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의 출산, 그 '고통'에 무심했다

[공모-출산, 그 아름다운 이야기] 아름다워질 이야기를 위한 에필로그

등록 2014.02.04 09:51수정 2014.02.04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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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출산한 친구와 아기를 보기 위해 친구들 몇몇이 모여 거창에 다녀왔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인 같았던 그 친구가 아이를 낳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유기농 농사꾼이었고 곧 자유농법을 배울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기에 더욱 그랬다. 지난 해 1월 경까지 우리 집에 한 달 여 머물렀던 그가 아기를 낳고 사는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세상에 나온 지 2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아기는 이것들이 무언지 궁금하기라도 하다는 듯, 둘러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들을 올려다보며 방긋 방긋 웃었다. 조그만 입으로 하품을 해대고 엄마 젖을 물고 빼꼼히 쳐다보는 아기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산모인 친구는 아기를 병원에서 낳을 지, 조산사의 도움으로 낳을 지 고민했었고, 조산사를 불러 집에서 아기를 낳았다 했다.
아기 낳는 게 많이 힘들고 고통스럽다는데 그 과정이 어땠을 지 궁금했다. 산모는 대답을 짧게 했다. '그 순간 짐승이 된다'. 아기를 낳는 것을 지켜보았다던 아기 아빠의 짧은 말에도 무게가 실렸다. '(산모의 출산 과정에) 같이 있었던 것은 잘한 것 같다'고. 여성주의가 갖는 주제들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은 아기 아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지지받고 공감받지 못하는 여성의 출산환경에 대해 한마디씩 쏟아냈다.
하나의 생명을 세상에 보낸 귀함을 깨닫다
생각해보니 나 또한 산모가 외롭게 출산의 고통을 감내하곤 하는 현실에 대해서 성토만 했었지, 산모가 갖는 출산의 고통에는 무심했다는 걸 깨달았다. 친언니가 둘째를 낳을 때까지는 산모의 심리적 어려움과 신체적 고통보다는 태어난 아기의 신비로움과 기쁨에만 사로잡힌 기억이 남아있다. 30대 후반에 첫 아이를 낳게 된 동생이 조산원에서 아기를 낳을까 고민하다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았다. 출산과정에서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동생이 몸을 주체하지 못하며 고통스러워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동생의 출산 전후를 지켜보고서야 조금이나마 산모의 고통과 산모가 배려받지 못하는 출산환경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사회적으로 공감받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출산에 대한 이야기는 다수가 침묵해야 했을지 모른다. 산모와 아기에게 열악한 출산 환경이 바뀌지 않는 것은 보다 안전하고 편안한 출산의 필요가 침묵당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나의 엄마는 살아온 대부분의 생에 대해 침묵한 사람 중 한명이다. 아니 자신의 언어로 수차례 발설을 했겠지만 듣는 이가 없어서 침묵당한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고, 철없는 자식들은 엄마의 삶과 고통에 응해주기 버거웠다.
내가 엄마와의 대화를 시작한 것은 작년 5월 경, 혼자 거동하기 힘든 엄마와 목욕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말하면 뭐하냐....' 엄마가 내 질문에 마지못해 대답할 때 말꼬리를 흐리면서 하는 말이다. 내가 40대 중반이니 굴곡진 엄마 인생에 대한 공동의 책임도 40년 정도 분량이라면 맞을까. 엄마가 가슴에 뭉개진 화를 뒤로 하고 차분한 언어로 조금씩 입을 열자 엄마의 75년 인생에 대한 나의 궁금증에 발동이 걸렸다. 나는 태어난 지 40년이 넘어 나와 자매의 출산의 과정도, 서울인 줄만 알았던 내 고향의 지명도 알게 되었다.
언니가 세상에 나올 때는 엄마의 자궁안에서 양수가 터질 때까지 집에 산모를 돌볼 사람이 없었다. 셋방에서 혼자 진통하는 엄마를 집주인이 먼저 발견하고 '이러다 산모며 아기며 다 죽겠다'며 병원에 데려가서야 출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강원도 방산이라는 휴전선 전방에서였다.
태아였던 나는 세상에 나오기 위해 머리가 아래로 돌지 않았고 강원도 어느 도시의 병원 두 곳을 들려도 출산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엄마는 진통을 하며 (아빠와 함께, 엄마는 오래전에 남남이 된 아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택시를 타고 대관령을 넘어야 했다. 밤 11시 경 서울 남대문 한 병원에 도착해서 겨우 출산을 할 수 있었는데 역시나 머리가 아래로 돌지 않아 태아는 다리부터 나왔고 엄마의 질 입구를 많이 찢어야 했다(며 나를 흘겨봤다. 쩝.) 고 한다.
나는 며칠의 시간을 두어가면서 엄마에게 계속 물었다. 동생은 살던 동네에서 조산사를 하던 약국 아주머니가 받아주었다고 한다. 나는 세 자매의 출산 과정을 모두 알고 나서 무슨 오래된 비밀이라도 알게 된 양 후련했다. 엄마는 나의 출산을 가장 고통스럽게 기억하고 있고 그 후유증이 이제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엄마는 밤에 대관령을 꼬불꼬불 넘어 서울까지 운전해 준 '택시기사가 고생했을 거다'라며 고맙다는 인사를 못했다고 했다. '고맙다는 인사는 하고 살아야 한다' 며 작게 흔들리는 목소리에 여운을 남겼다.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엄마의 출산과 내가 태어난 현장에라도 다녀온 듯 이야기속으로 빨려 들었다. 엄마는 더 이상의 대답을 그만두기라도 할 것처럼 허탈해하며 이야기하곤 했지만 나는 엄마가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해소가 되는 부분이 있음을 느낀다.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들 가운데는 괄호 속에 넣어지는 부분들이 있다. 그 괄호 안은 오랜 동안 속앓이를 하며 살아온 엄마가 입으로 뱉어내기 버거운 대목이라는 것을 나는 감지한다. 나는 그동안 침묵당했고 '말해서 뭐 할 것도 없는', 엄마의 인생을 끄집어내며 그녀의 이야기를 이렇게 하나씩 주워 담는다.
나는 출산 경험이 없고 그 고통도 외로움도 잘 모르지만 아기를 낳은 엄마들의 출산 이야기들을 듣고 떠올리면서 하나의 생명을 세상에 내 보낸, 그리고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의 귀함을 마음에 새겨 본다. 우리 엄마가 오래 전에 출산했던 아기들이 성장해서 출산한 아기들도 이제 많이 컸다. 그 아기들은 어둡고 차가운 표정 속에 갇혀 있던 엄마를 환하게 웃게 했다. 태어날 때부터 고생시키고 화만 돋구(었다)던 나도 이제 엄마의 아이가 되었는지 같이 앉아 웃기도 하고 이야기 나누는 재미에 빠졌다. 그러면서 나는 그녀의 이야기와 지나온 삶에 공감해 간다.
2012년 각박한 도시생활에 대한 대안으로 마을이야기가 번져 갈 즈음 동네교육회관 로비에서 모르던 사람이 인사를 하는 경우가 생겼었다. 얼마 지나 협동조합이야기가 확산되면서 사람들이 모이면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좋은 먹거리, 좋은 가게, 좋은 배움터, 좋은 의료 등에 관한 것들이다.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들. 아직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들이 더 많이 남아 있는 듯하다.
거창 친구네 집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출산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조산원(사)이 좋아' '산모를 평소에 지지해줄 수 있는 관계망이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 먼저 필요해' '가족이 함께 하는 게..' '이모가 될 사람도 출산을 함께 경험해도 좋을 것 같아' (서민이 이용하기 쉬운)출산 전문병원이 생기면 출산하기 좋은 병원이 될 수 있을까 속으로 생각해 본다. 지치지 않는 수다와 운전자의 피곤이 섞인 가운데 이동마을은 서울로 향했다.
얼마 전 출산한 그 친구는 작지 않은 땅에 기계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지었었다. '한옥 집 짓기'를 배우기 위해 우리 집에 머물던 당시, 주말에는 밤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눈 내리는 날의 대폐질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1년 만에 다시 본 사이에 그는 아기엄마가 되어 있었고 손바닥 전체에 빳빳이 배겨있던 굳은 살이 거의 다 풀렸다. 출산 당사자들이 아름답다는 말에 동의할 지는 모르겠다. 아름다운, 아름다워질, 아름다워져야 할 출산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덧붙이는 글 출산, 그 아름다운 이야기 공모글 입니다.
#출산 #여성노동 #출산노동 #침묵당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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