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군 사회문화단체 기자회견항일광복지사 문병석 선생의 공적을 현창하기 위한 태안군 사회문화단체들의 합동 기자회견이 17일 오전 11시 태안군청 브리핑 룸에서 열렸다.
지요하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북접(北接) 동학군의 최초 기포지(起泡地)였고 처절한 최후 항전지였던 우리 고장 태안에서 3·1만세운동 당시에는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을 의아히 여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곧 이해할 수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던 주민들 거의 모두가 목숨을 잃었거나 만주와 해외, 외지로 도피를 하였기에 우리 고장에서는 만세운동을 주도할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또 동학농민혁명군이 거세게 기포했던 곳이라 일제의 사전 감시도 심한 탓이었다.
그런 조건 가운데서도 우리 고장 태안에는 항일감정과 민족정신이 면면히 흘러 일본인들이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한 고장으로 남았다. 일본인들이 크게 행세하지 못한 큰 동네는 개성이요, 중간 동네는 강화요, 작은 동네는 태안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그동안 우리 고장을 대표하는 이름 있는 광복지사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원북면 방갈리 출신으로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신 옥파 이종일 선생, 동학농민혁명 이후 해외로 도피하여 미국에서 항일광복운동을 하신 남면 출신 우운 문양목 선생, 또 안면읍 승언리 출신으로 대한광복군 서산군지단장을 지낸 이종헌 선생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분들 외로 또 한 분, 원북면 방갈리 출신이신 문병석(文秉錫) 선생이 우리 고장 항일광복투쟁사의 큰 별로 떠오르게 됐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을 기점으로 무려 94년 만의 일이다.
지난 12일치 <태안신문>은 제8면의 '인물'란에 문병석 선생 관련 기사를 크게 보도했다. 최근 주일한국대사관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서류뭉치를 주일대사관이 외교통상부를 경유하여 본국 국가기록원에 이관함으로써 밝혀지게 된 사항이다. 국가기록원은 서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3·1만세운동 피살자 명부 안에 들어 있는 이름들을 지역별로 상세히 발표했다.
<태안신문>의 김동이 기자는 국가기록원이 발표한 명단 안에 우리 고장 출신 문병석 선생이 들어 있음을 알고 발 빠르게 취재를 하여 자세히 보도를 한 것이다. 김동이 기자가 발휘한 신문기자로서의 기민성, 남다른 감각과 안목에 감사와 상찬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