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품고 싸웠던 슈퍼맨 할아버지, 하늘의 별이 되다

평생 민주화 운동한 최승길 장로 별세... "염려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

등록 2014.02.28 13:47수정 2014.02.2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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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3년 6월 2일, <오마이뉴스>에 "악당 무찌르던 슈퍼맨 아버지가... 믿을 수 없습니다"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이 글을 읽고 많은 분이 같이 걱정해 주시고 염려해 주셨습니다. 폐암 4기로 짧으면 3개월, 길면 6개월이라던 판정이 9개월이 되고 10개월이 되면서 많이 나아지다가 갑작스럽게 지난 1월 24일 오후, 아버님께서는 하느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향년 75세. 이제 한 달이 겨우 지났습니다. 조문해 주신 분들 뿐만 아니라, 궁금하셨던 분들, 염려해주셨던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 아들 한결이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을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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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동에서 이 사진은 아마 6월 항쟁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전두환으로부터 연금해제가 된 후 외국에서 손님들이 오셨을 때 함께 찍었던 사진으로 짐작이 된다. ⓒ 최요한


한결아! 할아버지께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고 매일 말씀하시던 한결아... 너를 그렇게 예뻐라 하시던 할아버지께서는 이제 하늘의 별이 되셨단다. 우리 한결이, 은결이, 윤결이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많은 한결이 또래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저 하늘의 별이 되어 지켜보실 거야.

지금 한결이에게 쓰는 아빠의 이 편지는 어쩌면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한결이가 읽고 이해하기엔 어려울지 몰라. 하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기록을 남겨 두어야만 훗날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고 기록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를 자세하게 기억하고 또 이 시대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 무리해서 쓰는 것이란다. 그래야 한결이가 커서 이해할 수 있겠지?

5·3 인천사태와 할아버지의 유서

옛날에 할아버지께서 맞서 싸웠던 이는 '전두환'이 있었단다. 할아버지께서 전두환과 맞서 싸울 때 가장 힘주어 말씀하시곤 하는 싸움터가 바로 '5·3 인천사태'란다. 그때 당시 아빠는 굉장히 어렸고 잘 몰랐지만, 나중에 한 장의 사진을 통해서 이해하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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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인천사태 할아버지께서는 역사의 소용돌이 가운데 항상 가운데서 힘차게 싸우셨단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 사진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아카이브에서 우연하게 발견한 기막힌 사진이란다. 저기 왼쪽 아래 빨간 동그라미 속 사람 있지? 한결아! 바로 할아버지시란다. 꼭 지금의 아빠 나이였던 할아버지께서는 저기 인천사태, 당시 야당의 '직선제개헌 1천만 명 서명운동'의 맨 앞에서 활동하셨단다.

원래 민주통일민주연합운동(민통련)이 맨 앞장을 서기로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문익환 목사님이 오지 않으셔서(연금을 당하셨다고 한다) 할 수 없이 할아버지가 나섰단다. 할아버지께서는 당시 김대중 고문의 사조직인 '민주헌정연구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계셨단다.  2000여 명의 회원들이 이끌고 열심히 싸우셨다고 한단다.


이 시기는 바로 1986년 5월 3일, 전두환이 끓어오르는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고자 정치공작을 자행하던 시기였단다. 박종철이니, 이한열이니 하는 젊은 대학생들이 민주화의 제단에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암흑의 시대였고, 이런 젊은 대학생의 죽음에 대해 항상 안타까워하시던 할아버지도 품속에 항상 '유서'를 품고 싸우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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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유서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외출하실 때에는 이런 유서를 품에 품고 다니셨다. 참 잔인한 세월이라 할 수 있다. ⓒ 최요한

이번에 할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가 할아버지의 유서가 수 십장정도 우르르 쏟아져 나와서 잠시 아빠는 당황했다.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께서는 이런 유서를 여러 번 쓰시고 수 십장을 복사하셔서 언제든 생각날 때마다 가지고 나가신 것 같구나.

遺書(유서)


나. 崔承吉(최승길)은 全斗煥(전두환) 軍部(군부) 獨裁者(독재자)에게 民主化(민주화) 쟁취를 爲(위)해 투쟁하다가 살인마 全斗煥(전두환) 일당에게 살해 됐을 때.

나의 두 눈과 심장을 필요한 사람에게 팔아 우리나라의 외채 500억 불 중 일부나마 외채를 갚아 주기 바란다.

1985. 11. 4.
민주헌정연구회
운영위원장 최승길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선포해야 할 교회에 대하여

한결아! 할아버지께서는 오랜 기간 김대중 대통령을 모셨단다. 여기서 '모셨다'라는 말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닮고자 했고, 그 고난의 길을 걸었다는 것을 말한단다.

그 고난의 길을 걸을 때, 할아버지 주변에 있던 교회와 교회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한결이는 주변에 어려운 친구가 있으면 도와주겠지? 그런데 말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가르치는 한국의 교회는 그렇지 않았단다. 할아버지께서는 1974년, 요즘도 보기 드문 30대에 교회의 장로님이 되셨다. 하지만 교회는 외면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명확하게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회는 예수정신으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선포해야만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2년 후 한국지역난방공사 감사로 취임하셨다. 그전에는 그렇게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아부하러 왔는지... 상황을 잘 아는 아빠로서는 참 한심해 보이더라.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하늘의 별이 되시기 전에 주변을 꼼꼼히 정리하셨단다. 아빠에게는 돌아가시기 꼭 1주일 전에 카카오톡으로 '유언'을 남기셨고 (물론, 바보 같은 이 아빠는 그것이 유언인지 몰랐지),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는 교계의 껄끄러운 분들과 넬슨 만델라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말씀하시면서 정리하셨다고 주변 분들이 증언하시더구나.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그분들과 화해하셨다고 하니 아빠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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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카톡 아빠는 이 내용이 새삼스러웠지만 할아버지의 유언인지는 정말 몰랐다. 아직도 아빠의 핸드폰에 간직되어 있단다. ⓒ 최요한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껄끄러운 분들과 화해를 하셨다고 해서 문제는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아빠는 생각하고 있단다. 할아버지께서 2009년 12월 25일, 은퇴 장로로 추대되면서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를 정리하고 나오셨단다. 평생 교회 위해서 헌신하셨던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가서 그 교회로부터 내쳐졌다는 사실이 아빠를 괴롭게 하지만, 이제는 그냥 기억에서 지우려고 한다. 역사의식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들려줄게.

한결이가 크면 할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할까?

한결아! 75년 평생을 꼿꼿하게 사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이렇게 몇 장의 글로 어떻게 정리할 수 있겠니? 일본의 식민치하, 전쟁, 학살, 쿠데타, 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맞서 싸우셨던 할아버지께서 눈을 감으실 때, 한결이가 앞으로 커 나가야 하는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나 염려하셨을까?

아빠는 말이다, 아직도 충무로 백병원 앞을 지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린단다. 할아버지가 '슈퍼맨'이었던 이유는 독재정권의 주구들, 고문 경찰관들과 수사관들, 공안검사들에게 납치당해서 고문당할 때 원칙은 첫째로 묵비, 둘째로 단식, 셋째로 자해라는 것을 철저하게 지키셨고 또 외려 이를 무기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한결이는 이해하기 좀 어려울 거야.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렇게 당하고 충무로 백병원에 실려와 입원하셨고, 아빠는 아주 어린 나이에 쓰러져 계신 할아버지를 숱하게 보아왔거든...

사랑하는 아들 한결아! 할아버지께서는 하늘의 별이 되셨지만, 더 이상 묵비와 단식과 자해를 무기로 삼을 일이 없는 천국에 가셨단다. 여전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할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나라가 아니구나.

참! 아쉽고, 아쉽다. 이다음에 한결이가 커서 아빠의 이 글을 이해하게 될 때쯤 되면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가 될까? 문득문득 이런 꼴을 보면서 울컥하게 되지만, 우리 한결이 은결이 윤결이 얼굴을 떠올리며 아빠는 묵묵히 아빠의 일을 한단다. 이다음에 할아버지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아빠와 우리 한결이가 되자꾸나.

PS. 정승의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을씨년스럽다는 옛말이 꼭 맞더군요. 아버지께서 비록 '정승'은 아닐지라도 정치권은 참 할 말을 잃게 했습니다. 한자로는 '문전작라(門前雀羅)'라고 한다지요? 그럼에도 지금도 전국에서 조문을 못 와서 미안하다고 연락하는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아버님 이름으로 좋은 곳에 기부해 주십사 말씀 드렸습니다.
#최승길 #민주헌정연구회 #민주화투쟁 #슈퍼맨 할아버지 #5.3 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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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요한, 1969년 서울 산(産), 2000년부터 방송에 관심 있어 주변을 맴돌다 2005년 우연히 얻어 걸린 라디오 전화인터뷰부터 시사평론 방송시작, 2014년부터는 경제 Agenda에 집중, 시사경제평론을 하면서 몇몇 경제채널 출연하고 있음, 어떻게 하면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지 종일 고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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