철교

순희가 헌병대장 숙소를 나오자 보름을 지난 하현달이 중천에 걸려 있었다. 아마도 새벽 무렵인 듯 했다. 순희는 금강 현도교 나루터로 가려다가 다시 헌병들에게 붙잡힐 것 같아 거기서 왼편으로 조금 떨어진 경부선 금강 철교로 달려갔다.

순희가 BOQ(장교독신숙소)를 떠나자 헌병대장은 고함을 질렀다.

"야, 당번병! 당번병!"

그래도 대답이 없자 헌병대장은 몸을 굴러 문으로 간 뒤 머리로 방문을 받았다.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에 그제야 건너편 방에서 당번병이 달려왔다.

"야 새끼야. 내가 이 꼴을 당하는 것도 모른 채…."

당번병이 후다닥 달겨들어 손과 발의 포승줄을 풀었다.

"야, 초소로 비상전화을 해서 비상을 걸어. 그 쌍년이 아주 악질 빨갱이년이었어."
"네, 알겠습니다."

당번병이 책상 위의 EE8 군용 비상전화를 돌렸다.

"야, 대장님의 명령이다. 비상! 대장님의 신문을 받던 최순희 그년이 탈출했다. 빨리 추적하라! 상황병을 제외하고 전원 출동하라!"
"잘 알았다. 전 병력 즉각 출동하겠다."

순희가 막 금강철교에 이르렀을 때 헌병 초소 쪽에서 헌병 1개 분대가 앞에 총 자세로 집총하고는 자기 쪽으로 달려왔다.

"정지! 최순희! 더 이상 달아나면 쏜다."

순희는 조 대위를 권총으로 처치하였거나, 최소한 그의 입을 틀어막고 나오지 못한 게 천려일실로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순희가 그대로 재빨리 북쪽으로 달아나자 헌병들은 총을 쏘면서 철교로 추적해 왔다. 순희는 보따리에서 무거운 양식은 그곳에 죄다 버리고 남은 옷보따리만 들쳐 멨다. 순희는 총알이 날아오는 가운데 신탄진 철교로 내달았다. 다행히 짙은 어둠으로 총알이 빗나갔다. 헌병들은 어둠으로 조준사격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금강철교 어귀에는 서까래가 가로로 차단하고 있었지만 순희는 그 밑으로 빠져나온 뒤 계속 철도 침목을 밟으며 금강철교를 뛰며 건너갔다.

순희가 금강 철교 중간쯤에 다다르자 갑자기 철교가 뚝 끊어졌다. 지난 7월 15일 밤 유엔군은 인민군의 남침을 저지하고자 금강 철교를 폭파했기 때문이다. 금강 철교 아래에는 시꺼먼 강물로 순희는 그 순간 아찔했다. 그런데 저 멀리 어둠 뒤에서 헌병 초병 1개 분대가 총을 쏘면서 순희 쪽으로 뛰어오고 있지 않는가. 순희는 어차피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어깨에 멘 보따리를 가슴으로 돌려 안고서 눈을 질끈 감고 철교에서 뛰어내렸다.

곧 뒤따르던 헌병들이 끊어진 철교 위에서 강으로 떨어진 순희를 향해 카빈총을 난사했다. 하지만 순희가 강물 속으로 사라지자 그들은 순희가 총을 맞고 물에 가라앉은 줄 알고 돌아갔다.

순희는 보따리를 앞으로 내밀고 발버둥을 쳤다. 보따리에 든 광목 홑이불 탓인지 잠시 후 순희는 물 위로 떴다. 순기는 그 보따리를 웃기로 삼아 발을 놀렸다. 조금 뒤 순희가 발을 내리자 강바닥에 닿았다. 마침내 순희는 금강을 건넜다. 순희는 계속 그 길로 북상했다.

a  오늘의 경부선 금강철교(신탄진, 2013. 7. 30.).

오늘의 경부선 금강철교(신탄진, 2013. 7. 30.). ⓒ 박도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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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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