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입암산에서 느끼는 만추의 단상

등록 2013.11.25 19:45수정 2013.11.25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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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흐름을 깊이 의식하지 못한 채 계절을 쫓아 늘 조바심치던 젊은 날과는 달리, 이즈음은 실타래처럼 엮인 시간들이 광야에서 말에 채찍질 하듯 계절을 몰아 내 의식을 앞질러간다.


무덥던 여름이 언제 끝나려나했는데 어느 날 아침 문득 낯선 손님처럼 가을이 들어섰다. 황금으로 물들던 들녘이 비어가는 모습을 보며 이제 머지않아 겨울이겠거니 했는데, 첫눈 소식과 함께 가로에 흩어져 뒹구는 낙엽들이 가슴까지 시리게 한다.

더 늦기 전에 만추의 산영(山影)이라도 기억의 한편에 남기고 싶어 지난 주말에는 입암산을 찾았다. 백양사를 안고 있는 백암산 옆 북서면에 자리 잡은 입암산은 해발고도 654m의 높지 않은 산이다. 기암괴석이 발달하여 가파른 계곡에 수량이 풍부할 뿐 아니라 가을단풍이 아름다워 지리를 잘 아는 이들은 번잡한 백양사보다는 한적한 이곳을 찾는다.

단풍철 끝물이라 그런지 등산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족 단위로 몇몇, 요란하게 밀려드는 산악회원 한 무리 그리고 그룹지어 오르는 젊은 학생들이 전부다. 등산로 초입 남창계곡에는 투명한 수면 밑으로 피라미 떼의 힘없는 유영이 물위로 떠가는 단풍잎과 어울려 수채화처럼 일렁인다.

홀로 오르는 산행길이 한적하고 고요해서 좋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낙엽을 떨군 채 겨울채비에 들어가고, 산 아래 계곡 쪽으로 갈 길을 늦춘 몇 그루 나무에는 빛바랜 사진처럼 퇴색한 단풍들이 늦깎이 산객을 손짓하며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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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의 입암산성 단풍 갈 길을 늦춘 빛바랜 단풍들이 늦깎이 등산객을 반긴다. ⓒ 임경욱

산 중턱쯤에 오르면 1960년대 초에 전남대학교에서 조성한 편백과 삼나무림이 지금은 인위적인 보살핌 없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하고 울창하다. 개중에는 태풍에 못 견뎌 뽑히거나 꺾인 나무도 있었지만, 모두들 그들만의 질서 속에서 비탈에 서서도 세파를 이겨내는 방법을 몸으로 익혀 꿋꿋하게 버텨내고 있다.


은선동계곡에서 입암산성까지는 조금 경사지지만 한달음에 오를 수 있었다. 산 정상에 어떻게 그런 분지가 형성되었을까 싶게 광활한 성터는 천혜의 요새로 안성맞춤이다.

계곡을 끼고 1256년 몽고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처음 조성되어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허물어진 성을 수축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이겨낸 주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입암산성은 총길이 약 15㎞로 지금도 남문과 북문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며, 평탄한 흙길로 이어지는 성터는 초목이 우거져 있다. 아직도 집터 주변으로 돌담과 우물, 절구 등이 있으며 우물가의 버드나무들이 세월 속에 묻힌 허무한 전장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휘적휘적 성터를 가로질러 성벽을 밟고 갓바위 쪽으로 오르노라면 우측으로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가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여기저기 병졸들의 함성과 전쟁에 징발된 백성들의 부산스런 모습이 환영이 되어 갈 길을 막는다.

갓바위에 오르니 연무에 덮여 겨울빛으로 변해가는 정읍평야가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처럼 평화롭다. 고속도로와 국도, 호남선 철길 옆으로 새로 뚫린 고속철로가 엿가락처럼 펼쳐져 어지럽지만 멀리 있어 아름답다. 우리는 늘 풍경이 갖는 내면과 사실 보다는 피상과 형식에 잠깐 눈을 주고 그것을 판단하고 결정하게 된다.

성을 돌아 내려오는 길은 줄곧 내리막이라 발걸음도 가볍게 쉽게 내려올 수 있었다. 수북하게 쌓인 바늘같은 낙엽송 위로 사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신갈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잎들이 숲으로 내려앉아 제 갈 길을 찾고 있을 때 바람에 서걱이는 갈잎의 노래가 나그네의 발길을 잡는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람에 땀을 씻는다. 졸아든 계곡물이 돌 틈을 끼고 지나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머지않아 강의 품에 안기겠지, 나뭇잎들이 대지의 품에 안기듯이….

이렇듯 모든 것이 제 갈 길로 돌아가는 이때에 나는 한탄할 그 무엇이 있어 계절을 잊고 방황하는가? 정치를 접고 글쓰기에 전념하는 유시민씨는 최근 그가 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서 '왜 자살하지 않는가?'라는 카뮈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가슴이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있다.
누군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이 있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미안한 사람이 있다.
설렘과 황홀, 그리움, 사랑의 느낌….
이런 것들이 살아있음을 기쁘게 만든다.
나는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하고 싶다.
미래의 어느 날이나 피안(彼岸)의 세상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

나도 이제 살아있음에 기쁨을 주는 것들을 찾아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해야겠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산길을 내려오는 내내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만추의 자연이 내게 준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입암산성 #만추 #남창계곡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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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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