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이 뭐라고, 애들 앞에서 눈물 펑펑

토요일 저녁, 평범하게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기쁨인 이유

등록 2013.10.04 09:30수정 2013.10.0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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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꽃차남을 '모시라'.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윗니 두 개가 부러져 입술과 턱을 열 바늘 넘게 꿰맨 꽃차남. 큰애가 육탄전을 접고 동생을 '모시고' 놀고 있다.

꽃차남을 '모시라'.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윗니 두 개가 부러져 입술과 턱을 열 바늘 넘게 꿰맨 꽃차남. 큰애가 육탄전을 접고 동생을 '모시고' 놀고 있다. ⓒ 배지영


그날 아침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남편은 자고 있었다. 큰애는 소파에 기대어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보고 있었다. 평일에는 텔레비전을 켤 수 없다는 걸 아는 '꽃차남(둘째 아들)'도 일찌감치 일어나 만화를 틀어달라고 졸랐다. 나는 사과를 깎아서 아이들한테 대령해 주고는 전날 읽다만 책을 읽었다.


꽃차남은 1시간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은 채 만화영화를 보았다. '아, 이쯤에서 태클이 들어가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장실에 씻으러 들어가면서 큰애에게 "지금 보는 만화 끝나면 꽃차남도 텔레비전 끄게 하고 너도 스마트폰 그만 해"라고 말했다. 얼마 있다가 꽃차남의 울분에 찬 통곡소리가 샤워 물줄기를 뚫고 들려왔다.

남편이 텔레비전을 들고 나가버렸다

집안의 평화를 짓이기는 꽃차남의 울음소리에 남편이 깼다. 기분이 상쾌할 리 없지만 그는 부엌으로 가서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쌀을 씻어 안치고, 카레를 하고, 생선을 구웠다. 밥상이 다 차려졌는데도, 꽃차남의 징징대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동생 때문에 짜증이 난 큰애는 꽃차남을 사정없이 쥐어 패고 있었다.

나는 "왜 동생한테 아량을 못 베풀어? 때리면 달라져?"라고 하면서 큰애 등짝을 때렸다. 에고, 난장판이 된 거다. 그래도 남편은 침착하고 단정하게 수저까지 놓았다. 우리 셋은 식탁에 앉아서도 각자의 감정에만 충실했다. 아이 둘은 식탁 밑으로 다리를 뻗어 싸우고, 나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꽃차남 편에 섰다. 남편이 말했다.

"밥 먹지 말고, 각자 방으로 가!"


우리 셋은 순순히 숟가락을 놓고서 일어섰다. 나는 내 공부방으로, 큰애도 자기 방으로. 그런데 꽃차남이 울면서 말했다.

"나는, 내 방이 없잖아요."
"그럼, 안방으로 가."


식구 넷이 떨어져 있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야 하는 순간, 청아한 소리가 들렸다. 꽃차남은 밥그릇을 들고서 방으로 간 모양. 혼자 수저질해서 밥 먹는 소리가 아름다웠다. 기분이 풀렸다. 남편도 그런지 '모두 나와서 밥 먹으라'고 했다. 우리는 씨익 웃으면서 식탁에 둘러앉았다. 남편은 생선살을 발라서 처자식의 카레 밥 위에 올려주었다.

남편은 늘 그렇듯이, 성당 미사에 갔다 와서 집안 청소를 했다. 아이들과 나는 아침에 한 '짓'이 켕겨서 몹시 사랑스럽게 행동했다. 청소하기 쉽게 물건들을 모두 제자리에 놓았다. 우리 셋이서 "덕분에 청소 빨리 끝나서 좋지?"라고 말하면 남편이 웃겠지. 그런데 청소를 끝낸 남편은 커다란 텔레비전을 들고 나가버렸다.

a 텔레비전 없는 자리 남편은 텔레비전을 치우고, 분갈이 하려고 사온 철쭉 화분을 임시로 올려놓았다.

텔레비전 없는 자리 남편은 텔레비전을 치우고, 분갈이 하려고 사온 철쭉 화분을 임시로 올려놓았다. ⓒ 배지영


애들 핑계로 텔레비전 유선을 뽑은 건 두 번. 운 좋게도 MBC 장기 파업과 맞물렸다. <무한도전>만 보는 나는 몇 달 동안 못 봐도 불만 없었다. 그래도 노조 계좌에 성금을 보냈다. 인터넷 커뮤니티 '82쿡 닷컴'에서 MBC 노조 힘내라고 삼계탕을 대접할 때는 자매 지현, 친구 최박사와 함께 삼계탕 스무 그릇 값을 보냈다. 오로지 <무한도전>을 보기 위해서.

신의 계시였다. 방송사의 긴 파업이 끝났을 때 친정 엄마가 꽃차남을 보러 왔다. 밤이 되자 당신은 드라마를 꼭 봐야 한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텔레비전을 켜게 됐다. 그토록 오랜 시간 텔레비전을 못 봤지만 나는 타격 받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이 텔레비전을 아예 치웠을 때도 가장 괴로울 사람은 우리가 잠든 밤에 텔레비전을 보는 남편일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고통은 나한테만 왔다. 남편은 텔레비전을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다. 큰애는 이미 텔레비전보다는 컴퓨터 게임을, 친구들과 가는 PC방을 좋아한다. 나만 토요일마다 우울했다. <무한도전> 할 시간에 집에서 가만히 보내는 건 힘들었다. 약속이 없어도 꽃차남과 하릴없이 돌아다녔다. 남편은 나보고 "처제네 집(걸어서 3분 거리)에 가서 봐"라고 했다.

<무한도전> 없이 보낸 3개월, 그리고 뜻밖의 소식

a 꽃차남과 친구 시후님 텔레비전이 사라진 자리에 아이들이 올라앉아 있다. 둘은 재밌어 보이는데 내 속은 쓰렸다.

꽃차남과 친구 시후님 텔레비전이 사라진 자리에 아이들이 올라앉아 있다. 둘은 재밌어 보이는데 내 속은 쓰렸다. ⓒ 배지영


a 꽃차남과 친구 시후님 텔레비전 치운 자리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꽃차남과 친구 시후님 텔레비전 치운 자리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 배지영


나 어릴 때, 동네를 통틀어 우리 집에만 텔레비전이 있었다. 동네 애들은 저녁이면 우리 집에 몰려와서 김일 레슬링이나 <타잔>을 봤다. 숨죽인 채. 나도 그렇게 보는 게 굉장히 재밌을 줄 알았다. 그런데 동생 지현과 아무리 '절친'이어도, <무한도전>만큼은 우리 집에서 보는 게 좋았다. 아무 때나 괴성을 지르면서, 순도 100%로 몰입해서 봐야 한다는 걸 알기에.

'그래도 언젠가는 남편이 텔레비전을 갖고 오겠지'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견딘 세 달. 나는 남편의 새 사무실에서 우리 집 텔레비전(꽃차남이 유리 구슬을 던져서 미세한 '땜빵'이 스무 방쯤 있음)을 만났다. 1년 약정으로 스카이 라이프까지 달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다. 텔레비전은 확실히 '루비콘 강'을 건너 저 너머에 있었다.

내가 <무한도전>에 등 돌린 적은 딱 한 번, 꽃차남 임신했을 때다. 뱃속 아기는 7개월도 안 됐는데 밖으로 나오려고만 했다. 주사바늘을 꽂고 두 달간 누워 있었다. 주말마다 간병 온 엄마가 "오메, 내 딸 좋아하는 거 하네이"하며 <무한도전>을 켜 주었다. 그네들이 웃겨도, 나는 슬펐다. 집에서 <무한도전>을 보던 토요일이, 평범한 생활들이, 다시 안 올 것 같았다.

한 때는 우리 식구 모두는 <무한도전>을 보는 동지였다. 외출했다가도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적이 많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주말에 일이 많은 남편이 먼저 이탈했다. '그거 볼 시간이면 컴퓨터 게임하는 게 더 낫다'는 큰애의 배신도 겪었다. 그래도 나는 혼자 꿋꿋했다. 그런데 이제 텔레비전이 없어서 '본방사수'를 못하겠지. 배반해야 하는 마음이 쓰라렸다.

남편이 미안해 하면서 실시간으로 <무한도전>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알아왔다. 인터넷으로 볼 수 있도록 노트북에 세팅까지 해 주었다. 작은 화면이지만, <무한도전> 본방을 본다는 기대감으로 설렜다. 그런데 접속하는 사람이 많아서일까? 안 나왔다. 소파에 앉은 내 몸이 저절로 옆으로 고꾸라졌다. <무한도전>이 뭐라고. 애들 앞에서 눈물이 펑펑 났다.

6월에는 <무한도전> 팀이 군산으로 촬영을 왔다. 친구 이미정은 그들이 어디서 촬영하는지 나한테 알려주면서 빨리 가보라고 했다. 나는 진짜 <무한도전> 멤버를 만나면, "엄마야!" 놀랍고 부끄러워서 쓰러질 거다. 그들이 먹고 간 음식점들은 한동안 붐비고 생기가 돌았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에 남편은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배지영, 텔레비전 샀어. 옛날 거 보다 훨씬 커. 스마트 TV야."
"텔레비전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는데..."
"안 좋아?"
"응, 별로. 집도 좁고." 

나는 심드렁했다. 우리 부부는 십수 년 전에 결혼했지만 통장은 '미혼 상태', 비싼 물건을 집에 들이는 사람이 적당히 앓는 소리를 하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운다. 나머지 한 사람은 한동안 칭송한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3개월 동안 <무한도전> 못 본 설움이 앞섰다. 남편 찬양이 나오지 않았다. 그 날 저녁, 실물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무한도전>을 보고서야 헤헤거렸다.

a 윗니 두 개 뺀 꽃차남 웃고 있는 꽃차남.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한다.

윗니 두 개 뺀 꽃차남 웃고 있는 꽃차남.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한다. ⓒ 배지영


삶은 계속되고, 해피엔딩은 없다. 지난 9월 30일, 꽃차남이 집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빨 두 대가 부러져 수술해서 뽑아내고(다행히도 유치), 입술과 턱도 열 바늘 넘게 꿰맸다. 그 과정을 지켜본 동생 지현은 다섯 살 조카가 참아내는 게 기특해서 위인전을 쓸 기세였다. 남편은 나와 큰애에게 당분간 꽃차남을 '잘 모시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병원에서 나온 꽃차남은 바로 특권을 남용했다. 이모부와 아빠에게 장난감(어린이날, 생일, 크리스마스에도 안 사줌)을 헌납 받고, 유치원 쉬는 김에 텔레비전을 실컷 봤다. 회복도 빨랐다. 꽃차남과 뽀뽀하면 입술을 꿰맨 실밥 때문에 따끔거리지만 밥도 잘 먹는다. 그래서 고맙다. 이번 토요일도 <무한도전>을 볼 수 있다. 

a 꽃차남 생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에도 받지 않는 장난감이 앞니 두 개 빼고 나니까 생기네...^^

꽃차남 생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에도 받지 않는 장난감이 앞니 두 개 빼고 나니까 생기네...^^ ⓒ 배지영


#무한도전 #텔레비전 없이 살기 #꽃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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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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