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 증명도 없이 내란음모라니... "원통하다"

[주장] 민주주의 기본 상식과 법칙 어긴 '이석기 재판'

등록 2014.02.19 15:26수정 2014.02.1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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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언론에 공개된 '내란음모' 결심공판 3일 오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원천동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 사건 결심공판 모습이 역사적인 재판인 것을 고려해 시작전 10분가량 언론에 공개되었다.

언론에 공개된 '내란음모' 결심공판 3일 오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원천동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 사건 결심공판 모습이 역사적인 재판인 것을 고려해 시작전 10분가량 언론에 공개되었다. ⓒ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번 김용판 청장에게 무죄가 선고되었을 때 어떤 이들은 "증거가 쏟아져 넘치는 김용판 청장도 무죄인데, 유일한 증거인 녹취록조차 조작된 이석기의 내란음모혐의는 무죄일 것이리라"이라며 은근히 사법부의 상식적인 판결을 기대했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어리석은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재판부는 이석기 의원에게 징역 12년, 자격정지 1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이후 34년 만에 내란음모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법률적 차원의 문제를 논하기 앞서 과연 상식적으로 일개 국회의원이 130명의 당원과 내란을 음모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대한민국은 일개 국회의원의 강연으로 무너질 만큼 허약한 나라인가? 과거나 지금이나 내란음모가 불가능(내란음모사건은 대부분 재심에서 무죄로 판결되었다)하다는 것은 법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적 수준의 문제다. 하지만 이번에도 법률은 상식을 기만했다.

재판부는 검찰을 대신했다

검찰은 애초부터 피고인들에게 반국가단체 구성 및 가입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다. 이른바 RO(혁명조직)의 실체를 명확히 규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과의 연계도, 혁명조직도 없는, 마치 예수의 처녀수태와도 같은 '기적의 내란음모사건'이 탄생했다. 반국가단체와 내란음모는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관계이다. 부모의 성관계 없이 아이가 잉태될 수 없듯이 혁명조직 없는 내란음모도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반국가단체 구성혐의는 내란예비음모보다 중범죄이다. 반국가단체의 수괴, 즉 'RO의 총책'은 최고 사형이다. 살인과 강도를 동시에 저지른 범죄자에게 검찰이 살인혐의를 먼저 적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검찰은 피고인들에게 반국가단체 구성, 가입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다. 혐의를 입증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국가단체 혐의가 무죄가 되면 내란음모 혐의도 자동적으로 무죄가 될 수 있다. 둘 다 무죄가 나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검찰은 반국가단체를 포기하고 상대적으로 자신 있는 내란음모 혐의만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법리적 모순은 재판부에 의해 해결되었다. 재판부는 제보자도 직접 본 적 없고, 검찰과 국정원이 수개월 동안 찾지 못한 RO의 실체를 오직 법정과 자신의 사무실에서 검찰과 국정원이 제공한 증거만으로 입증하는 법률적 신세계을 보여줬다.


재판부는 이석기 의원이 "국회의원으로서의 선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대남혁명론을 따르는 RO의 총책으로서 내란을 선동하고 음모했다"고 판결했다. 또 재판부는 "이 의원이 130명 모여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불쾌감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모습, 이에 상응하는 김홍렬 피고인의 발언, 압수물의 내용, 제보자의 진술 등을 볼 때 총책에 상당하는 지위에 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강연에서 불쾌감을 거침없이 드러내면 혁명조직의 총책인가? 제보자도 법정에서 이 의원이 RO의 총책이라는 것을 단지 "추정"할 뿐이라고 증언했다. 재판부가 제보자의 진술을 '충분히 인정'했다면 재판부의 판단도 추정일 뿐이라는 것 아닌가! 압수물 중에 이 의원을 총책으로 명시한 내용이 있었다면 왜 검찰은 반국가반체 수괴로 기소하지 않았나? 법원은 흥신소가 아니다. 판사는 사립탐정이 아니다. 법정은 추정하는 곳이 아니라 입증하는 곳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단지 '추정'만으로 RO의 실체를 인정했다.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란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를 말한다. 하지만 검찰은 RO의 지휘통솔체제를 전혀 입증하지 못 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단지 이 의원이 김근래 피고인을 '지휘원'(변호인단은 '지휘원'이 아니라 '지금 오나'라고 주장하고 있다)이라 불렀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 RO의 지휘통솔체제를 인정했다.

'지휘원'(혹은 '지금 오나')이라는 단어가 RO의 지휘통솔체제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라면 적어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라도 의뢰해 과학적인 검증절차를 거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재판부는 오직 자신의 이어폰 성능에 모든 것을 의존했다. 대체 어떤 종류의 고성능 제품을 사용하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이어폰의 성능이 내란을 판정하는 희극적 현실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는 이번 판결을 "정당 해산을 끌어내기 위한 맞춤 판결이다. 제작주문은 박근혜 정권이 했다"고 비판했다. 국제엠네스티는 "재판과정에서 공개된 증거들이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을 계획하거나 선동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 우려한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도 "정부가 북한 웹사이트에 대한 접근을 막고 사람들은 북한 선동 내용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한국에서 과연 무엇이 내란모의가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고 보도했다. 김정운 부장판사는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재판하고 판결했다. 상식만을 더 보탰다"고 말했지만 김 판사의 '상식'에 동의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듯하다.

김 판사는 이 의원의 집에서 압수한 <진보적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자에 대해 "북한의 대남혁명론에 부합하는 이적표현물임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어쩌면 이 문장은 472쪽에 달하는 방대한 판결문 중 가장 중요한 문장일지도 모른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의 핵심쟁점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이 짧은 문장은 통합진보당 해산의 결정적인 근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재판부는 변호인단에게 RO나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변론준비 안 하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 판사는 공판 준비 2차 기일에서 "RO는 기소된 것이 아니고 반국가단체로도 기소하지 않았음으로 이에 대해서는 변론을 준비할 필요가 없"으며 변호인단이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해 전문가증인을 신청하겠다고 하자 "거기에 관심이 없다"며 기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판결문에서는 두 가지 모두 유죄를 인정했다. 과연 이러한 재판부의 이중플레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재판부는 변호인들을 교묘하게 따돌리고 검찰은 물론 헌법재판소의 업무까지 미리 대행했다. "거기에 관심이 없다"고 변호인들을 안심시킨 후 보란 듯이 뒤통수를 쳤다. 김 판사가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이러한 이중플레이를 했다면 그는 법률가가 아니라 뛰어난 연기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판사와 검사의 공조체제, 검찰과 사법부의 일체화를 경험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인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삼권통일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더 이상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아니다. 이제 민주공화국이라고 할 수도 없다. 김용판 무죄 판결에 이은 내란음모 유죄판결은 삼권분립의 마지막 잔해마저, 민주공화국의 아련한 추억까지 산산조각 내버렸다.

문재인 의원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침해는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연 누가 민주주의 질서를 침해했는가? 통합진보당과 130명의 내란음모자들인가? 아니면 정권수호를 위해 내부제보자(혹은 프락치)를 금품으로 포섭하여 녹취록까지 조작하며 내란음모사건을 기획한 국정원과 검찰인가?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최고 권력과 영합해 삼권분립의 잔해마저 산산조각 내버린 사법부인가? 진정한 위헌세력, 내란세력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부정하며 초법적 권력으로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현 정권과 그 협력자들이다.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의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4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만일 장지연이 지금 살아 있다면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논설도 똑같은 구절로 매듭지었을 것이다.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 <나홀로연구소> http://blog.naver.com/silchun615에 중복 게재됩니다.
#이석기 #내란음모 #문재인 #김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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