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고택,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로 격상

인근 한국산림고교 교정의 보물 52호 통일신라 쌍탑도 볼 만

등록 2013.12.16 20:46수정 2013.12.16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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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산고택 ⓒ 정만진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동길 21-19의 만산고택(晩山古宅)이 지난 12월 12일 중요민속자료 279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경상북도 민속자료 121호였던 만산고택은 이로써 국가 지정 문화재의 반열로 올라섰다. (아래 표 '문화재의 종류' 참조)

문화재의 종류
1. 국가 지정 문화재
국보 : 보물 중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유례가 드문 것 : 훈민정음 등
보물 :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 : 갓바위석불 등
사적 : 기념물 중 중요한 것 : 달성토성 등
명승 : 기념물 중 경치가 뛰어난 것 : 해인사 등
천연기념물 : 기념물 중 동식물, 광물로서 중요한 것 : 대구 도동측백수림 등
중요민속자료 : 민속자료 중 중요한 것 : 안동하회마을 등
중요무형문화재 : 무형의 문화유산 중 중요한 것 : 양주별산대놀이 등


2. 시도 지정 문화재
유형문화재 : 건물, 서적, 회화, 조각, 공예품 등으로 역사상, 예술상 가치가 큰 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자료 : 경상감영 선화당 등
기념물 : 사적자료로서 역사상, 학술상 가치가 큰 것, 경승지로서 예술상, 관람상 가치가 큰 것 및 동식물, 광물, 동굴 중에서 학술상 가치가 큰 것 : 신숭겸유적지 등
민속자료 : 의식주, 생업, 신앙, 연중행사 등에 관한 풍속, 관습과 이에 사용되는 의복, 기구, 가옥 등 국민생활의 추이를 이해하는 데 불가결한 것 : 문씨세거지 등
무형문화재 : 연극, 음악, 무용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 중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큰 것 : 고산농악 등

3. 문화재자료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 중 향토문화 보존상 시도지사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것 : 관풍루 등

4. 등록문화재
근현대(100년 이내)에 형성되었으나 보존가치가 큰 것을 문화재청장이 지정 : 조양회관 등

5. 비지정문화재
문화재보호법 또는 시도 조례에 의해 지정되지 않았으나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

만산고택은 조선 말기 문신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와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지냈고, 만년에 도산서원장을 역임한 만산 강용(晩山 姜鎔, 1846~1934) 선생이 1878년 건립한 건물이다. 본채 좌측에 서실을 두고, 우측에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별채를 배치한 까닭에 솟을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전형적인 사대부 집의 풍모를 흠뻑 느껴진다. 특히 'ㅁ'자형 본채는 경북 북부 지방의 폐쇄적 문화를 보여주는 주택 구조로, 경북 남부 지방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안채로 출입할 때 사랑채 우측의 신주를 모셔둔 감실(龕室) 뒤편 중문을 사용하게 한 측면출입형(側面出入形) 설계 또한 19세기 경북 북동부 전통 반가(班家)의 전형이다. 고택의 '晩山(만산)'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며, 서실 처마 밑 '翰墨淸緣' 편액은 영친왕이 8세 때 쓴 글씨로 알려진다. '한묵청연'은 글로 좋은 인연을 맺자는 뜻이다.


별채의 이름은 칠류헌(七柳軒)이다. 칠류헌은 조선 말기에 영친왕을 비롯, 많은 문인들이 학문을 토론하고 시정을 읊은 장소로 유명하다. 이래저래 만산고택은 주거 민속 등 전통 주(住)생활 문화를 잘 보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적류도 3천500여 점 소장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아 이번에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고택 솟을대문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은 만산이 1910년 이후 마을 뒷산에 망미대(望美臺)를 쌓고 그곳에 올라 나라를 잃은 슬픔을 시로 읊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망미대의 '미'는 물론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 가리키는 것처럼 임금을 상징한다. 즉, 망미대는 임금[美]을 그리워하면서[望] 망국의 슬픔을 읊은 곳[臺]라는 뜻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그가 남긴 시를 찾아서 읽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멀리서 찾아온 방문객을 위해 고택 앞 안내판에 우국시(憂國詩)를 적어 둔다면  금상첨화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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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산고택 ⓒ 정만진


문화재청이 분류한 '문화재의 종류'에 따르면 중요민속자료는 민속자료 중 중요한 것이고, 보물은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이다. 중요민속자료와 보물은 대략 같은 등급 정도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따라서 만산고택을 요모조모 다 둘러 보았다고 해서 곧장 마을을 떠날 수는 없다. 같은 마을 안에 다른 '보물'이 있기 때문이다.

만산고택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접어들면 한국산림고등학교가 나온다. 교문으로 들어가 오른쪽을 바라보면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쌍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나의 대웅전 앞에 좌우로 쌍탑이 지어진 시초는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 때 완성된 경주 감은사이다. 즉, 이곳에 쌍탑이 남아 있는 것은 한국산림고등학교 교정이 본래 사찰이 존재했던 유허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사찰의 이름은 남화사(覽華寺).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676년(문무왕 12) 원효대사가 이곳에 있던 남화사를 폐찰하면서 8km가량 떨어진 곳으로 옮겼고, '남화사를 생각한다'는 의미로 그 절의 이름을 각화사(覺華寺)로 정했다고 한다. 뒷날 각화사는 태백산 사고(史庫) 관리 업무를 맡았는데, 한때는 승려가 800명이나 머물렀던 조선 3대 사찰로 번성한다. 그러나 1907년 의병 전투가 각화사에서 벌어지면서 법당 등 대부분이 불에 타 사라진다.

처음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쌍탑은 13.5m 간격을 두고 떨어진 채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동탑은 3.85m, 서탑은 3.94m 높이로 석가탑을 닮은 모습이다. 그래서 국가 지정 보물 52호의 영예를 얻었다. 하지만 현지의 안내판이 '9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효대사가 각화사를 중창했다는 전설을 올곧이 믿기는 어려운 듯하다.

아무튼 교정에 이렇게 보물 쌍탑이 서 있는 정경은 보기 드문 구경거리이다. 누가 어느 종교를 믿느냐와는 상관없이, 문화재가 학교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교육적으로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게다가 탑 둘레는 소나무들까지 잘 조경되어 있다. 학교는 탑 주변 소공원에  청운원(靑雲園)이라는 멋진 이름까지 붙여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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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52호 서등리 쌍탑 ⓒ 정만진


#만산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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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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