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하게 경찰·한전에 졌지만... 내일도 다시"

[현장] 송전탑 공사 저지에 실패한 밀양 어르신들

등록 2014.01.22 18:34수정 2014.01.22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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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경찰차량을 순순히 보내주고 작전을 펼쳤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 김종술


송전탑 갈등을 겪고 있는 밀양에는 지난해 10월 1일에 경찰이 들어왔습니다. 한국전력(아래 한전)이 송전탑 공사를 재개하면서 주민들과 공권력과의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110번·111번·112번 송전탑 공사가 진행 중인 상동면 고답·모정마을은 한전 작업차량을 공사장으로 들여보내려는 경찰과 이를 막아서려는 주민들 간의 전쟁이 매일 같이 치러지는 곳입니다. 한전 작업 차량이 공사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고정삼거리·매화다리를 건너서 모정마을을 통해야만 갈 수 있습니다.

22일 오전 6시. 어둠이 깔린 고정삼거리에 낯익은 할매할배들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모여듭니다. "할매 왔는교, 아제 나왔나, 오늘은 어찌해서 (한전 작업자) 잡아야 할긴데"라며 안부를 나눈 뒤 어르신들은 도로변에 모닥불을 피우고 전투(주민들은 경찰과의 충돌을 '전투'로 칭한다)를 준비합니다.

밀양 주민들, 각오 다졌지만... "오늘은 실패했지만 내일도"

22일은 전날과는 주민들의 눈빛이 다릅니다. 경찰 버스를 쉽게 보내 주는 것도 전날과는 사뭇 다릅니다. 주민들은 경찰이 떠난 도로를 다시 막아섭니다. 같은 시각, 2km 가량 떨어진 인근 매화다리 좌측 제방 쪽, 차량에 몸을 숨기고 추위에 떨며 시동을 끄고 있는 주민들이 있습니다. 건너편에도 차량을 타고 온 주민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화물 차량을 선두로 다른 차량 서너 대가 다리 건너편으로 들어섰다가 이상한 눈치를 챘는지 후진해 되돌아가 버립니다.

기다리다 지친 주민들이 하나둘 차량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는 "아제여, 망했어요, 아재 쪽에서 불을 피워서 눈치 까고 가버린 거 아닌교, 됐다 빨랑 (고정 삼거리) 저기로 가보자!"라며 황급히 고정삼거리로 모여듭니다. 포위망을 뚫고 공사장으로 들어간 차량 외에 25인승 미니버스 두 대와 승합차 네 대가 주민들에게 붙들려 옴짝달싹 못하고 도로 한쪽에 서 있습니다.

작업 차량을 막아선 주민들이 기뻐하기도 전에 상류로 올라갔던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옵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주민들을 한쪽으로 밀어붙이고 들어 옮깁니다. 그 사이로 작업자를 태운 차량이 유유히 빠져나갑니다. 결국, 어르신들은 오늘도 30분 정도 작업자를 잡고 늘어진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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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포위망 속에 작업 차량은 유유히 빠져 나갔다. ⓒ 김종술


현장에서 만난 여수마을 김아무개씨는 "오늘도 허무하게 경찰과 한전에 져 버렸다,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고 짜놓은 작전이 할매들이 춥다고 불을 피우면서 망가져 버렸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내일 또 나올 것"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전투가 끝나고 돌아가는 주민들은 하나둘 무용담을 꺼내놓습니다. "어젯밤에 그렇게 작전을 짰는데 아침에 매화 다리에서 불을 피워서 도망갔다, 안 그랬으면 다리 중간에 묶어 버릴 수 있었는데 아쉽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일부는 고답저수지 움막으로, 고 유한숙씨의 분향소로 향합니다.
#밀양 송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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