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미국생활에 행운을 빕니다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79) #21. 아메리칸 드림(2) ②

등록 2013.11.09 10:36수정 2013.11.09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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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육원 원생들이 해외로 입양되어 떠나기 직전 고국에서 마지막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서울, 1956. 4. 3.). ⓒ NARA, 눈빛출판사


3차 인터뷰

준기는 그 이튿날부터 다시 비자인터뷰 준비를 했다. 준기는 영어학원의 미국인 강사 조이(Joy)를 사귄 뒤 그를 자주 초대하여 밥을 샀다. 주말에는 그에게 이곳저곳 관광이나 쇼핑 안내도 자청했다. 준기는 그를 안내하는 동안 더듬더듬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회화 실습을 했다. 그것이 준기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회화 공부 방법이었다.


준기는 근무시간 외 시간은 가능한 회화 테이프를 듣거나 단어장을 보며 단어를 외우고, 때로는 영화관에 가서 미국 영화를 보며 본토 원음을 익혔다. 준기는 부엌에도, 화장실에도, 거실에도 여기저기 영어 회화 문장을 너덜너덜 붙여두고 중얼중얼 외웠다. 정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공부했다. 준기가 그렇게 독한 마음으로 공부한 탓인지 조이를 사귄지 석 달이 지나자, 그조차도 눈을 둥그렇게 뜰 정도로 회화실력이 부쩍 늘었다.

준기는 미 대사관 3차 비자인터뷰 날 영사 앞에 섰다. 준기가 미국 이민을 준비한지 꼭 2년 6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은 준기에게 행운이 따르는지 영사의 인터뷰는 예상한 질문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준기는 영사가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했다. 곧 영사는 활짝 웃으며, 준기의 비자서류에 서명했다.

"Congratulations. Good luck to your life in America."
(축하합니다. 당신의 미국 생활에 행운을 빕니다.)
"Thank you."
(감사합니다.)

준기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인터뷰 장을 빠져 나왔다. 그러자 비자인터뷰 대기자들이 박수를 치면서 부러운 눈길로 준기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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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기념탑(2005. 12. 5.). ⓒ 박도


부녀 작별


준기는 그날로 대사관 길 건너 편 외무부로 가서 여권을 신청했다. 그러자 2주 만에 대한민국 여권이 나왔다. 준기는 미국 출국에 앞서 외가에 살고 있는 딸 영옥을 주말에 인천으로 불렀다.

그새 영옥은 구미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준기는 딸에게 아버지가 미국으로 취업이민을 간다는 이야기와 함께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런 뒤 준기는 미국이민 지참금 한도액 외 돈은 모두 딸 이름으로 입금한 뒤 통장과 도장을 건넸다. 영옥은 말없이 통장과 도장을 받고는 눈물만 주룩주룩 흘렸다.


"영옥아, 살아가면서 힘들 때면 언제든지 아바지한테 연락하라. 아바지가 미국에 가는 대로 편지할게."
"알겠어예."

영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준기는 속으로 울었다. 어쨌든 딸에게는 자기가 큰 죄를 지은 것이다. 준기는 이를 악물었다.

'내레 미국에서 성공하여 영옥의 앞길을 열어주는 게 속죄하는 길이야.'

그러면서 준기는 미국에서 정착하여 성공하면 꼭 딸을 불러들여 같이 살겠다고 다짐했다. 준기는 생전 처음 부녀 동행으로 딸에게 인천과 서울 구경을 시키며 백화점에서 옷을 한 벌 사입힌 뒤 서울역에서 열차로 외가에 돌려보냈다.

"아버지, 잘 가이소."
"아바지가 꼭 성공해서 너를 꼭 불러들일게."
"잘 알겠어예. 아버지 어짜든 동 외국에서 몸조심하이소."
"고맙다. 너두 건강해라."
"네."

1977년 8월 24일, 마침내 준기는 김포공항에서 미국 행 비행기에 올랐다. 순희가 한국을 다녀간 지 꼭 3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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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기념관(2005. 12. 5..). ⓒ 박도


워싱턴의 밤

워싱턴 용문옥에서 준기와 순희는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그새 또 날이 저물었다. 고동우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오늘도 <어떤 약속> 이야기가 끝나지 않겠습니다. 두 분 살아온 인생 드라마를 다 들으려면 다시 날을 잡아야겠습니다."

그러자 김준기도 시계를 보며 말했다.

"박 선생,  출국 날짜가 정확히 언제디요?"
"3월 10일 토요일 오후 1시 20분 덜레스 공항에서 이륙하는 비행깁니다."
"기럼, 내일 저녁에 한 번 더 만납세다."
"좋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대접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동안 준기 아저씨에게 세 차례나 접대를 받았다. 최소한 한번은 내가 접대하고 싶었다. 준기는 아내와 상의하더니 내 제의를 수락했다.

"좋아요. 기러면 내레 두 분이 일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카이브 앞으루 가디요."
"그러시죠."

최순희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어쩌죠. 전 내일 아침 일찍  뉴욕 본점으로 가야 해요. 세 분이 만나세요."
"부인의 흥미진진한 얘기를 더 듣지 못해 유감입니다."

내가 순희에게 아쉽다는 말을 했다.

"과찬입니다. 뉴욕 본점을 오래 비워둘 수가 없군요. 또 다른 약속도 있고요. 저의 나머지 얘기는 우리 영감님도 잘 아실 거예요."
"내레 집사람 네기도 아는 데까지는 하디요. 고 선생님은 우리 지배인한테 아카이브로 가는 길이나 잘 알쾌(가르쳐) 주시라요."
"네, 그러지요."

고동우는 영옥이에게 아카이브 위치를 메모지에 약도로 그려가며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런 뒤 나와 고동우는 김준기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용문옥을 떠났다. 워싱턴의 밤이 꽤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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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입양된 한국전쟁고아들이 디즈니랜드 나들이 중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1956.5. 18.).. ⓒ NARA, 눈빛출판사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은 제1부, 제2부 모두 98회 내외로 12월 중 대단원의 막을 내릴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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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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