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만에 본 롯데, 너 참 많이 변했구나

[리뷰] 창작뮤지컬 <베르테르>

등록 2013.12.10 18:23수정 2013.12.1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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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전미도' 때문이다. 지난 결혼기념일, 간만에 뮤지컬을 봤다. 원래 예정된 계획이 아니었는데, 급변덕을 부려 하루가 지나기 직전인 12일 밤 예약에 성공했다(당일 예약은 안 되더라). 공연 일은 11월 13일,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였다.

이날 주인공 김인우의 우산 속으로 갑자기 뛰어든 운명의 여자, 김태희 역을 맡은 전미도를 처음 봤다. 맡은 역할에 비해 무대 위 등장은 많지 않았는데, 충분히 인상적인 배우였다. 그래서 많이 아쉬웠다. 좀 더 무대에 많이 등장했었더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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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테르>의 포스터. ⓒ CJ E&M(주)

그런데 전미도가 <베르테르>에 롯데 역으로 출연한단다. 그것도 '엄테르' 엄기준과 함께. 마음이 급해졌다. <베르테르>는 10여 년 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됐을 때 한 번 봤다(그때 롯데는 추상미였다).

안타깝게도 롯데와 베르테르, 두 주연배우 연기는 희미하지만, 넘버 '왕년의 사랑'을 부르던 오르카 역의 양금석의 연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 OST를 아직도, 용케 잘 보관하며 시시때때로 듣곤 했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땜빵으로 나가 공연해도 될 만큼 듣고 또 들어 입에 익은 넘버(뮤지컬에 들어가는 곡)들. 그런데 '전롯데(전미도+롯데)'라니.

연말을 맞아 보고 싶은 뮤지컬은 많고 예산은 제한적이라, 또 이미 한 번 봤다는 이유를 들어 제일 저렴한 좌석으로 예매를 했다. 3층의 맨 앞 줄. 그럭저럭 볼 만하다는 블로거들이 있는가 하면, "거기서 잘 보이겠냐?"고 초치는 친구 반응까지 다양했지만, 기대 반 우려 반의 마음으로 지난 5일, '전롯데(전미도+롯데)'와 '엄테르(엄기준+베르테르)'를 만나러 갔다.

한층 밝아진 무대, 더 무거워진 내용

어딘가에 10여 년 전 공연 내용을 조금이라도 끄적여 뒀으면 좋았을 걸. 어제 일도 가물가물한 내가 10여 년 전 일을 정확히 기억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만, 적어도 분위기는 달라졌다. 하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뭘. 기억 속 다소 칙칙했던 무대는 극의 분위기와 '쫌' 어울리지 않는다 싶을 정도로 밝아졌고(배우들의 화이트 의상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적응이 잘 안 됐다), 대신 내용은 더 무거워졌다. 그리고 제일 눈에 띄는 변화는 롯데였다.


10여 년 전 세종문화회관 객석 끄트머리에서 공연을 보고 난 뒤, 내 머릿속에 남은 의문는 과연 롯데가 베르테르를 좋아했는가였다. 베르테르의 구애에 조금이라도 '흔들렸는가' 였다. 무대에서 그 증거가 될 만한 인상적인 장면을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3년의 롯데는 달랐다.

2막에서 알베르트와 결혼한 롯데가 여행에서 돌아온 베르테르와 만났을 때 그 반응. 남편 알베르트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게 당연했던. 베르테르를 향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혼란스러워 하기 시작하는 롯데에게 10여 년 전 롯데는 찾기 어려웠다. 베르테르가 "마음의 눈으로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사랑을 하라"고 용기를 준 카인즈가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살인을 저질러 처형 당한 뒤 롯데가 베르테르에게 갖는 감정의 변화는 더욱 도드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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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테르' 프레스콜 하이라이트 시연을 선보이는 엄기준과 전미도 ⓒ 박정환


카인즈가 죽은 뒤 방황하던 베르테르는 결국 롯데에게 작별을 고하는데, 이때 둘이 부르는 넘버 '제발'은 그야말로 소름 작렬.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왜 '엄테르'라는 건지, 잘 이해가 안 갔다. 워낙 멀리서 봤기에 표정이라든가 섬세한 연기를 포착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쌍안경마저 없었더라면…), 곡도 그다지 안정적으로 들리기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둘이 넘버 '제발'을 격정적으로 부르는 장면에서는 정말 쓰러질 뻔했다.

잡을 수도 없고, 떠나 보내기도 싫은 롯데. 떠나기 싫지만, 떠나지 않을 수도 없는 베르테르. "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당신은 저를 만날 수 있고, 만나주세요. 예전 그대로. 다만 지나치지 않게"라는 롯데에게 베르테르는 "왜 당신은 나의 마음을 그토록 외면을 하시나요. 받아주세요. 불타는 마음, 제발 부탁이예요"라고 하는 이 장면은 <베르테르>의 절정이라 할 만하다.

공연 보고 남는 건 음악인데, OST가 없다고?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스퀀스. 스포일러는 되고 싶지 않기에 "정말 최고, 기억에 남을 만한 명장면이었어. 총 소리 '빵'나는 거보다 아이디어 참 좋지 않니?"라는 한 관객의 말로 대신하련다. 베르테르의 마지막 넘버 '발길을 뗄 수 없으면' 가운데 이 대목, "나 그대를 차마 떠나려는데, 내 발길이… 붙어서… 뗄 수가 없으면", 공연장을 나서는 내 맘이 딱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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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테르> 커튼콜 현장. 아름다운 무대 연출이 돋보였다. ⓒ 최은경


지금도 내 귀엔 10여 년 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옥 같은' 넘버들이 흐르고 있다. 이번 공연장에서는 2013년 <베르테르> OST는 구할 수 없었다. 왜지? 혹자는 "공연 보러 많이 오라고 안 만든 게 아닐까"라는데, 할 수만 있다면 꼭 구하고 싶다. 몇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다음의 롯데와 베르테르를 또 기약할 수 있게.

아, 그리고 기사를 쓰게 되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 두 가지. 내가 2002년 3월에 본 공연에서 롯데는 분명 추상미였는데, 베르테르는 누가 맡았는지 사실 잘 기억이 안 났다. 그런데, 자료를 확인해 보니 엄기준·조승우 더블 캐스팅이었다는 거. 그리고 알베르트 역은 이석준이었는데, 바로 지금 추상미의 남편이라는 거.
#베르테르 #전미도 #엄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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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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