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하는 날이면 가까이 사는 자식들은 돼지고기를 사서 시골로 모인다. 지난달 말 처갓집에서 배추를 다듬는 장모님과 처남댁, 아내는 약 300포기 가까운 김장을 했다.
심명남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특히 장모님의 실망은 컸다. 우리가 일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울고 불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순식간에 집안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옛말에 사위를 두고 백년지객(百年之客)이요, '사위사랑은 장모'라 했거늘... 예비 장모님의 푸대접으로 나 또한 상실감이 컸다. 사실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간 것도 아닌데 어찌 이럴 수가...
이내 술상이 들어왔다. 점잖던 장인어른과 처 이숙이 내게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 속이 탄 나는 술을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금세 1.5리터 댓병이 바닥났다. 평소 같으면 쓰러질 주량이지만 장모님의 성화 때문에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어차피 엎지른 물이라 생각했다. 사실 결혼을 말 할 단계는 아니었다. 이날 인사만 하고 다음에 진도를 나가겠다는 내 생각이 순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 역시 질러버리고 말았다.
"제가 모타리는 작아도 수영(가명)씨하나는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 있습니다. 수영씨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저희 결혼 허락해 주십시오!"
예비신랑감의 면접테스트가 되어버린 첫 만남은 이렇게 끝이 났다. 이후 장모님의 반대로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이후 우리 결혼은 가속도가 붙었다. 아내를 만난 지 딱 1년만인 12월 24일. 첫눈이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에 우린 웨딩마치를 울렸다. 그 후 아내는 세 아이를 낳은 선녀가 되었고 나 역시 그런 아내에게 꽉 잡혀 사는 나뭇꾼이 되었다. 어느덧 결혼 19년째를 맞고 있다.
첫 만남에 사위에게 쌀쌀했던 장모님. 당신의 업보(?)때문인지 전라도 말로 '겁나 미안해' 하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신이 키가 작아 키 크고 듬직한 사위를 간절히 원했단다. 이후 난 장모님의 원죄탓에 사위대접을 톡톡히 받고 산다. 그 대표적인 증표가 '김장김치'다. 처음은 몰랐다. 자식을 키우고, 살림을 살다보니 매년 느껴지는 김치의 고마움을 말이다. 자랑같지만, 한해도 거르지 않고 19년 동안 장모님이 담가준 김장김치는 우리 집의 든든한 재산이다. 김장 뒤 김치 냉장고 2대에 가득 찬 김치로 일 년을 버틴다. 김치만 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19년째 김장 담가주신 장모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