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좋은 책은 '부작용'이 크다

[서평] 집과 이야기를 짓는 건축가 전연재의 <집을, 여행하다>

등록 2013.11.03 09:44수정 2013.11.0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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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왜 좋을까? 책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좋은 점이 하나둘일까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갈 수 없는 곳을 데려다주고, 볼 수 없는 풍경을 보여주며,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데 있지 않을까. 아무 계산도 하지 않고, 아무 욕심도 없이 책이 보여주는 그 많은 장면들은 얼마나 고마운가.

건축가 전연재의 <집을, 여행하다> 낯선 이의 집에서 먹고, 자고, 놀고, 춤추며 그들 삶의 청자가 되고 가족이 되는 아주 특별한 여행의 기록
건축가 전연재의 <집을, 여행하다>낯선 이의 집에서 먹고, 자고, 놀고, 춤추며 그들 삶의 청자가 되고 가족이 되는 아주 특별한 여행의 기록리더스북

집과 이야기를 짓고, 길을 걷는다고 소개한 건축가 전연재가 쓴 <집을, 여행하다>도 내가 갈 수 없었던 곳을,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을, 보지 못했던 집과 풍경을, 들을 수 없었던 소중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게 하는 아름다운 책이다. 제목에서 '집을' 다음에 콤마(,)가 있는 걸 보면, 전연재의 여행은 견문이 아니라 다분히 휴지와 휴식의 의미를 띠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 제목처럼 안온한 분위기를 느낀다.


부산이 고향인 전연재는 이탈리아 소도시 페루자에서 일 년 간의 상주 여행을 떠나 거기서 연극을 하고 사진전을 여는 등의 활동을 하며 다양한 사람과 문화를 만났으며, 그 뒤에도 이탈리아 정부 장학생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유럽과 아프리카를 걸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녀가 걷고 다니면서 몸과 마음을 기대며 거쳐 갔던 수많은 친구들의 집을 소개한 책이다.

친구의 집이 내 집이 되는 풍요로움과 마음의 안식

책 속엔 집과 그 집을 사는 사람과, 그 사람이 간직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저자 덕분에 우리는 서재에서, 침실에서, 도서관에서, 길거리 벤치에서,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북부 연안의 항구도시 카타니아도 가고, 남부의 시라쿠사와 화산섬 파나레아를 더듬고, 토스카나의 태양도 즐길 수 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과 체코의 수도 프라하,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빈, 벨기에의 브뤼셀, 네덜란드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 덴마크의 코펜하겐, 독일 함부르크를 따뜻하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이국적인 나라와 도시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것이 이 책이 다른 여행 책들과 다른 이유이다. 그녀는 건축을 전공하면서도 어린 시절 좋은 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단칸방과 오랜 전셋집의 기억이 있고, 중학교 시절 도시 외곽에 분양받은 14층 아파트, 그리고 스무 살 이후에는 4인실 기숙사와 반지하의 자취방을 회상하였는데, 도리어 그녀가 살아온 풍요로운 공간은 길 위에 있었다고 고백한다.

여행과 유학을 거듭하는 동안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친구들은 저자에게 기꺼이 지상의 방 한 칸을 내어주었고, 길 위에서 만난 낯선 타인일지라도 자신들의 문을 열고 저자를 가족으로 품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의 집이, 또 그 친구의 집이 내 집이 되는 경지를 통해, 저자는 마침내 당신의 집이 내 집이 되고, 내 집이 당신의 집이 되길, 그래서 우리 모두가 80억 개의 집을 가지길 기원한다.


이 책은 저자가 만난 집주인들의 성향, 그리고 인연의 폭을 감안하여 총 13개의 주제들도 구성되어 있다. 놀이, 소유, 예술, 휴식, 가족, 꿈, 선택, 자유, 고독, 나눔, 일, 사랑, 자연이 그것이다. 집이 자리 잡은 도시와 전원의 모습, 집 내부의 배치와 소품들, 그리고 분위기와 소통, 집주인의 삶과 인생관,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느끼는 저자의 소박한 깨달음들이 넉넉하다. 또한 그리 호들갑스럽지 않는 사진이 있고, 각 장을 시작할 때마다 집과 공간, 여행에 대한 사유를 품은 다양한 작가의 글을 먼저 만나게 한다.

집에 관한 정겨운 묘사들


직업이 건축가인 저자는 이 모든 구성들을 군더더기 없이 아주 깔끔하고 정감 있게 배치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랜만에 마음의 안식을 맛볼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이 책의 큰 미덕이다. 이는 집과 함께 이야기도 지을 수 있는 저자의 실력 때문이며, 걸으면서 더욱 풍성해짐과 동시에 걸으면서 더욱 단출해진 마음의 여백이 있기 때문이다.

시칠리아 섬 북쪽으로 25-40Km 정도 떨어진 에올리에 제도에 있는 일곱 개의 화산섬들 중 하나인 파나레아에서 저자가 열흘간의 휴식을 누리며 묘사한 데이비드의 집은 정겹다. 파나레아를 포함해 에올리에 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의 가치를 간직하고 있는데, 섬의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지어진 그리스풍의 흰 집들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주는 평화로운 풍경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지 않은가.

이 아름다운 곳에 있는 데이비드의 집은 4년 전 오래된 우물이 있는 땅을 사들여 집을 직접 설계하고 무려 3년 동안 인부들과 함께 차근차근 지어나간 집이라고 한다.

스튜디오 아파트 형식의 집 안 가운데에 거실 겸 침실 공간이 있었고, 바다가 내다보이는 아담한 주방이 왼편에, 그리고 널찍한 화장실이 그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거실에는 섬 고유의 하얀 회벽을 배경으로 정겨운 구식 난로 하나가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세심하게 고른 시칠리아 특유의 알록달록한 타일이 깔려 있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구석구석 잘 계획되어 좀처럼 좁게 느껴지지 않는 집이었다. 그런 느낌을 주는 데는 테라스도 한몫 했다. 사탕수수 지붕을 얽은 집 앞의 테라스에는 일광욕을 할 수 있는 와식 의자 두 개와 함께 큰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여기서 언제고 바다를 보며 식사할 수 있었다.이런 지중해성 기후의 땅에서 외부 공간은 종종 실내 공간처럼 쓰이곤 한다. 나는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이 테라스와 금세 사랑에 빠졌다.(본문 99-102쪽)

"사랑한다면 그들처럼"

저자가 만난 많은 사람들 중에 내 눈길을 끄는 사람은 시칠리아 섬 남부의 소도시 시라쿠사의 리암과 발렌티나였다. 3년 전 리암은 버려진 집을 빌려 오랜 동안 직접 수리하고 가꾸었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면 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고, 집이 지어진 순간이 아닌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긴 시간에 걸쳐 완성된다고.

리암은 미국인이고 발렌티나는 우크라이나인이다. 둘 다 이혼을 하고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은 모두 채식주의자이다. 하루에 두 끼 먹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요리도 가능한 가열하지 않는다.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쓰는 것이 이들의 생활철학이라 뜨거운 물도 쓰지 않고, 난방도 하지 않고 세탁기와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는 집에서 저자는 '소유'의 문제, 소박한 삶을 배운다.

부부는 해가 저물면 가벼운 산책을 하거나 식탁에 둘러 앉아 톨스토이를 읽는다고 한다. 작가의 부와 명성을 뒤로 하고 서민에게 돌아간 톨스토이의 문학과 삶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서 말이다. 톨스토이는 나중에 자전거 여행의 테마가 된다. 정든 시라쿠사의 집을 떠나 톨스토이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어떤 동력의 도움 없이 오직 자전거로만 3000Km를 달리는 기나긴 여정을 부부가 함께 결행한 것이다. 이 여행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톨스토이 철학에 대한 열정의 표현이자 평화로운 삶에 대한 실천이었다. 결코 많이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 최소한의 소유마저 버리고, 두 사람 사이의 신뢰와 삶의 철학에 의지해 그 긴 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 여정은 고된 동시에 또 얼마나 순결할 것인가.(…) 그러나 나는 안다. 그 길은 목적지에 도달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저어가는 도중에 이미 완성되어 있을 것임을. 그러므로 길을 떠난 순간, 그들은 이미 인생의 승자다.(본문 63-65쪽)

잘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난 친구의 집은 '선택'의 문제를 성찰하게 한다. 저자가 찾아간 곳은 이탈리아의 친구가 소개해준 집으로, 찾아가서 알고 보니 그곳은 반지하의 워크숍이었다. 거기서 만난 버나드는 빈에서 아주 유명한 피아노 장인이었는데, 마침 찾아간 시간이 점심식사 시간이어서 버나드는 직원들과 함께 식사하기 위한 요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식사를 반지하 워크숍 공간에서 하지 않고, 지상의 거리에다 식탁을 차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식탁은 그랜드 피아노 뚜껑이라니. 저자는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던 날 오후, 빈의 중심지 거리에서 행복한 식탁이 '연주'되었다고 말한다. 맛있는 음식과 수다와 웃음으로 어느새 낯선 사람들과 벗이 되고 가족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머물고 있는 집이 좁고 갑갑하다면 밖으로 나와 우리가 사는 집을 무한히 넓혀나가기를 권유한다.

그런데 버나드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이면서 피아니스트가 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자신은 피아노 만드는 것이 더 좋았다고 답한다. 저자는 그래서 피아노를 잘 치니까 피아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단순하고 편협한 논리임을 깨닫는다. 잘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좇아 경쟁하는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만의 소중한 보물을 찾아 부지런한 걸음을 걸을 때 다양성을 획득할 수 있고, 그 다양성 속에서 관용의 정신이 피어난다고.

그들은 느리지만 대신 여유롭다. 부유하지 않더라도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 않는 삶이다. 죽어라 내달리지 않아도, 그래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축적하지 않아도 그들은 느릿한 걸음의 속도에 숨어 있는 바람과 햇살이 주는 기쁨을 안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오래된 미래이기도 하다. 미래 사회의 가치는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영혼의 풍요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본문 37쪽)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나는 복이 많은 저자가 부러웠다. 져도 좋았다. 책을 읽으며 나도 유럽을 다녔으므로. 그리고 다정한 사람들 집에서 서로 마음을 맞추며 쉬고 왔으므로. 이 답답하고 혼탁한 세상, 탐욕스럽게 왜곡된 군상들이 득시글거리는 세상과 저자가 보여주는 진실한 사람들은 얼마나 다른가. 정말이지 <집을, 여행하다>를 읽으면 떠나고 싶다. 에잇, 이 지겹고 답답한 세상, 확 떠나버리자. 그래서 좋은 책은 언제나 부작용이 크다고 했나보다.
덧붙이는 글 <집을, 여행하다>, 전연재, 리더스북, 2013년 10월 18일, 1만 4천 원

집을. 여행하다 - 공간을 통해 삶을 읽는 사람 여행 책

전연재 지음,
리더스북, 2013


#집과 이야기 #이탈리아 #소박한 삶 #선택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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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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