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살아야 하는 이유>, 사계절출판사, 2012.
사계절출판사
"왜 태어난 것인가? 왜 살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왜 세계에는 행복한 자가 있고 불행한 자가 있는가? 세계가 망할까 내가 망할까? 애초에 이 세계는 불평등과 부정으로 가득차 있고, 정직한 자가 오히려 심한 꼴을 당하며 부정한 사람들이 행복의 향연에 도취해 있고, 한꺼풀만 벗기면 시기와 질투, 선망과 멸시, 적의와 증오가 소용돌이치는 세계가 아닌가. 이런 세계에 살 가치가 있는가? 인생에는 의미가 있는가?"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며 자신과 세계의 파멸을 바랐던 한 아들이 있었다. 그는 '세계를 찢을 만큼의 절박'한 물음을 안고 있었지만, '어른들'은 아무도 그 물음에 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끝없는 번민과 물음을 반복하던 아들의 표정이 언제부턴가 세계, 타자, 자신과 화해한 것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무구해졌다. 그러나 아들이 회심하고 거듭난 것이라고 생각한 바로 그때 아들은 세상에 안녕을 고하며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수 년 전, 열병처럼 나 역시 "왜 태어난 것일까? 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이런 세계에 살 가치가 있을까? 왜 하루 하루 이 고통을 견디며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내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인생에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품으며, 날마다 절망과 우울, 죽음을 곱씹었다.
"내 인생이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좋아질 가능성은 제로다. 희망이란 헛된 것이다. 차라리 정직하게 절망하자. 하지만, 그 다음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희망할 수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지?"라는 물음이 뒤따랐다. 하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내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점점 자신의 주위에 철조망과 같은 거대한 장벽과 울타리를 두르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들 때면, 소위 '옆구리가 시려서'가 아니라, 실존 자체에 대하여, 살아감 자체에 대하여 슬픔과 고독을 느꼈다.
지독한 열병을 앓고 난 뒤끝 즈음이었을까, 아니면 지독한 열병이 천천히 사그라들고 번민에도 지쳐가기 시작할 무렵이었을까. 나는 한 권의 책을 만났다. 바로 앞서 자신의 출생을주하고, 자신과 세상의 파멸을 바라며 끝없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다가 세상을 떠나고만 아들의 아버지가 쓴 책 <살아야 하는 이유>(강상중 지음, 사계절출판사, 2012)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와 가족들은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납을 삼키는 듯한 슬픔과 고통'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치유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들이 죽은 지 고작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일본의 도호쿠 지방을 대지진이 덮쳤고 후쿠시마에서 끔찍한 핵발전소 대참사가 발생했다.
"행방불명자를 포함해 2만 명에 가까운 생명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상에서 사라졌고 대지는 불모의 땅으로 변해 버렸다. 자연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유랑하는 처지에 놓였다. 세계의 파멸. 아들의 말이 뇌리에 스쳤고, 나는 곧바로 재난지역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계속해서 물어온 물음인 "이런 비참을 겪고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에 빠졌을 사람들, 절망에 빠져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해 번민하는 사람들이 꼭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권의 책을 썼다. "그럼에도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려네"라는 나치의 유태인 절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토르 에밀 프랑클의 말을 가슴에 담고. 죽은 아들과 함께 기도하는 심정으로 써내려간 강상중 도쿄대 교수의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책이다.
책이 나온 것은 2012년 11월이다. 저자인 강상중 교수는 앞서 2009년 3월에 <고민하는 힘>이란 책을 통해 한국 독자의 사랑을 많이 받은 바 있는데, 이 책은 일본에서 먼저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도 <고민하는 힘>의 속편형태로 제목이 붙어 출간되었다. 1998년 재일한국인 최초로 도쿄대학의 정교수가 된 재일동포 2세인 저자는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분석으로 일본 지식인 사회의 주목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텔레비전 토론프로그램이나 교양프로그램에서 냉정한 분석과 세련되고 지적인 분위기,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두터운 팬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책 속에서 그가 바라본 일본 사회의 현실은 이렇다. 100만 명의 우울증 환자와 연간 3만 명의 자살자, 10명 중 1명은 일자리가 없는 상황, 그리고 머지않아 찾아올 불안한 노후에 부들부들 떨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어떻게 살아나갈까 하는 절박한 싸움을 강요당하고 있다. 한국의 사정도 별반 다를 바 없다.
더욱이 '3.11' 이후, 일본 사람들은 지진 재해와 방사능에 대한 불안감을 안은 채, 연일 미디어를 달구는 금융파탄, 고용불안, 테러나 미사일 위협 등에 대한 보도를 접하며, 사람들은 일상화된 '비상사태'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특별할 것도 없는 하루가 몇 년, 혹은 몇십 년이나 계속되어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소비되어 가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상에 널려있는 견고한 광경이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3.11'만이 이런 비상사태의 원인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그 이전부터 '세계화'로 인해 고정적이며 견고한 근대사회는 이미 급격히 무너져 불확실성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고, 이제 우리는 일상화된 '비상사태'를 살고 있다. 이러한 비상사태가 앞으로도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10년 후는커녕 당장 1년 후, 2년 후조차도 어떻게 될 지 우리는 예상할 수가 없다.
"카지노화한 금융자본주의사회에서 영리활동은 일체의 모럴이나 윤리, 의미 부여가 떨어져 나가 스포츠 같은 경기가 되었고, 승자만이 살아남아 행복의 축배를 들 수 있습니다. 패자는 불행해질 뿐 아니라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딱지가 붙고 경기장 밖으로 쫓겨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게임에서 패자의 굴욕과 불행을 맛보지 않으려면 승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승자가 되기 위한 마음가짐이나 노하우가 있다'는 메시지로 샤워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그렇다면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보람이나 의미, 행복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종의 '행복의 기준' 같은 것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이것은 학습된 것이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망, 비교 속에서 고착화된 것이기도 한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어떤 인생을 행복이라 생각하는지 들여다 보면 대강 이런 식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행복의 첫번째 기준은 돈이다. 월수입이 수억원까지는 아니라도 일단 먹고사는 데 곤란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수입이 있고, 거기에 더해 소소한 취미활동과 교제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으면 좋다. 그러려면 직장에 다녀야 하는데, 이왕이면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둘째는 애정문제이다. 열애까지는 아니라도 다투지 않는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는 반려자와 아이가 있기를 바란다. 셋째, 건강도 중요하다. 완벽히 건강하진 못하더라도 치명적인 병에 걸려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노후문제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일찍 죽는 위험보다 장수에 수반되는 위험이 더 커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되도록 오래도록 일을 하고 싶어 하고, 건강한 동안에 열심히 일하거나 돈을 모아두어 노후에 대비하려고 한다. 그래야 비참한 노년을 보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입장과 가치관에 따라 서로 행복의 기준이나 필요충분조건이 조금씩은 차이가 나겠지만, 앞서 나열한 네 가지가 지금껏 흔히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느끼는 것들의 최대공약수가 되어 왔다. 즉, 적어도 이 정도는 갖추어야 '소박하고 평범한 수준의 행복'이라고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고작 이 정도로는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바꿔 말하면 우리 부모님들 대다수가 자녀들에게 말하는 "네가 큰 돈을 벌고 크게 성공하는 걸 바라는 게 아냐. 그저 평범한 직장인 만나서 평범하게 결혼하고 애낳아 크게 먹고 살 걱정없이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거지"라고 말씀하시는 '평범한 삶', '평범한 행복'의 기준에는 적어도 앞에 나열한 네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평범함'이라는 것 자체가 이제는 절대로 '평범함'일 수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이 '평범한 행복'조차도 누구나가 쉽게 가질 수 있는, 노력한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삶이 아니기 대문이다. '고작'이 아니라 이 정도의 행복은 이 시대의 기준치고는 굉장히 '높은' 수준의 목표이다. '고작 그 정도'의 행복에도 매달리지 못해 탈락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그런 행복은 이제 일부의 혜택받은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목표이자 소원이 '정규직'이 되어버린 지금, 이 우울한 시대의 한복판, 모든 것이 불안정한 일상적인 비상사태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삶의 보람과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좌절하지 않고 기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러한 '끙끙거림'과 불안 해소를 위한 치료법을 다룬 책이나 부정적인 사고를 긍정적인 사고로 바꿔주는 자기계발서와 심리학 서적 같은 것에 의존해 마인드컨트롤만 잘 하면 되는 것일까. 만일 취직이 잘 안 되고 실업자가 되거나, 결혼에 실패하거나, 내게 닥친 큰 재난과 불행에 대응할 수 없어 허우적대고 있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평범한' 행복조차 가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고, 내가 못나서이고, 내가 이 사회의 '루저'일 뿐인 걸까? 이 물음에,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사람들의 머리를 실컷 두드려 패놓고 그 다음에 진통제나 습포제를 파는 그런 악덕상술 같은 문화에 정말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듭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 자살에 실패한 사람 등 어려움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시대의 병리로 취급하지 않고, 자기실현에 실패한 평범한 사람의 무리로 보지 않고,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이라며 잘라 버리지도 않고, 그들을 닥치는 대로 자기다움의 탐구로 내모는 현실을 분명히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그는 시장경제 안에서는 사람이 "누구로도 대체 가능한" 상품화되어, 사람의 존엄함이 현저하게 훼손되고 상처를 받는데,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으로 대체불가능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3.11 이후 일본에서 지진 피해지역을 응원하는 구호의 대부분이 "힘내라 일본" 일색이었고, 거의 모든 국민에게 "자숙"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개인'은 없고 '균질화된 군중'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그런 군중'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며, 둘도 없는 생명을 갖고 주장을 가진 개인'이라는 것이다.
또 일부 미디어와 매스컴의 동향을 보면 '과거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미래'라는 식의 담론으로 3.11을 잊어버리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며, 일본사회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3월 11일의 경험을 어떻게든 '거듭나기'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내내 반성없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몇 번이고 좌절하면서도 우리는 한 번도 철저하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멈춰서는 일조차 없이 그저 '실패를 망각하는' 방법만으로 오늘날까지 살아온 것처럼 생각됩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이며, 인간은 누구에게나 존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소중한 가치가 있고 인간의 진가는 삶의 '태도'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인생의 물음에 답하며 삶을 살아가는 한 순간 한 순간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에 대하여 이렇게 조언한다. 아니, 조언이 아니라 죽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독자들에게도 보내는 그의 기도인지도 모른다.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목적으로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즉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이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괜찮다는 것, 지금이 괴로워 견딜 수 없어도, 시시한 인생이라고 생각되어도, 마침내 인생이 끝나는 1초 전까지 좋은 인생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 특별히 적극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특별히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당신답다는 것. 그러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찾을 필요 같은 건 없다는 것.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하게 쌓아 나가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는 저절로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태도로 삶을 대하라고.
또 이 책을 관통하는 중요한 말 중 하나가 '거듭나기'인데, 저자는 윌리엄 제임스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생사의 갈림길을 헤맬 정도로 마음의 병을 앓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빠져나간 지경에 도달하고 세계의 새로운 가치라든가 그때까지와는 다른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건전한 마음으로 보통의 일생을 끝내는 '한번 태어나는 형once born'보다는 '병든 영혼'으로 두번째 삶을 다시 사는 '거듭나기twice born'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그는 말합니다. 이러한 사고는 종래의 행복과 고난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재검토하는 것으로서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행복한 인생을 보내고 싶으면 밝고 건강하고 즐겁고 적극적이고 모두와 사이좋고 무슨 일에든 끙끙 앓지 말고 언제나 긍정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의 낙관론이나 행복론은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이 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낙관론적 인생론이나 행복론을 체로 쳐서 비관론을 받아들이고, 죽음이나 불행, 슬픔이나 고통, 비참한 사건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인생을 마음껏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인간이 덧없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디까지나 겸허히 인간적인 것을 긍정한다"는 테리 이글턴의 말처럼.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이 사회에 대해서도 일갈한다.
"사회를 재검토할 때 (인간의) '존엄'이 의식화되는 사회, 사람의 '유일성'이나 '일회성'이 의식되는 사회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을 상품화하여 물건처럼 취급하는 시장경제의 존재방식이나 사람을 이름없는 군중으로 바꾸고 공공영역을 생략해버리는 사회의 문제에도 새로운 빛이 비칠 것입니다."그러기 위해서는 행복방정식을 바꾸는 것이 불가결하다고 말한다. 그래야 우리는 이 사회와 자본이 만들어낸 행복방정식을 자신에게 적용해 자신을 실패자로 생각하며 비참함과 절망에 빠지는 '자기추방형' 사고에서 조금씩 벗어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 생겨난 사회 속에서 우리 모두가 '거듭나기'의 인생을 오래오래 즐기기를 그는 다시 기도한다.
책을 읽고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면서도 어딘가 조금은 끝까지 밀어부치지 못한 듯한, 어딘가는 아쉬운 듯한, 뭔가 찜찜한 느낌도 남았지만, 나는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인생의 물음에 답해야 하는 순간마다 자주 이 책을 꺼내들곤 한다. 그리고 내게 말한다. "우울해도 괜찮아. 고민해도 괜찮아.늘 웃지 않아도 돼."라고. 다시금 읽고 또 읽되, 가족과 친구와 그밖의 수많은 누군가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사계절,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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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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