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차 보면 움찔... 이런 투사 보셨습니까?"

[옥중 편지]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활동가 정대준씨

등록 2014.01.15 13:49수정 2014.01.15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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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활동가 정대준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활동가 정대준(42)씨의 모습

활동가 정대준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활동가 정대준(42)씨의 모습 ⓒ 정대희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활동을 하다가 구속된 활동가 정대준(52)씨가 '투사이고 싶으나 아직 그러나 못한'이란 제목의 옥중 글을 14일 송전탑반대주민대책위 사무실로 보내왔습니다. 다음은 정씨의 글 전문입니다.

<투사이고 싶으나 아직 그러지 못한>

2014년 1월 7일 오전 10시 10분에 저는 밀양시 상동면 고답공터에 서 있는 카고크레인 밑에서 밧줄로 목과 허리를 매고서 차량의 움직임을 막고 있다가 경찰들에게 개같이 끌려나와 체포되었고 지금은 구속 기소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가 대단한 투사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투사가 아닙니다. 저는 다리가 아픈 지제장애 5급의 장애인입니다. 깡마른 체격에 선천적으로 약골이라 살짝만 밀어도 넘어져 버립니다. 겁도 많아 쥐를 봐도 놀라서 도망칩니다.

이런 투사를 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전 투사가 아닙니다.

저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지만 운동권이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술 마시고 당구치며 놀았습니다. 지금껏 오십 년 넘게 살면서 경찰과 싸워본 것은 1987년 민주화투쟁 때 돌멩이 몇개 던져 본적이 전부입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실 저는 경찰을 무서워합니다. 요즘도 경찰차를 보면 나도 모르게 움찔 거립니다.


이런 투사를 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분명 투사가 아닙니다.

제겐 교사이면서 새누리당 당적의 울산시장을 좋아하는 아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교에서 늘 10등 안에 드는 고등학교 1학년 딸이 있습니다. 이런 투사의 가정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투사가 아닙니다.


저는 멋을 부립니다. 오십대인데도 불구하고 최신 유행하는 젊은 패션을 즐기며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듣기도 부르기도 합니다. 패션을 위해 수염을 기르고 늘 예쁘게 다듬습니다.

이런 투사를 봤습니까? 그래서 저는 투사가 아닌 게 확실합니다.

밀양에 온 지 100일이 지났지만 저는 아직까지 투사가 되지 못 했습니다. 단지 할매, 할배들과 함께 할 뿐입니다. 그들이 슬퍼할 때 함께 눈물 흘리고 그들이 분노할 때 함께 고함을 지르고 그들이 경찰과 싸울때 그들의 편에 서 주는 것입니다.

이번 고답 싸움도 무슨 대단한 결의를 가지고 시작한 게 아닙니다. 새벽에, 이슬 맞고 자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 차량 아래로 들어가서 잤던 것입니다. 근데 아침에 깼는데 그냥 나오는 게 멋쩍기도 하고 싫기도 해서 그대로 있었습니다. 조금 지나니 쉽게 끌려나가는 게 싫어서 밧줄을 달라고 했습니다.

밧줄로 몸을 묶다 보니 경찰들을 좀 더 힘들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목에도 묶게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계획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쩌면 전날 컨테이너 한 동이 설치된 이후 울분을 토하던 할배, 할배들이 대한 기억이 저를 그렇게 몰아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저는 투사가 아닙니다. 체포되고 난 뒤, 저의 행동을 돌아보았습니다. 순간의 감정을 자제하기 못해 이삼 개월이란 긴 시간동안 밀양의 할매, 할배들 곁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제가 참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고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 사건이 제법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밀양 싸움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냈고 밀양을 호의적으로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행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순간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한 것이 이렇게 좋은 반향을 일으킬 줄이야. 인생은 반전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제게 반전의 기쁨을 가져다 준 그 모든 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밀양으로 오는 2차 희망버스를 기대하며 이만 글을 줄입니다. 많이들 와 주세요. 밀양으로!

하늘 모르고 솟구치는 인기가 살짝 걱정되는 오십대 남자 정대준.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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