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많이 한들 이렇게 살 수 있을랑가?

[섬진강변 두계마을 이야기] 가실과 두계인심

등록 2013.11.18 17:55수정 2013.11.1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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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집마다 가실하느라 바쁘다. 벼베기를 신호로 해서 나락 말리기, 말린 나락 정미소 보내기, 유통에 내기, 고추 말리기, 들깨 털기. 콩 타작하기, 감 따기….


a  마당에 가을이 널려있다.

마당에 가을이 널려있다. ⓒ 김영희


이 중에서 나에게 해당되는 것은 콩 타작이다. 벼는 물론 없고 들깨도 없고 감은 가을이 오기 전에 다 빠져버렸다. 콩 타작하려면 콩대를 베어서 단으로 묶어 우선 말린다. 잘 마르면 덕석이나 큰 비닐을 깔아놓고 그 위에서 막대기로 두들긴다. 막대기로 두들기면 콩이 털려 나온다. 이 콩과 부스러기들을 키로 까불어서 다시 좋은 콩만 추린다. 

이론상으로는 순서가 이렇게 되는데 중간에 비가 오거나 밤에 서리가 내리면 비닐로 덮었다 낮에 다시 열었다 하면서 말려야 한다. 난생 처음 콩을 심어 수확하게 된 나는 콩대를 묶을 줄 모르고 그만 산더미처럼 낱으로 쌓았다가 비가 오면 방으로 들였다가 다시 마당으로 냈다가 부피를 줄인답시고 콩대만 훓어냈다가 하면서 온갖 수선을 떨었다.

해가 쨍쨍할 때는 마당에 콩을 널어놓고 나도 남이 하는 것을 본대로 막대기로 터는 시늉을 하는데 '오 콩 두들기요?' 어쩌다 이웃이 와서 보고 한 마디 하면 제법 농사꾼이라도 된 양 기분이 그럴 듯했다.

a  콩 두들기기

콩 두들기기 ⓒ 김영희


콩은 냄새가 없는데 들깨는 향이 강하다. 들깨 향이 무럭무럭 올라와서 보면 연심이네나 석재네가 들깨를 털고 있다. 나는 얼른 내려가서 옆에서 앉아 구경하고 같이 터는 시늉을 한다. 실은 그 향이 좋아서다.

"일 배우요?"


전 이장댁이 웃고 지나간다.

"예 공부하고 있어요."


들깨를 수확하는 그들이 슬그머니 부러워진다.

"나도 내년에는 들깨도 심어야것네". 
"그래. 씨는 나중에 내가 줄게 심어."

연심이네가 선뜻 말한다.

a  들깨를 터는 연심이네

들깨를 터는 연심이네 ⓒ 김영희


농사거리가 없어 철이 없는 나를 빼놓고는 다들 가실하느라 바쁜 날들이 지나면서 계절은 슬슬 가을 끝 무렵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가을비를 긋느라 잠시 들어가 본 연심이네 방에 쌀자루가 몇 개 쌓여 있다.

"쌀이 있네?"

같이 들어간 송정댁 할머니가 물어본다. 서로들 사정을 훤히 아는 터라 벼농사를 안 한 연심이네에 쌀이 있으니 이상한 모양이다.

"들어왔어.(누가 선물했어)."

연심이네가 멋적은 듯 말한다.

"어디서?" 
"아 저 집이서 보내줬구만요."

작년에 바깥양반이 돌아간 연심이네는 올해 벼농사를 못하고 논을 묵혔다. 자식들은 진즉 서울 인근에 흩어져 살아 혼자가 된 연심이네는 일거리만 있으면 부지런히 품을 팔러 다닌다. 올해부터 당장 쌀을 사야할 그이네 사정을 뻔히 아는 이웃이 아마 추수한 쌀을 좀 보낸 것이리라. 그 쌀이 올 겨울 연심이네를 다숩게 할 것 같다. 

마을에서 단체로 선진마을 견학을 가기로 한 날, 같이 가자고 부르러 가는데 말 못하는 김씨 아저씨 아내, 제수네가 감을 한 바가지 들고 나왔다. 그이네는 올해 마을에서 감 농사를 제일 많이 했다.

"다른 집은 다 감이 있는데 송정댁에 감이 없어. 거기 좀 갖다주고 가야것네."

제수네가 걸음을 재게 놀려 송정댁 할머니 집으로 올라갔다. 

"이 배추 좀 싸먹어봐. 연한게."

이장댁이 불쑥 배추 몇 포기를 들이민다.

"그라고 우리 집에 홍시 있응게 좀 가져가. 내가 바뻐서 못갖다중게."  
"저 발이 아퍼서 못 움직여요. 나중에 주셔요."

나는 구례 뚝방길을 걷다가 칡넝쿨에 걸려 꼬꾸라지는 바람에 발을 크게 삐었다.

"그래?"

휭 하니 내려간 이장댁이 다시 감을 한소쿠리 가져 왔다.

"우리 마을이 감 많이 나는 덴디, 그 집 일하는 사람들한테도 맛 좀 뵈여. 그라고 발 삔 데는 무시를 긁어서 붙여봐. 촌에서는 그런 것이 약이여."

덕분에 우리 아랫채 일하러 타지에서 온 목수들에게도 한 사흘 새참으로 홍시가 돌아갔다. 내 발도 병원 신세를 안지고 무로 나았다. 

a  동네에서 얻은 배추와 감

동네에서 얻은 배추와 감 ⓒ 김영희


기온이 내려가면서 마을 사람들은 밭에서 무를 뽑기 시작했다. 무는 잘못하면 언다는 것이다. 봉덕이네서 한 수레 가득 무를 얻었는데 아랫집 제수네가 또 무를 보냈다. 평소에 가게에서 어쩌다 무를 한 개씩 사곤하던 나에게는 가히 폭탄 세례 수준이다. 무 뿐 아니다. 무 곁에는 쌀도 반자루 들어있다. 미리 맞춰놓지 않은 탓에 동네에서 쌀을 구하지 못한 내 사정을 안 제수네가 햅쌀밥 맛이라도 보라는 뜻으로 보낸 것이다. 

a  우리에게 온 동네 무. 땅에 묻는다

우리에게 온 동네 무. 땅에 묻는다 ⓒ 김영희


아무리 봐도 우리 마을 사람들이 학교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지는 않다. 옛날, 생활이 어려워서 자식들 공부 못 시킨 것을 한탄하는 이야기를 간간히 들을 지경이니 본인들이야 오죽했으랴. 하지만 학교 공부며 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이 마을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 그 무슨 공부가 더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귀촌 #섬진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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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두계마을에서 텃밭가꾸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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