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산부인과>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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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퇴할 상황이 아니야. 그리고 꼭 그렇게까지 하면서 조산원 가야겠냐? ""응. 조산원 가서 낳고 싶어.""그냥 동네 산부인과 가. 남들 다 산부인과 가서 잘 낳잖아?""알았어. 알았다고."
남편은 회사 일로 바빠 조산원에 함께 못 가겠다고 했다. 결국 나 홀로 성남 친정집을 나섰다. 둘째를 임신한 나는 막달이었다. 게다가 가야 할 조산원은 부천에 있었다. 전화로 길을 물으니 송내역에서 내려 버스로 또 갈아타야 한단다. 2시간은 걸릴 길이다.
13년 전의 일이다. 계절은 8월 한여름으로 한창 더웠다. 출발한 시간은 오후 4시. 교대역에서 신도림행 지하철 2호선으로 갈아탔다. 한참을 가는데 술 취한 아저씨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아저씨가 자꾸 나를 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줄어들자 아저씨는 비틀거리며 문 앞에 섰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게 다가왔다. 술 취한 사람이 가까이 오니 솔직히 무서웠다.
"지금 어디 가요? 위험하게.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집에 가요. 내 동생도 지금 임신을 했어요. 동생 생각이 나서 그래요. 걱정돼서."횡설수설 혀 꼬부라진 목소리의 아저씨는 자기 몸도 못 가누면서도 내 걱정이 엄청나게 되었나 보다. 내가 얼마나 딱하게 보였을까? 배는 남산만 한 사람이 복더위에 혼자서 퇴근길 2호선을 탔으니 아마 직장 다녀오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아저씨는 "순산하세요" 하고 인사말을 남기고 내렸다.
둘째를 임신하면서, 이번에는 꼭 조산원에서 낳겠다고 다짐했다. 첫째의 산부인과 출산이 안 좋았기 때문이었다. 첫째 임신 때는 예정일이 많이 지났는데 출산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유도분만을 하러 날을 잡고 병원에 입원을 했다.
입원한 날 오전에 분만 촉진제를 맞았다. 그러나 분만 진행 속도가 다른 산모에 비해 느렸다. 나보다 늦게 분만 대기실에 들어온 산모가 나보다 먼저 아기 낳으러 분만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계속 지켜봐야 했다. 분만실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대기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오후 4시가 돼서야 분만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자궁 문이 충분히 열린 상태는 아니었다.
"올라가" 의사의 한마디에 간호사가 내 배 위로...
"올라가" 하는 의사의 한마디에 옆에 서 있던 묵직한(?) 간호사가 내 배 위에 무릎을 꿇고 올라앉았다. 순간 나는 너무 당황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하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말이 안 나왔다. 비명만 나올 뿐. 내 눈에 똑똑히 보이는 광경이 거짓 같았다. 내 배 위에 왜 올라갔는지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고 사전에 한마디 언질도 없었다. 분만 촉진제를 맞고도 아기가 나올 기색이 없자 간호사가 내 배 위에 올라가 아기를 내리누르고, 의사가 내 회음(음부와 항문 사이)을 절개해서 간신히 아기를 꺼냈다.
그리고 난 기절을 했다. 그리고 내가 정신이 돌아왔을 때 의사 둘이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회음을 꿰매고 있었다.
"어떻게 꿰매는 거라고?""이렇게.""어떻게? 안쪽에서? 내가 한 번 해볼게.""야! 너희들 지금 뭐 하는 거냐? 잘하는 놈이 해야지. 왜 못하면서 하겠다는 거야!" 하고 속으로는 수십 번 말했다. 차마 내뱉지 못했지만…. 의사 둘은 대화를 이어갔다.
"마취과 의사 한 명만 영입하면 딱 좋은데.""그렇지 그럼 우리 산부인과가 완벽하지."사실 내가 이 병원을 선택한 것은 '제왕절개를 쉽게 하지 않는 병원'이라는 지인의 극찬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왕절개를 안 했던 이유가 마취과 의사가 상근으로 없었기 때문이었단다. 출산 중 피를 많이 흘린 나는 언제 위험해질지 몰라 입원실로 올라가지 못했다. 분만대기실에서 잠을 자야 했다. 남편도 출산 중에 내 얼굴은 잘 보지도 못하고 '기절했다', '수혈한다' 하는 소식을 분만실 밖에서 들으며 마음고생이 많았다고 했다.
그리고 퇴원하는 날, 의사는 나를 보고 "일 년에 한두 명씩 고생시키는 환자 중 한 명이에요"라고 했다. 난산이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그런 안 좋은 기억 때문에 그 뒤로 나는 그 산부인과 앞으로 지나다니지 않고 먼 길을 돌아 다녔다.
'이제 와서 산부인과에 가라니...' 오기가 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