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름만 닦고 환부를 도려내지 못했다.'
대선개입 사건으로 지난 1년간 뉴스의 중심에 섰던 국가정보원에 대한 국회의 첫 수술 평가다. 2013년 12월 31일,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정치적 중립성 강화를 위한 제도개선특별위원회(아래 국정원 개혁특위)'는 가동 23일 만에 결과물을 내놨다. 여야가 연거푸 합의 시한을 넘기면서 진통 끝에 마련한 성과물이다.
▲ 국회 정보위원회 전임(상설)상임위화 및 국정원 예산심사 강화 등 국회 통제권 강화 ▲ 국정원 직원 '정치개입 지시 거부권' 부여 및 '내부고발자' 보호 강화 ▲ 국정원·군·경찰·일반 공무원 정치관여죄 형량 강화 및 공소기간 연장 등 일부 개혁 법안에 대해서는 일부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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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수하는 정세균-남재준 31일 오전 국회 국정원개혁특위에 출석한 남재준 국정원장이 정세균 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여야는 이날 특위에서 국정원 직원의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정치활동 관여를 금지하고 위반할 경우 처벌토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국정원 개혁안을 의결했다. ⓒ 남소연
그러나 특위 구성 목적이었던 국가 정보기관의 정치·선거개입 행위를 근절하기에는 미비하다는 평가가 먼저다.
먼저, 여야는 대선개입 사건의 '모태'인 국정원 사이버심리전을 원천적으로 금지시키지 못했다. 국정원 직원의 국내 정치 개입 근절 방안 중 하나인 '국정원 정보관(IO)의 정부기관 등 상시출입 금지' 여부에 대해서도 물음표가 찍혔다.
'대선개입' 사이버심리전 존치하고 '위법' 국내정보수집 내규로 제한한다?
사실, 국정원의 사이버심리전은 여태껏 드러난 정치·선거개입 혐의만으로도 존폐를 논해야 할 사안이었다.
그러나 여야는 정치관여 금지를 명시한 국정원법 9조에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정치관여 행위를 금지한다"는 항목을 신설하는데 그쳤다. 국정원이 지난해 총·대선 당시 인터넷 댓글·트위터 등을 이용, 야권 및 야당 정치인들을 비방하고 4대강 사업 등 정부 정책을 홍보했던 것에 대한 '방지책'이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도 적시하지 않았다. 법 개정에 따른 해석에 따라,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이 기소된 현재 재판 상황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다만, 야당은 이날 국정원 개혁특위 전체회의에 출석한 남재준 국정원장을 향해 "정치활동에 관여하거나 여론 조성 목적으로 정부 정책 홍보 부서를 운영하지 않겠느냐"고 질문, 남재준 국정원장의 답변을 '기록'하는 것에 그쳤다. 남 원장은 해당 질문에 "원래 그런 부서가 없다"면서 "네 분명히 답변드릴 수 있다"고 답했다.
국정원 정보관(IO)이 정부기관·국회·정당·언론사 등을 상시 출입하며 국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금지하는 개혁방안 역시 미약하다는 평가다. 이는 야권 및 시민사회에서 요구했던 '국내파트 폐지' 요구와 맞닿아 있다.
이와 관련, 특위 여야 간사인 새누리당 김재원·민주당 문병호 의원은 "국정원이 다른 국가기관과 정당, 언론사 등의 민간을 대상으로 법률과 내부규정에 위반한 파견·상시출입 등 방법을 통한 정보활동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 업무수행의 절차와 방식은 내부 규정으로 정한다"는 내용을 법에 명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장 특위 위원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전해철 민주당 의원은 이날 전체회의에서 "다른 법체계를 보더라도 (다른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는 병렬적으로 명시하고 있는데 여기는 빠져 있다"며 지자체 출입 금지 여부를 우려했다. 이에 새누리당은 "해석상 지자체도 포함되는 것"이라며 "입법 후 해석은 운영자에 따른 것"이라고 뭉갰다.
국정원이 마련할 내부규정에 따라, 상시출입 업무수행 절차와 방식을 정하겠다는 것도 논란 대상이다. 현행 국정원법 3조에는 국내 대공·대정부전복·방첩·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 관련 정보만을 다루도록 명시돼 있다. 그동안 이를 어기고 활동하던 국정원의 국내 파트 활동을 바로잡지 못하고 국정원에 '주도권'을 내줬다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당장 남재준 국정원장은 이날 전체회의에서 "세부 규정 마련에 시한을 못 박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는 특위의 '1월 말 내부규정 마련 요구'에 대해 "여론도 수집하고 전문가 의견도 정리해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다,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겠지만 시한을 못 박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병호 민주당 의원이 "가급적 1월 말까지 제출하라"고 재차 요구했지만, 남 원장은 "시한을 못 박지 않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국정원 '셀프개혁안'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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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재준 "곤혹스럽지만 국회 결정 존중" 31일 오전 국회 국정원개혁특위에 출석한 남재준 국정원장은 국정원 개혁법안이 채택된 데 대해 "정보활동에 대한 법적 규제에 곤혹스러움을 금치 못하지만, 이번 국회 결정을 존중하며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오른쪽은 김관진 국방부 장관. ⓒ 남소연
지난 12일 제출된 국정원의 '셀프개혁안'과 비교할 때도 큰 변화가 안 보인다.
먼저, 국정원은 '셀프개혁안'에서 사이버심리전 유지 의사를 밝히며 "북한 지령, 체제 선전선동 및 대한민국 정체성 부정 등 방어심리전 소재에 제한해 (심리전을)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또 "특정정당이나 정치인 관련 내용은 금지하겠다"고 했다.
현재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정치활동 금지'를 명시한 국정원 개혁특위의 사이버심리전 관련 규정은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국정원 정보관(IO)의 정부기관 상시 출입 금지' 역시 마찬가지다. 국정원은 '셀프개혁안'에서 정보관(IO)의 국회·정당·언론사 상시 출입제도를 폐지하겠다고 했다. 국정원 개혁특위는 '다른 국가기관 등'을 추가, 그 범위를 조금 더 넓히는 데 그쳤다. 세부적인 업무수행 절차와 방식 규정도 국정원에 맡겼다.
'국정원 직원 정치개입 지시 거부권 법제화' 방안 역시 실효성 논란이 예상된다. 특위는 거부권 행사 방법에 대해 "(국정)원장이 정한 절차에 따라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며, 시정되지 않을 경우 그 직무의 집행을 거부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또 "(정치개입 지시 등에 대해) 이의제기 절차를 거친 후 시정되지 않을 경우" 해당 사실을 수사기관에 신고, 내부고발자로서 공익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명시했다.
국정원 직원에게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줬지만 그 행사 방법은 국정원 내부 절차를 따르도록 한 셈이다. 앞서 논란이 됐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등을 감안할 때, '고양이에게 생선 맡긴 꼴'이라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앞서 국정원이 셀프개혁안을 통해 정치개입 지시 거부를 위한 부당명령 심사청구센터 및 적법성 심사위원회 설치·운영 방침을 밝혔을 때도 똑같은 논란이 일었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이날 전체회의에서 "향후 직원이 자의적으로 상부 지시를 정치개입 행위라고 판단하고 직무집행을 거부하고 어디에 신고할 경우가 생길텐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유기준 새누리당 의원의 질문에 "(자의적으로 행사한다면) 국정원의 위계질서 체계가 붕괴될 것"이라며 자체개혁안에 명시된 내부절차를 밟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시민사회 "재발 막으려면 국정원 기능 변화시켜야... 민주당 치밀하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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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 나누는 김재원-문병호 3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개혁특위에서 새누리당 김재원, 민주당 문병호 간사가 머리를 맞대고 국정원 개혁안 처리를 논의하고 있다. ⓒ 남소연
현재 민주당은 이 같은 개혁안을 한계 속에서 거둔 성과로 자평하고 있다. 특위 야당 간사인 문병호 의원은 이날 오후 기자간담회에서 "정부나 국가기관이 조직과 예산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법적근거를 갖고 업무를 수행해야 함에도 국정원의 사이버심리전 활동은 법적 근거없이 이뤄져왔다"며 법적 처벌 근거 마련 취지를 강조했다. 또 "국회의 국정원 통제권 강화, 내부 직원의 직무수행 거부권 및 내부고발자 신분 보장 제도 도입한 것이 큰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그는 "당초 민주당이 대공수사권 이관이나 국내파트 분리, 보안업무 기획조정 기능 이관 등 큰 의제를 제시했지만 (지난 3일 여야 4자 합의 당시) 합의된 내용은 국회의 국정원 통제권 강화, 정치관여 처벌 강화에 국한됐다"면서 "(대공수사권 이관 등은) 1, 2월 논의돼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민사회 쪽은 이번 합의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박주민 변호사는 이날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사이버심리전은 현행법으로 금지돼 있고 내부직원의 지시 거부권 행사 등도 판례 등으로 보장돼 있다"면서 "대공수사권 폐지 및 국내정보수집 이관 등 국정원의 기능 변화가 있어야 정치·선거개입 행위 재발을 막을 수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국회의 국정원 예산심의 강화 등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이 역시도 국정원의 정보 및 보안업무의 기획조정 업무를 조정하는 게 근본적인 해법"이라며 "4자 합의 당시 대공수사권 폐지 등 의제를 빼버린 것이 문제였다, 민주당이 성과를 내는데 급급해서 전략적인 측면에서 치밀하지 못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역시 "이번 개혁안은 국정원 운영 개선에 불과하다, 국정원이 작전부서인 심리전단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며 "이번 합의안은 재발방지대책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그는 "야당이 이해되지 않는다, 특검도 연계하지 않고 특위를 합의하더니 개혁안 내용도 부실하다"면서 "사이버심리전단은 법적인 근거도 없는데 그것을 인정해줬으니 무슨 개혁안이라고 할 수 있겠나"라고 비판했다.
국정원 개혁특위 2라운드, 개혁 못하고 '덩치'만 커진다?
특위가 향후 활동과정에서 오히려 국정원의 '덩치'만 키워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새누리당은 내년 2월 말까지 예정된 특위 활동을 통해 대테러 대응능력, 해외 및 대북 정보능력 등 실질적인 정보기능 강화방안 마련에 힘쓴다는 전략이다. 휴대전화 감청 기능 부여, 사이버테러방지법안 처리 등도 요구하고 있다. 반면, 민주당은 이번에 논의하지 못한 대공수사권 문제 등을 다루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특위 여당 간사인 김재원 의원은 이날 전체회의에서 "이번 협상과정이 순전히 저는 '슈퍼갑(甲)'한테 얻어맞으며 양보만 하다 끝났다, 내년에는 제가 '슈퍼갑'으로 다시 등장할 수 있기를 빌어본다"며 강공을 예고했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국정원 개혁법안 의결 이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정보활동의 보장임에도 이를 법으로 규제하는 것에 대해 곤혹스럽다"면서 국정원 기능 확대를 주문했다.
그는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국정원 본연의 업무를 위해 통신비밀보호법, 대테러방지법, 사이버테러방지법 등 필수 법안의 통과에도 관심을 기울여 달라"며 "국정원 제도 개선 조치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아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조직으로 국가안보를 수호하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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