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배우고 깨치다니

등록 2014.01.04 09:41수정 2014.01.0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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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야, 너 숫자 쓸 줄 알아?"
갑자기 궁금해졌다. 두 달 뒷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아이가 10까지는 쓸 줄 아는 건지.


"어, 나 숫자 100까지 쓸 줄 알아."
"진짜? 그럼 어디 써 봐."

제대로 가르친 적도 없는데 막내 녀석이 써 보았자 얼마나 쓸까 생각을 했다. 녀석에게 숫자를 쓰라고 했지만 나는 녀석이 유치원에서 눈싸움하느라 잔뜩 더럽혀 온 바지를 물걸레로 닦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한 참이 지났다.

"엄마, 봐 봐. 나 잘 쓰지. 100까지 썼잖아."

a 아이가 숫자 100까지 쓴 공책 중간에 숫자 2와 숫자 3 숫자 5가 방향이 바뀌었다.

아이가 숫자 100까지 쓴 공책 중간에 숫자 2와 숫자 3 숫자 5가 방향이 바뀌었다. ⓒ 강정민


정말 대단하다. 노트에 보니 숫자들이 빽빽하고 진짜로 100까지 썼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자세히 보니까 중간에 숫자 2, 숫자 3, 숫자 5도 방향이 틀렸다. 그럼 그렇지.

"야, 이게 뭐야 틀렸잖아."


일단 숫자 10까지 쓰는 걸 써 주고는 아래 줄에 따라 쓰라고 시켰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 가기 전에 한글도 다 떼고 학교에 가는데 나는 입학할 준비를 너무 안 시킨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사실 이렇게 느긋한 것은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이 한글이니 숫자 공부를 안 시키는 발도르프교육을 하는 '푸른숲 아이들의집'이라서 그렇다.

유치원에서 인지 학습을 안 시키니 유치원 엄마들도 공부에는 통 관심이 없다. 옆에서 엄마들이 아이 공부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조바심이 날 텐데 그런 모습을 보지 않으니 조바심이 날 기회가 없다.


사실 일도 많은 부모협동조합의 '푸른숲 아이들의집'에 아이를 보낸 것도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유치원 때부터 시작되는 빠른 학습으로 인해 이 시기 아이들이 꼭 해야 하는 것을 못 하고 지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나도 막연하지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손도 놓고 있었는데 이제 입학이 몇 개월 안 남았으니 바짝 가르쳐야 하겠다.

"1 더하기 1 은 뭐지?"
"2"
"그렇지. 엄마가 덧셈 적어 줄 테니까 맞춰 봐."

쉬운 덧셈을 해 보라고 몇 개 적어 줬다.
<1+2= , 2+5= .........> 아이는 손가락을 사용해서 열 개의 문제를 푼다.

아이가 쓴 답을 보니 다 맞았다. 다 맞았다고 칭찬을 했다. 그랬더니 이 녀석이 "이런 게 덧셈이야? 완전 쉽네. 더 어려운 것 좀 내 봐. 너무 쉽잖아." 한다. 목소리에도 잔뜩 힘이 들어갔다. 눈꼴이 시다. 아이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춤을 추고 집안을 돌아다닌다. 신기하게도 생각보다 잘 푼다. 숫자는 똑바로 못 쓰면서 계산을 어찌 저렇게 잘하는지 의아하다.
그때 마침 언젠가 선생님이 했던 말들이 생각이 났다.

"우리 아이들이요 따로 배우지 않았는데도 계산도 잘해요. 간식 도우미를 하잖아요. 그러면 친구들 간식을 똑같이 나눠줘야 하는데, 그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거든요."

a 발도르프 어린이집에서 하는 활동들 수채화그리기, 별 만드는 바느질, 밀랍으로 초꾸미기, 날적이 공책

발도르프 어린이집에서 하는 활동들 수채화그리기, 별 만드는 바느질, 밀랍으로 초꾸미기, 날적이 공책 ⓒ 강정민


어린이집에서 하는 '도우미'는 우리 아이들이 참 하고 싶어 하는 거다. 무슨 벼슬처럼. 그 날 도우미 두 명은 그 날 아침에 결정하는데 도우미가 할 일은 친구들을 위해서 간식도 나눠줘야 한다. 도우미는 보통 일곱 살이 한다. 그런데 감기에 안 걸려야만 할 수 있다. 아이들은 도우미를 하고 싶어서 안달한다. 그래서 엄마한테 감기가 다 나았다고 선생님께 말해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도우미니 도우미 일을 잘하고 싶어서 얼마나 노력을 할까?

"예를 들어, 오늘 친구 한 명이 안 나왔다. 그러면 계산을 하는 거예요. 원래는 17명인데 오늘 결석한 친구가 한 명이면 16명 그런데 건빵을 3개씩 나눠줘야 하잖아요. 그러면 그거 계산을 하느라 손가락 발가락까지 사용하면서 땀을 흘리면서 계산을 해요. 얼마나 진지하게 계산을 하는지 몰라요. 옆에서 <틀렸다. 맞았다> 하면서요. 우리 아이들은 도우미 하면서 덧셈 뺄셈을 다 배워요."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상황이 지금 이 상황인 걸까? 좀 더 어려운 덧셈 문제, 더해서 두 자리 수가 되는 문제를 냈다.

<2+9= ,3+8= ...,...> 이번에는 열 문제 중 하나만 틀렸다. 그러면서 하는 말 더 너무 쉽다면서 어려운 문제를 내란다.

열심히 문제는 푸는 아이 얼굴이 자못 심각하다. 자세만은 고등학생 형에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 푸는 아이는 간혹 숫자를 잘 못 쓴다. 아라비아 숫자는 잘 못 쓰면서 덧셈 문제만은 척척 잘 푸는 아이가 우습다. 우리 어린이집을 졸업하는 아이들이 모두 다 우리 집 막내 녀석처럼 계산을 척척 다 잘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간식 도우미 활동이 수 체계를 세우는 데는 큰 역할을 했다는 판단은 든다. 산수도 이렇게 실생활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노트 속의 반복되는 계산 통해서 배우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방식일 것이다.

덕분에 이번 방학 때 할 일이 줄어서 참 좋다. 살다 보니 이렇게 거저먹는 일도 다 생기니 기쁘다.

덧붙이는 글 푸른숲아이들의집 누리집 입니다. (http://cafe.naver.com/hanamigreenforest/)
#푸른숲아이들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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