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 디즈니 떨어져서 참 다행이다

[목수정이 만난 파리의 생활좌파들④] 거리예술가, 에릭 브로시에

등록 2013.12.10 09:18수정 2013.12.1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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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통통하게 살찐 분홍 돼지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림엽서가 희완(어쩌다 10년째 함께 살고 있는 남자)의 우편함에 도착했다. 직접 카드를 만들어 보내는 사람들이 아직 있긴 하지만, 그래봤자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낸 사진이나 그림을 이메일로 보내는 정도가 대부분인 이 시절에, 손수 붓으로 그린 카드라!

언제나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붕붕 떠다니는 그림엽서 속의 돼지는 마치 엄마 손을 붙잡고 따라간 놀이공원에서 마침내 떡하니 솜사탕장수를 만난 감격과도 비슷하다. 기어이 엄마를 감언이설과 떼로 설득해 손에 쥐고 만 분홍색 솜사탕의 기억처럼 환상적이었다.

 에릭이 탄생시킨 분홍 돼지 캐릭터.
에릭이 탄생시킨 분홍 돼지 캐릭터.에릭 브로시에

그 잊을 수 없는, 인상적인 카드를 만들어 보낸 남자를 처음 만난 건 3년 전이었다. 루아르(Loire) 강가를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성(샤또:château)들을 만나는 여행을 계획하던 참이었다. 희완이 투르(Tours)에 별장을 가진 친구가 있다며 전화를 걸었고, 바로 그 자리에서 별장으로 초대를 받았다.

밝은 색의 나무마루 바닥, 환한 베이지색으로 짠 그릇장, 그 속에 넉넉하게 놓여 있던 섬세한 문양의 흰 접시들, 정원 안에 흐드러지게 가지를 늘어뜨린 향기로운 무화과나무, 다락방을 개조해 만든 넓은 2층 침실, 온 집안을 가득 채우던 포근한 난로의 온기…. 소박하지만 정갈한 시골집에서 한 시간 정도 얼굴을 마주친 집주인들의 심플하고 따뜻한 성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를 만났을 때, 우리 사이엔 아무런 어색함도 없었다. 투르 별장의 난로며, 정원에 있던 꽃과 나무들, 그 무렵 청명했던 하늘을 이야기했다. 에릭은 그때도 지금도, 무대에서 격렬한 열창을 마치고 내려온 가수처럼 수줍어했다.

 스스로를 풍요로운 좌파라고 소개하는 거리예술가 에릭 브로시에.
스스로를 풍요로운 좌파라고 소개하는 거리예술가 에릭 브로시에.에릭 브로시에
인생에 영감을 준 운명적 만남들

에릭 브로시에는 1967년, 투르에서 태어났다. 투르는 약 5km만 가면 그럴듯한 성이 하나씩 나타나는 지역이다. 그의 아버지는 한 성 안에 위치한, 학교를 겸한 아동시설의 책임자였고, 어머니는 그 시설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처음엔 파리 지역에 사는 아이들이 자연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어린이 캠프로, 프랑스 최대 노동단체인 노동총연맹(CGT)이 지원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다가 부모와 함께 살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아이들(부모가 수감되거나 알코올중독자거나)을 맞아 키우고 교육하는 시설로 변모했다. 일종의 기숙학교였지만, 분위기는 밝고 건강했다. 선생님들도 열정과 애정으로 아이들을 대했고, 언제나 양질의 식사가 풍부하게 제공됐다. 아이들은 풍요롭고 드넓은 자연 속에 둘러싸여 마음껏 뒹굴며 놀았고, 끊임없이 재미있는 모험과 놀이를 찾아나섰다. 그 100여 명 남짓한 아이들 속에 에릭이 있었다. 유년의 기억은 에릭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아로새겼고, 바로 그때 그는 여러 사람들과 갈등을 최소화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익힐 수 있었다.

 에릭이 유년 시절을 보낸 투르의 아동시설.
에릭이 유년 시절을 보낸 투르의 아동시설. 에릭 브로시에

에릭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던 1981년, 마침내 프랑스 사회당이 집권했다. 미테랑의 측근으로, 문화의 전 영역에 마법의 가루를 뿌리던 자크 랑(Jack Lang, 1981~1994, 문화부장관으로 재직)이 등장해 전설적인 문화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예술고등학교에 인문계·자연계 이외에 응용미술이라는 옵션이 생겼고, 에릭은 좋아하던 작업을 계속 할 수 있는 조형예술계를 선택해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모든 고등학교에 이런 옵션이 있는 게 아니어서, 예술고등학교에는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학생들이 프랑스 전역에서 모여들었다. 학생들의 에너지는 말 그대로 터질 듯했다. 그것은 물 만난 고기들의 향연, 비로소 자기 숲을 찾아 돌아온 한 마리 짐승의 발랄한 피크닉과도 같았다.

에릭은 그곳에서 발레리를 만났다. 이후 두 사람은 열일곱 살에 만나 지금까지 약 30년간 인생을 함께하고 있다. 에릭과 발레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각자가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하면서 살 수 있도록 서로 지지해주기'를 약속했고, 그 약속은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 약 30년 동안 둘을 지탱해주고 있다.

여느 고등학생들이 담배나 술, 혹은 파티의 유혹을 조금씩 탐닉하던 것과 달리, 에릭과 발레리는 미래 계획을 실현해갈 방법을 모색했다. 방학마다 고성(古城)을 개조해 만든 투르 근처의 거대한 갤러리, 카파자(Capazza)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교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림을 나르고, 전시를 위해 못을 박고, 전단을 나눠주는 식의 단순노동이었지만, 그곳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을 만났고, 무엇보다 재미있는 일을 마음껏 하면서 사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에릭과 희완도 그때 만났다. 30대 초반의 젊은 예술가였던 희완은 카파자에서 대형 설치미술 작업을 했고, 에릭과 발레리가 희완의 일을 도왔던 것이다. 그때 에릭은 하나의 길을 만났다. 예술가라는 광활하고 매력적인 길. 그 길은 여전히 막연했지만, 그 매혹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설 뿐이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발레리는 카파자에서 만난 디자이너를 통해 바로 파리에 일자리를 얻어 오트쿠튀르의 아틀리에에서 모델리스트로 일했다. 에릭은 1년간 군대를 다녀온 뒤 고용안정센터를 통해 일자리를 알아보면서 불안한 나날(불안의 시간은 그 누구의 인생에도 찾아들고야 마는 불청객이지만, 바로 그 순간은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 될지 노예가 될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기도 하다.

세상과 타협하면서 영영 자신의 욕망과 멀어질 수도, 결국 자신의 내밀한 욕망에 화답하는 길을 찾아 자아를 끊임없이 꽃피울 수도 있는 그 갈림길이 바로 백수의 시절에 주어진다)을 보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상상 속의 오브제들을 만들고, 동화의 세계를 실현해 축제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눈 속에 행복이 번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직업으로 구체화할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건 고용안정센터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고용안정센터의 소개로 유로 디즈니로 면접을 보러 가게 됐다. 고용안정센터가 판단하기에 에릭이 묘사하는 일을 실현해낼 수 있는 직장은 유로 디즈니가 유일해 보였던 것. 다행이도! 그는 면접에서 떨어졌다.

현재 에릭은 디즈니 사가 지향하는 세계와 정반대편에서 일을 하고 있다. 디즈니 사가 '스테레오 타입 이미지를 끊임없이 무한복제하고 상업화시키는 것, 특정한 스타 캐릭터 속에 상상력을 가두고 이미지를 소비하게 만들어서 아이들을 온순한 자본주의의 노예로 길들이는 일'을 벌린다면, 에릭의 모든 작업은 축제의 순간에만 존재한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상상 속의 새로운 존재들을 창조한다. 폭발할 듯한 원색의 에너지를 그 안에 담고, 모든 코드화된 역할의 경계들을 무너뜨린다. 돼지는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도로 위를 달린다.

 축제 현장에 전시된 에릭의 작품들.
축제 현장에 전시된 에릭의 작품들.에릭 브로시에

에릭은 자신의 작업물이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것을 지양한다. 사람들이 무료로 즐기며 순간의 감동, 짜릿했던 축제의 기억을 머릿속에 가슴속에 남기길, 그리고 차마 갤러리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하지 못하는, 문화적으로 소외됐던 서민들이 같이 즐기길 바란다. 그에게 작업을 의뢰하는 주체들은 대부분 지방자치단체 혹은 학교다.

유로 디즈니 대신 그가 사회생활의 첫 발을 디딘 곳은 진보적인 그래픽 디자이너 그룹, 그라퓌스(Grapus)다. 1970년에 설립된 이 단체는 '세상을 바꾼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참여적이고 혁명적인 그래픽 디자인을 생산해냈다.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때 사용된 다양한 포스터와 슬로건, 로고들을 제작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프랑스 노동총연맹의 로고를 만들었고, 프랑스 공산당과 노동총연맹 등과 파트너십을 맺어 다양한 작업으로 90년 해산할 때까지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해왔다. 에릭은 거기서 4년간 조수로 참여하면서, 거리에서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작업의 묘미를 익혔다.

이후 에릭은 당시 개관 준비 중이던 프랑스자연사박물관(Grande Galerie De l'Evolution)에서 일했다. 2년간 과학자, 동물학자들과 함께 공룡 및 동물 모형 등을 제작했다. 그의 축제에 동물 캐릭터가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유도 그때의 경험 덕분이다. 그러다가 마을축제에서 무대미술 제작을 맡게 됐다. 포도를 수확하는 계절이면 전통적인 포도주 산지뿐 아니라, 파리 근교의 도시들에서 크고 작은 축제가 벌어진다.

에릭은 퍼레이드와 무대미술을 담당했다. 두세 번 하다 보니 남다른 감각들이 손끝에서 꾸물거리며 기어나왔다. 바로 이때 에릭은 비로소 이 일을 하면서 평생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지금 살고 있는 파리 남쪽의 작은 도시 이브리(Ivry)로 이주하게 된 것도 그때다. 이사하자마자, 그는 예술인의 집(maison des artistes)에 등록했다. 예술작업을 통해 세금을 내고, 나라가 인정한 혜택들을 받겠다는 공식선언이었다. 그리고 20년 동안, 그 길을 계속 왔다.

낮에는 작업실, 밤에는 노숙인들 숙소

이브리는 수십 년간 공산당이 집권해온 지자체다. 덕분에 시가 소유한 건물들이 많다. 에릭은 임대료가 저렴한 시 소유의 아파트를 얻었다. 그 건물에는 사실은 수년째 방치된 칸이 많았는데, 주로 밖으로 창이 나지 않은 밀폐된 곳이었다. 노숙인이나 마약 딜러들이 불법으로 사용하곤 했다. 에릭은 시 당국에 제안서를 넣었다.

'나에게 그 공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면, 마약딜러들을 제외하고, 적어도 노숙인과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보겠다. 아이들과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생동감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어보겠다.'

이브리 시 당국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문화예술에 관심 있는 의원이 많았기 때문이다. 에릭은 이브리가 문화에 관대하고, 특히 엘리트예술보다 서민들이 참여하고 향유하는 나눔의 예술정신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공략했던 것이다.

에릭은 방치된 공간을 헐값에 임대해서 낮에는 자신의 작업실 겸 마을 아이들을 위한 아틀리에로 탈바꿈시켰다. 밤에는 노숙인들이 돌아와 작업실 앞 복도에서 잠을 잤다. 에릭은 아침에 어린 딸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면서 잠든 노숙인들을 깨웠다.

"봉주르 파스칼."

반드시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인사를 하고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이웃처럼 지냈다. 약 20년이 지났지만 노숙인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극빈자에게 지급되는 최소생활비로 살았다. 끼니는 무료급식소에서 해결하고 보조금은 대부분은 술을 사는 데 쓴다. 그들을 비난하기보다는 그 삶의 형태를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다.

 에릭은 아틀리에를 작업실 외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으로도 활용한다.
에릭은 아틀리에를 작업실 외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으로도 활용한다. 에릭 브로시에

그 후로 모든 일이 잘 풀렸다. 에릭은 축제 퍼레이드와 무대장식 전문가로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 전역은 물론 외국의 축제에도 참가한다. 1년 내내 작업 의뢰가 끊이지 않는다. 자크 랑이 주도한 사회당 문화정책의 영향도 컸다. 외곽으로 떠밀렸던 거리축제, 마리오네트, 서커스 등 비주류 예술들이 1980~1990년대에 집중 수혜를 받으며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자발적 선택으로 자본을 제압하는 거리예술가

하기 싫은 일이 뭔지 아는 것, 그래서 그 일을 하지 않는 건 쉽다. 일단 흥이 안 날 테고, 몸도 안 따라줄 테니. 그러나 무한히 열려 있는 선택지 앞에서 원하는 것을 고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도대체 내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알지 못하는 병은, 네 개 중 하나의 정답, 그것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하나가 아니라, 세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하나를 추정하는 훈련만 무수히 해온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병이다.

많은 이들은 죽을 때까지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무수한 세상의 시선과 관심, 대세에 떠밀려 다닌다. 그러다가 결국 원하는 게 뭐였는지도 모른 채 생은 끝나버리기 십상이다. 죽는 날까지 유행하는 수의를 입고, 유행하는 관 속에, 유행하는 방식대로, 자손들의 체면을 구기지 않으며 얌전히 들어가 주어야 하는 것은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떠안는 운명이다.

자유의 번잡함이 괴로운 나머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선택지를 좁힌다. 자율화된 학생들의 복장은, 교장들의 용단과 학부모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다시 교복 시대로 복귀하고, 세상의 미혼남녀들은 자신의 직관과 느낌으로 짝짓기를 포기하고 결혼중개업체의 배를 불리는 선택을 한다. "자유는 싫어. 선택하는 건 귀찮아. 그냥 정해줘. 그럼 시키는 대로 할게." 이런 아우성이 곳곳에서 들린다.

최근 청소년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심각한 증상은 불같은 반항이 아니라 '무기력'이라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10년간의 짧은 민주화 경험 이후, 이토록 왕성하게 자라난 독재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생각해보면, 지금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은 단지 부정선거의 결과만은 아닌 듯싶다. 절반 정도는 독재와 권위가 익숙하고 편한 사람들이 불러들인 재앙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세상을 움직이는 종교가 되면서 자본의 논리는 지구촌 사람들을 빠른 속도로 제압해갔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뭔가 다른 것을 희망하기를 점점 잊어가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에릭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원하지 않는 일들은 하지 않으며 살아가면서 세상의 종교인 자본을 간단히 제압한다. 

좌파란, 돈보다 자유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람들 

에릭은 내가 아는 좌파 가운데 가장 단순한 어휘를 구사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수다와 열정, 광기를 무대 위에 놓고 내려온 듯, 조용하고 차분하다. 거창한 수사로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것, 그리고 사람을 설득하는 진정과 약간의 창의력으로 세상을 살아왔다. 돈은 수단도 목적도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믿기지 않는다면, 에릭처럼 해보면 된다. 자기를 매혹하는 그곳으로 끝까지 가보는 것.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당신은 그 속에서 일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잠시 머뭇거릴 때, 원래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일깨워주고 지지해주는 벗이 있다면, 더욱 확실히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에릭과 나눈 이야기를 좀 더 남긴다.

- 거리예술가라는 직업만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가? 일을 찾아 나서기도 하는가?
"수입이 일정하지 않다. 작업 의뢰가 불규칙하게 들어온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성수기, 비수기가 있지만 나는 크게 문제 삼지 않는 편이다. 그보다는 작업의 완성도와 즐거움이 더 중요하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도 돈을 우선시하는 부류가 존재한다. 예산을 부풀리거나 작업을 대충 마무리하는 등 여러 유형이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오래 못 간다.

자신의 분야에서 제대로, 그리고 정직하게 해내야 꾸준히 일할 수 있다. 그랬을 때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가 나오고, 다 같이 행복해하면 그 자체로 홍보가 된다. 그렇더라도 무작정 기다리기만 해서는 일이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기획해서 먼저 제안하는 편이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나의 길을 갈 수 있다."

 에릭이 참여한 축제 퍼레이드의 환상적인 풍경.
에릭이 참여한 축제 퍼레이드의 환상적인 풍경. 에릭 브로시에

- 당신의 작품이 상설전시된 곳이 있는가?
"내 작업은 언제나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다. 축제는 한순간 꿈처럼 스쳐지나가는 것. 축제가 끝남과 동시에 내 작업도 사라진다. 축제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추억으로, 희열로 남을 뿐이다. 한 번은 이브리의 고교생들이 나를 주제로 단편영화를 찍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 축제의 순간이 달콤하게 남아 있었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나를 기록 속에 담고 싶었다는 것이다.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내 작업이 한 공간에 상설전시되어 보존되기를 원치는 않는다. 다만 매년 한 권씩 책을 출간해서 내 작업을 기록으로 남길 뿐이다."

 축제 현장에 설치한 에릭의 작품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
축제 현장에 설치한 에릭의 작품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 에릭 브로시에

- 30년 가까이 거리예술가로 살았다. 그사이 프랑스 사회도 많이 변했고, 단순히 말하자면 우경화의 길을 걸어왔다. 주요 고객인 지자체들과의 관계 변화 등 작업시 영향을 받았는가?
"좌파가 장악했던 파리 근교 도시들 가운데 우파로 전향한 도시가 상당수 있다. 그럴 때면 대부분 문화 부문의 예산을 줄이고, 대신 시설물 건설 등에 투자를 한다. 거기까지는 나쁘지 않지만, 그 후에 프로그램 내용이 엉성해지는 경우가 많다. 내 작업에 한해서만 얘기하자면, 다행히 우경화되는 와중에도 일이 줄지는 않았다."

- 작업은 주로 혼자서 하나?
"처음에는 혼자서 하다가 12년 전부터 스웨덴 아티스트, 린다(Linda Hede)와 공동작업을 한다. 원래는 잠시 도와주기로 했던 건데, 지금은 공동작업자이자 남매처럼 지낸다."

- 발레리(부인)는 오트쿠튀르에서 여전히 일하나?
"30년 전부터 꾸준히 해온 결과, 지금은 파리에서 30명 안에 꼽히는 모델리스트가 되었다(모델리스트는 디자이너가 스케치한 것을 보고 옷을 완성해내는 사람이다. 때로는 디자이너의 설명만 듣고 옷을 입체화시키기도 한다). 전에는 니나리찌 사에서 일했는데 지금은 발망 사를 다닌다. 발망 사가 발레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2년 간 끈질기게 구애를 했다."

- 당신은 거리예술가이고, 발레리는 명품 의상을 만든다. 부르주아들만이 소비하는 옷을 만든다는 사실에 대해 그녀가 갈등하진 않나?
"발레리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장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옷을 만든다. 그런 면에서 우리 부부는 손으로 무엇인가를 입체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발레리는 자신의 뿌리가 노동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녀의 부모, 조부모들은 모두 노동자, 기술자였고 노조활동에도 참여했다. 자신의 일에서만큼은 한 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장인의 마음가짐으로 살았던 분들이다. 그런 정신을 발레리도 갖고 있다."

- 두 사람 사이가 각별하다고 들었다.
"(웃음) 하긴, 지금까지 알고 지낸 커플들이 모두 깨졌다.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는 선사시대 공룡으로 통한다. 함께 산 30년 동안 서로 언성을 높이면서 싸운 적이 한 번도 없다. 부부 사이에 시련이 닥치기도 했지만(그들의 첫 딸이 열 살 때 뇌종양을 앓았다. 5년 동안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지금은 완치된 상태다) 힘든 시간을 함께 견디면서 부부사이는 더 단단해졌다. 30년 전에 한 약속을 서로 잊지 않고 지켜주기 때문에 가능했다."

- 스스로를 좌파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좌파란 무엇인가?
"좌파라…그런 것 같다. 부모님과 조부모님이 모두 좌파였던 탓에 지극히 자연스럽게 좌파적 사고로 살아왔다. 살면서 그리고 일하면서 돈을 먼저 생각한 적이 없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좌파와 우파는 돈에 부여하는 가치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것 같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기쁨에 우선순위를 둔다.

우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통해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작업을 할 때도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그들이 일상에서 전혀 누릴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각별히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려 하기보다, 도시에 살며 잊고 지낸 것들을 일깨워주려고 한다. 물질적 보상은 내가 이 일을 계속하며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주어지는 정도면 충분하다.

또 하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유다. 시간 운용에 있어서나 작업의 선택에 있어서 자유롭게 결정하는데, 돈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 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런 점에서 나는 충분히 풍요로운 좌파다."

- 작업실 규모가 대단하다. 작업실은 어떻게 구했는가?
"한 600평방미터쯤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작업물이 쌓여서 점점 더 큰 공간이 필요했다. 이브리 내에 마땅한 공간을 물색하던 중 시 소유의 폐공장을 알게 됐다. 나는 이 공간의 활용 계획을 큰 종이에 그리고 (서랍에 처박아놓지 못하도록) 아예 액자로 멋지게 만들어서 정책 담당자를 찾아가 설득했다.

결국 6개월간 무료로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그사이 벌써 1년이 지났다. 물론 아이들을 위한 아틀리에를 열고 마을축제를 준비하는 프로젝트 수행 기간에 한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일단 들어왔으니 꾸준히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계속 머물 생각이다."

 에릭의 작업실 풍경.
에릭의 작업실 풍경.에릭 브로시에

-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는가?
"크고 멋진 트럭을 한 대 갖고 싶다. 트럭 내부를 완전히 개조한 뒤 작업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싣고 다니면서 공연도 하고 축제도 벌이고 싶다. 일하다가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과 함께 다른 일을 벌이고 싶어진다. 그 트럭을 완성하려면 그들 모두의 재능이 필요하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되면, 바로 그것이 나를 움직인다. 그리고 조금씩 움직이다 보면,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일을 시키기 전에, 한 발 먼저 앞서서 자신이 할 일을 구상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첫발을 내딛는 일이다. 그것이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방법이다."

 에릭 브로시에의 홈페이지. 그의 작품들을 둘러볼 수 있다.
에릭 브로시에의 홈페이지. 그의 작품들을 둘러볼 수 있다. 에릭 브로시에

덧붙이는 글 에릭 브로시에 홈페이지 http://www.ericbrossier.com
#에릭 브로시에 #목수정 #생활좌파 #축제 #거리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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