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은 아틀리에를 작업실 외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으로도 활용한다.
에릭 브로시에
그 후로 모든 일이 잘 풀렸다. 에릭은 축제 퍼레이드와 무대장식 전문가로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 전역은 물론 외국의 축제에도 참가한다. 1년 내내 작업 의뢰가 끊이지 않는다. 자크 랑이 주도한 사회당 문화정책의 영향도 컸다. 외곽으로 떠밀렸던 거리축제, 마리오네트, 서커스 등 비주류 예술들이 1980~1990년대에 집중 수혜를 받으며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자발적 선택으로 자본을 제압하는 거리예술가하기 싫은 일이 뭔지 아는 것, 그래서 그 일을 하지 않는 건 쉽다. 일단 흥이 안 날 테고, 몸도 안 따라줄 테니. 그러나 무한히 열려 있는 선택지 앞에서 원하는 것을 고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도대체 내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알지 못하는 병은, 네 개 중 하나의 정답, 그것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하나가 아니라, 세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하나를 추정하는 훈련만 무수히 해온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병이다.
많은 이들은 죽을 때까지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무수한 세상의 시선과 관심, 대세에 떠밀려 다닌다. 그러다가 결국 원하는 게 뭐였는지도 모른 채 생은 끝나버리기 십상이다. 죽는 날까지 유행하는 수의를 입고, 유행하는 관 속에, 유행하는 방식대로, 자손들의 체면을 구기지 않으며 얌전히 들어가 주어야 하는 것은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떠안는 운명이다.
자유의 번잡함이 괴로운 나머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선택지를 좁힌다. 자율화된 학생들의 복장은, 교장들의 용단과 학부모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다시 교복 시대로 복귀하고, 세상의 미혼남녀들은 자신의 직관과 느낌으로 짝짓기를 포기하고 결혼중개업체의 배를 불리는 선택을 한다. "자유는 싫어. 선택하는 건 귀찮아. 그냥 정해줘. 그럼 시키는 대로 할게." 이런 아우성이 곳곳에서 들린다.
최근 청소년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심각한 증상은 불같은 반항이 아니라 '무기력'이라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10년간의 짧은 민주화 경험 이후, 이토록 왕성하게 자라난 독재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생각해보면, 지금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은 단지 부정선거의 결과만은 아닌 듯싶다. 절반 정도는 독재와 권위가 익숙하고 편한 사람들이 불러들인 재앙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세상을 움직이는 종교가 되면서 자본의 논리는 지구촌 사람들을 빠른 속도로 제압해갔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뭔가 다른 것을 희망하기를 점점 잊어가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에릭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원하지 않는 일들은 하지 않으며 살아가면서 세상의 종교인 자본을 간단히 제압한다.
좌파란, 돈보다 자유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람들 에릭은 내가 아는 좌파 가운데 가장 단순한 어휘를 구사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수다와 열정, 광기를 무대 위에 놓고 내려온 듯, 조용하고 차분하다. 거창한 수사로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것, 그리고 사람을 설득하는 진정과 약간의 창의력으로 세상을 살아왔다. 돈은 수단도 목적도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믿기지 않는다면, 에릭처럼 해보면 된다. 자기를 매혹하는 그곳으로 끝까지 가보는 것.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당신은 그 속에서 일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잠시 머뭇거릴 때, 원래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일깨워주고 지지해주는 벗이 있다면, 더욱 확실히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에릭과 나눈 이야기를 좀 더 남긴다.
- 거리예술가라는 직업만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가? 일을 찾아 나서기도 하는가? "수입이 일정하지 않다. 작업 의뢰가 불규칙하게 들어온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성수기, 비수기가 있지만 나는 크게 문제 삼지 않는 편이다. 그보다는 작업의 완성도와 즐거움이 더 중요하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도 돈을 우선시하는 부류가 존재한다. 예산을 부풀리거나 작업을 대충 마무리하는 등 여러 유형이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오래 못 간다.
자신의 분야에서 제대로, 그리고 정직하게 해내야 꾸준히 일할 수 있다. 그랬을 때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가 나오고, 다 같이 행복해하면 그 자체로 홍보가 된다. 그렇더라도 무작정 기다리기만 해서는 일이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기획해서 먼저 제안하는 편이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나의 길을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