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회] 네 안의 뜨거움을 다스리고 싶으냐?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 25] 노인

등록 2014.03.05 10:49수정 2014.03.05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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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무위도  無爲刀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으으으,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굳게 다문 입이지만 새어나오는 신음을 막진 못했다. 그는 지금 막 꿈에서 깨어났으나 눈을 뜨지 않았다. 꿈과 현실의 몽롱한 구름다리에서 그의 의식은 자꾸 멈칫거리고 있었다. 의식의 걸음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으나 고개는 자꾸 저쪽을 쳐다보고 있다. 철쭉 때문이다. 눈을 감은 채 그는 꿈에서 본 철쭉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환영인 줄 알지만 그 속에서 조금만 더 머물기를 바랐다. 그 바람이 곧 스러져버릴 줄 알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입안에 고이는 쌉쌀하면서도 들척지근한 철쭉꽃 맛과 함께 그의 눈앞에 천변의 풍경이 떠올랐다. 혹독한 겨울이 끝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천변에는 철쭉이 지천으로 피어났다. 겨우내 괴롭히던 이(蝨)를 털기 위해 누더기 옷을 철쭉 위에 펼쳐놓으면 슬금슬금 기어나온 이가 분홍빛 꽃 안으로 들어갔다. 잿빛 세상에 강렬한 색감으로 새로운 세상이 왔음을 알려주는 철쭉. 그 꽃을 먹을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배고픈 그에게 좋은 것이란 무조건 먹을 것이어야 했다. 그가 철쭉꽃을 꺾어 입에 대자, 아직 더 있어야 해. 같이 사는 형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철쭉꽃을 입에 넣고 씹었다. 넣고보니 이까지 씹은 것 같았다. 달콤하리라 기대했던 꽃은 쓰기만 했다. 그러나 철쭉꽃을 입에 넣은 그 봄 이후 그는 해마다 처음 피어나는 철쭉꽃을 먹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변엔 붓꽃이 피었다. 철쭉이 피고 붓꽃이 피어날 때까지. 그는 해마다 몸이 근질거렸다.

다음해인가 그 다음해인가. 그때도 때 이른 철쭉꽃을 씹었다. 그리고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다리 밑에서 거적을 뒤집어 쓰고 끙끙 앓았다. 사방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다. 자신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안 갔지만 살갗에 닿는 불길이 뜨거웠다. 뜨거워서 소릴 질렀다. 눈을 뜨자 웬 노인이 앞에 앉아 있다. 둘러보니 그가 거처하는 다리 밑 움막이 아니라 민가의 방이다. 구석에 밥상이 놓여 있다. 그는 정신없이 먹었다.

그리고 다시 쓰러졌다. 그리고 사흘 만에 깨어났다. 그동안 고열과 신음이 지속되었다는 걸 노인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앓아눕는 동안 그는 공중에서 앓고 있는 그를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그와 앓는 그가 왜 다른지 그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둘 다 모두 자신이었다. 그 후에도 고열과 혼수(昏睡)는 단속적으로 찾아 왔다. 앓는 그와 지켜보는 그가 다른가 하면 같았고, 같은가 하면 달랐다. 마를 살도 없었지만 그마저도 졸아들었다. 그의 몸은 겨울나무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켜보는 그가 앓는 그를 놔두고 영영 떠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잠에서 깨어나 겨우 눈을 떴다. 아침 햇살이 창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갑자기 사방이 시끄러웠다. 새소리가 그의 귀를 느닷없이 간질였다. 그는 일어나 집안을 둘러보았다. 노인은 외출했는지 집안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제서야 그는 그가 묵고 있는 곳이 숲속인 줄 알았다. 넓은 마당이 있는 일자형 초옥이었다. 초옥 밖으로는 잡목이 있고 잡목은 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마당에 꽂히는 햇살은 그가 살던 천변의 물비늘처럼 반짝였다. 마당가에 서 있는 감나무와 맞은 편 살구나무에서 새들이 지저귀었다. 숲 속에선 두견새가 울었다.

그는 사립문 밖으로 나갔다. 잡목 사이로 철쭉이 아련하게 손을 흔들고 있다. 그는 철쭉에게 갔다. 산속의 철쭉은 색이 더 진했다. 진분홍 철쭉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문득 가슴 밑바닥에서 살아 있다는 느낌이 솟구쳐 올라왔다. 눈앞의 진분홍 철쭉이 빨간 불꽃으로 바뀌었다. 그의 가슴 속에서도 똑같은 불꽃이 일었다.


그의 가슴이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그는 헉헉 거리며 불꽃을 토해냈으나 그럴수록 더욱 맹렬히 타올랐다. 이윽고 기진한 그는 주저앉고 말았다. 불꽃도 가라앉았다. 그는 느꼈다. 불꽃은 토해진 게 아니라 저 깊은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언제든지 타시 타오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불꽃은 낯설고 기이한 느낌이었지만 한편으론 황홀하기도 했다. 열 살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 힘들었지만.

그날 이후 그의 기력은 날이 갈수록 회복되었다. 그는 황홀한 불꽃이 타오를까 겁을 내면서도 기다렸다. 한 달쯤 지난 후 맞은 편 고산준봉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걸 노인이 보았다.


다음 날부터 그는 노인의 지시에 따라 아침마다 향로봉 꼭대기에 물을 길러야 했다. 향로봉은 그야말로 까마득한 봉우리다. 항상 구름에 휩싸여 그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 일년에 손꼽을 정도다. 꼭대기에 거대한 바위가 있고, 바위의 뿌리 곁에 샘물이 있다. 돌에서 솟아나는 석수인데 이루 말할 수 없이 차가웠다. 노인은 찻물로는 향로봉 약수가 천하제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식전 차를 마시기 위해 그에게 약수를 떠오라고 했다. 향로봉은 모옥의 뒷산으로 너무 험해 사냥꾼도 오지 않는 곳이다. 경사는 가파르고 숲속에는 온갖 맹수와 독충류가 들끓어 걸음 하나하나마다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곳이다.

그는 새벽별이 떠 있을 때 일어나 산길을 올랐다. 등롱도 횃불도 없이 어둠속에서 산길을 오르내렸다. 일년이 지나자 노인은 물통 대신 찻주전자를 내주었다. 주전자에 물이 찰랑찰랑 담기게 떠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찬기운이 오롯이 남아 있을 것을 주문했다. 그는 다람쥐보다 빨리 향로봉을 오르내렸다. 일년이 지나자 찻물은 주전자 뚜껑이 담기는 곳과 완벽하게 수평을 이루었고, 찻물은 뒤란에 있는 우물에서 길어온 것보다 차가웠다. 

다시 일년이 지나자 노인은 이제 적운봉에 가서 찻물을 떠오라고 했다. 적운봉은 향로봉의 맞은편 봉우리로 모옥에서 바라보면 고개를 직각으로 들어야 정상의 구름이 겨우 보일 듯 말 듯한 봉래산 최고의 봉우리다. 그곳은 기암괴석과 천애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악산으로, 올라갈 때는 기어가야 했고 내려올 때는 구르거나 날라야 했다. 다시 물통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육개월 만에 찻주전자로 바뀌었다.   

그는 모든 것을 견뎠다. 새벽에 일어나 캄캄한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배가 고파 헛것이 보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힘들지만 새벽에 찻물을 떠오고 오전에 밥을 하고 오후에 나무를 하면 적어도 먹을 것은 주어졌다. 또한 거지라고 손가락질하고 침을 뱉던 사람들로부터 벗어난 것만으로도 그는 살만했다. 멸시와 냉대 속에서 키워오던 분노는 사라졌지만 이상하게도 열병의 끝에서 나타난 불꽃은 세월이 가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다. 그는 불꽃이 이는 날이면 하염없이 산속을 돌아다녔다.

그날도 제어할 수 없는 불꽃에 이끌려, 서리가 내린 늦가을임에도 불구하고 계곡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몸은 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으나 속은 화끈거렸다. 계곡에 철쭉이 피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몽환적이었다.

그때 바위 위에 노인이 나타났다.

"네 안의 뜨거움을 다스리고 싶으냐?"
"네."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날 저녁 노인은 그의 뼈보다 굵은 목검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의 나이 열 세 살였다.

꼬끼오, 새벽닭이 울었다.
흠칫 깨어나 눈을 뜨니 동창이 희뿌연하다.
무영객은 일어나 앉아 벽에 기댄 협봉도를 쳐다보았다. 칼은 밤새 울며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월, 수, 금, 주3회 연재합니다.
#무위도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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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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