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소의 창 밖으로 보이는 바릴로체 호수의 모습.
김동주
계단을 따라 피어난 녹색 들꽃에도 정이 드는 걸 보니 떠날 때가 되었나 싶었다. 다음 여정은 아르헨티나를 떠나 칠레의 수도로 가는 것이었다.
"돈 계산을 잘못 했나 봐. 아르헨티나 돈이 없어."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준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들은 뒤 한바탕 잔소리를 끝낸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숙소 주인에게 내일 떠남을 알렸다. 발걸음을 멈춘 지 사흘째에 찾아온, 아르헨티나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우리는 저 푸른 호수를 눈에 담기로 한 것이다.
바다 대신 호숫가에서 일광욕을 즐기기로 유명한 아르헨티나를 만든 장본인인 바릴로체의 크고 작은 호수들은 한 번 본 사람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강한 인상을 머리 속에 남긴다. 이미 오래 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바릴로체 마을 외곽의 크고 작은 호수들을 구경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높은 데서 한눈에 바라보고자 우선 캄파나리오 언덕(Cerro Campanario)에 오르기로 했다.
▲ 캄파나리오 언덕 전망대에서 굽어보는 안데스의 전경.
김동주
단돈 만 원이면 케이블카로 오를 수 있지만, 최소한의 돈만 남은 우리는 결국 또 한 번 기어서 언덕을 올랐다. 고작 높이 550m의 캄파나리오 언덕은 지친 두 여행자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고, 그 고통은 전망대로 실려오는 바람에 고스란히 날아가 버렸다. 안데스는 파타고니아 북쪽의 어느 작은 마을에 환상과도 같은 비경을 숨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꼭대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비경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심신이 절로 평온해졌다. 크고 작은 호수를 감싼 세로 로페스(Cerro Lopez)와 세로 카테드랄(Cerro Catedral), 그리고 자오자오(Llao Llao) 반도는 한 폭의 그림을 만들고, 멀리 보이는 설산은 하늘과 호수를 구분하라고 누군가 만들어 놓은 것만 같은 완벽한 입체감을 선사한다. 전망대 한쪽에 자리한 카페에서 이 풍경을 충분히 기억할 만한 커피 한 잔을 즐길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흠이었다.
▲ 바릴로체의 낮기온은 일년내내 따뜻하기 때문에 일광욕을 즐기기에 적당하다.
김동주
호숫가에 발이라도 담가 볼 생각으로 우리는 언덕을 내려와 버스를 타고 호수로 이어지는 길에 도착했다. 자전거를 빌릴 돈조차 부족했던 우리는 어제 먹은 피자라도 뱉어내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저 언덕을 지나 숲길을 헤치며 걷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 머리를 간지럽히는 바람 한 줌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걸을 수 있는 가장 느린 속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평평하게 이어진 길을 걷는데도 무릎은 조금씩 삐걱거리고 있었지만, 마치 슬로 비디오처럼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들은 다른 모든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다리 아래로 펼쳐진 이름 모를 호숫가에서 살짝 발을 담근 호수는 시릴 듯이 차가웠지만, 그 풍경은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따뜻했다. 한켠에는 소문처럼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고 숲 속 여기저기에는 어느 부호들의 별장이 자리 잡았다.
미래에 대한 큰 걱정이 없는 회사에서 일하고, 조금 이른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을 꿈꾸는 한국에서의 삶은 이곳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들에게 걱정이란 그저 '오늘은 호수가 따뜻할까?' 정도가 아닐까.
▲ 푼토 파노라미코(Punto Panoramico) 에서 보는 모레노 호수의 전경은 최고다.
김동주
움직이지 않는 무릎을 재촉한 우리는 기어코 바릴로체의 호수를 감상하는 최고의 전망대라고 불리는 푼토 파노라미코(Punto panoramico)에 닿았다. 캄파나리오 언덕보다 한층 가까이서 바라보는 바릴로체의 모레노 호수(Lago. Moreno)는 머리 속을 맴돌던 모든 생각을 앗아갔다.
험한 산세와 곳곳에 아직 덮여 있는 눈을 배경으로 푸른 숲을 끼고 여기저기 구멍처럼 뚫린 호수들은 평화로움 그 자체다. 세상의 모든 파란색을 모아놓은 것만 같은 그 오묘한 파란 빛깔은 천국에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 원하는 만큼 이 캄파니리오 언덕에 머물 수 있다는 점이 그 순간 최고의 행복이었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지나가던 행인이 말을 건넸다. 여기서 마을로 돌아가는 버스는 한참 있어야 온다는 친절함에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 우리의 목적은 돌아가는 게 아니라 여기 앉아서 이 풍경을 바라보는 거라고. 어디선가 출발한 보트가 긴 꼬리를 그리며 그 고요함에 잔잔한 물결을 만들던 그 순간, 이 느낌을 한국에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나는 준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영상편지를 썼다.
▲ 세계 100대 호텔 중 하나인 야오야오 호텔과 하늘을 수 놓은 하얀 물체들.
김동주
스위스 루체른에서 봤던 그 투명하고 맑은 호수는 설산을 머금어 이보다 더 반짝였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토록 사람의 손에 잡히지 않을 것만 같은, 고즈넉함을 안겨주는 호수가 또 있을까. 끝이 없을 것처럼 펼쳐진 바릴로체 호수도 아름답지만, 여기저기 초록이 자리 잡은 숲과 그 사이를 그림처럼 이은 다리 그리고 100년 전통의 호텔 야오야오가 있어 더 운치를 더한다. 언감생심. 세계 100대 호텔 중에 하나라는 야오야오(Llao Llao Hotel)에서 보내는 하루의 가치는 어떨까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이 하나 늘었다.
돌아오는 길, 하늘 가득 흩날리던 정체 모를 하얀 물체는 내 눈에만 보이던 신기루였을까. 떠나야만 하는 여행자를 위로하는 바릴로체의 선물이었을까.
간략여행정보 |
남미의 스위스라 불리는 바릴로체에는 크고 작은 호수가 많지만 관광객들에게 의미 있는 곳은 마을 앞을 흐르는 나우엘우아피 호수와 버스를 타고 가야 닿을 수 있는 모레노 호수다. 호수의 전경을 보기 위해서는 나우엘우아피를 등지고 바위절벽 길을 오르거나 케이블카를 타고 캄파나리오 전망대에 오르면 되지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마을 외곽의 바이크숍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모레노 호수 둘레길을 돌아 보는 것이다.
모레노 호수 자전거 일주는 총25km로, 쉬는 시간 등을 고려한 공식일정은 코스에 따라 총 4~6시간이 소요되므로 늦어도 오전이 끝나기 전에는 바이크숍에 들러 장비를 빌려야 한다.(18시에 문을 닫는다.)
자전거를 빌리기 위해서는 마을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하며, 버스가 바로 가게 앞에 멈추기 때문에 찾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좀 더 자세한 바릴로체 호수 여행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173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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