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부위를 가리키는 관상학 용어.
김종성
<마의상법>에서는 "코가 높아서 우러러볼 만하면 관직 생활이 영화롭게 되고, 코 위에서 광택이 나면 집안에 부귀가 가득찰 것"이라고 했다. <마의상법>의 내용을 정리하면, 콧대가 솟은 상태에서 콧구멍이 보이지 않으며 준두(코끝)가 둥글고 홍색을 띠어야 하며, 산근(코뿌리, 양 눈 사이)이 너무 푹 패지 않으면서 이마까지 잘 이어져야 좋다고 했다.
이방원의 코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대체로 이와 유사한 느낌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또 미우가 용 같다고 한 걸 볼 때, 이방원의 이마는 적당히 넓고 뼈대가 솟은 듯한 느낌을 주면서 눈썹 바로 윗부분이 용이 꿈틀대는 듯한 느낌을 주었을 수도 있다.
만약 이방원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하륜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려 멸망 4년 전인 1388년부터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의 아들이 그런 관상을 갖고 있다니, 하륜으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듯하다. 이걸 명분으로 이성계 쪽과도 인연을 맺어두고 싶었는지, 하륜은 이방원의 장인인 민제에게 부탁해서 이방원과의 만남을 성사시킨다.
<태종실록>의 서언에 따르면, 하륜은 민제에게 "제가 관상을 많이 봤지만, 사위 분과 같은 관상은 못 봤거든요"라면서 "제가 꼭 한번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하륜과 이방원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때가 대체로 1390년 이전으로 추정되므로, 만남 당시의 하륜은 마흔세 살 이전, 이방원은 스물네 살 이전이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하륜은 당연히 이방원의 관상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부모자식 같은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긴밀한 친분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하륜은 이성계의 정치노선을 반대하면서도 관상학을 무기로 이성계의 아들과 친분을 쌓아두었다. 영화 <관상>의 내경이 이 모습을 봤다면, "저렇게 살아야 화를 면할 수 있거늘, 내 신세는 왜 이 모양인가!"라며 한탄하지 않았을까.
이방원과의 인연이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이 세워지고 정치무대에서 밀려난 지 1년 만인 1393년에 하륜은 정계에 복귀한다. 이성계 진영은 새 왕조를 세우긴 했지만,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1번'에 베팅한 사람들에게도 '배당금'을 주고 회유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하륜은 경기좌도관찰출척사라는 배당금을 받고 복귀했다. 관찰출척사는 관찰사와 같은 표현이다.
이렇게 하륜은 고위직 지방관이 되어 조선왕조에 투신했다. 그가 조선왕조에 들어간 것은 반대파를 회유하고자 하는 왕조의 전략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방원과의 개인적 인연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왕조의 사람이 된 하륜은 이번에는 풍수학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굳힌다. 건국 직후에 조선은 처음에는 계룡산 부근으로 도읍을 옮기기 위해 신도시 공사에 착수했다. 계룡산 부근에서 '중장비' 소리가 한창 요란스런 상황에서, 계룡산 천도의 적합성에 대해 반론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하륜이었다.
정치무대에 복귀한 해인 1393년에 하륜은 "도읍은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거늘,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고 동북면과도 막혀 있으며 풍수지리상으로도 좋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주장이 채택되어 계룡산 천도는 무산되었다. 혹시, 이 때문에 재산증식의 기회를 놓친 계룡산 부근의 지주들은 "하륜이 무슨 염치로 조선의 도읍을 운운하는가?"라며 분개하지 않았을까.
참고로, 계룡산이 한반도의 수도로 적합한가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정감록>의 일부인 <삼한산림비기>에는 "계룡산 밑에 도읍을 세울 땅이 있으니, 정씨가 나라를 세울 것이다. 하지만, 그 복덕(福德)이 이씨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계룡산이 이씨 왕조한테는 적합하지 않다고 이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제1부에서 설명한 바 있듯이 고려 말에 고려·명나라·북원(북몽골)이 뒤얽힌 외교문제를 해결한 적이 있는 하륜은, 이번에는 위와 같이 풍수학을 무기로 계룡산 천도를 무산시키는 방법으로 조선왕조에서 입지를 굳혔다. 그 뒤 한강 이북이 새 도읍의 후보지로 떠오르자, 하륜은 무학대사와 같은 입장에 서서 무악산(지금의 서대문 안산) 천도를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북악산(청와대 뒷산) 쪽이 도읍으로 결정되었지만, 하륜은 천도 문제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조선 건국 반대파'의 꼬리표를 떼고 어엿한 조선 관료의 위상을 굳힐 수 있게 되었다.
정도전에게 일격을 준비한 하륜, 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