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의 순교 모습, 이게 전부라니...

수천년 흘러도 흔들리지 않는 불법(佛法), 찾고 싶어

등록 2014.03.24 14:25수정 2014.03.2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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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우리 민족과 함께 했던 불교의 성지는 어디일까? 전국의 유명한 사찰들이 떠오르지만 막상 '불교 성지'란 이름과는 걸맞지 않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이차돈을 떠올려 보았다.


삼국시대 불교 전래를 찾아보니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순도, 백제의 마라난타, 신라의 묵호자 등의 이름이 나온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본 기억은 이차돈에 한정된다. 짧은 역사적·종교적 지식 탓이지만 그만큼 이차돈의 순교 모습이 극적으로 각인돼 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봄비가 오락가락한 지난 20일 이차돈을 찾아 경주로 떠났다. 아니 이차돈이 아닌 불교성지를 찾아 경주로 떠났다고 한 것이 맞을 것이다. 목을 베자 젖같은 흰 피가 한 길이나 솟았다는 유명한 일화 속의 이차돈이 아니라 첫 순교자인 이차돈과 불교의 기원이 실제로 우리 곁에 어떤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고구려에 최초로 불교가 전해진 시기가 소수림왕 때인 372년, 백제가 침류왕 때인 384년, 신라는 묵호자에 의해 전래된 시기가 눌지왕 때인 457년이다. 하지만 신라가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한 것은 법흥왕 때인 527년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미 1500년의 역사가 흘러버린 탓인지 경주에서 만난 불교 전래의 기록이 선명하지 않다. 각종 유적지도 추정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불교의 성지라기보다 그냥 경주에서 보는 역사 유적지라고 하는 게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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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 순교비 이차돈의 목에서 흰 피가 솟아오르고 꽃비가 내리는 모습과 순교에 관한 글이 새겨진 비석으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안미향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만난 이차돈 순교비는 시간의 무게가 오롯이 전해온다. 돌에 새겨 넣은 글자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바래져 있다. 사람들이 손으로 만져도 될 정도로 노출이 돼 있다. 이렇게 전시해도 되는지 걱정스럽다.


이차돈의 목이 잘리우는 모습이 돌비에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젖이 한 길이나 솟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는 박물관의 설명문 그대로 돌비에 그려져 있다. 돌비는 이차돈이 목이 잘린 후 290년이 흐른 헌덕왕 9년(817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300년 가까운 시간동안 '한 길이나 치솟는 젖 같은 흰 피'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라는 신격화된 요소가 가미됐을 것이다.

이는 불교가 공인되고도 이차돈의 순교가 세간에 인정을 받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음을 나타낼 수도 있다. 신라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토속신앙의 견고함과 이를 지키려는 기득권층의 탄압, 백성들의 무관심을 이기고 불교가 신라 땅에 자리 잡는 과정이 처절했을 것임을 땅에 떨어져 뒹구는 이차돈의 머리에서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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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 이차돈이 순교할 때 그의 목이 떨어진 곳에 세워진 절이라고 전해진다. ⓒ 안미향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진 곳은 설명문에 '금강산'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머리가 떨어진 곳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추사(刺楸寺)'이다. 가시(刺)가 있는 호두(楸)가 곧 밤(栗)이니 '백률사(栢栗寺)'가 곧 '자추사'일 것이라고 박물관의 설명문에 적혀져 있다. 이차돈의 비석이 세워진 곳도 백률사이니 이 곳이 이차돈과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은 분명할 것이다.

경주 동천동에 자리한 백률사의 해설판의 설명은 이곳이 자추사라는 확신이 없어 보였다. '백률사는 자추사일 것이라고 한다. 자추사가 맞다면 ~ 이차돈을 기리기 위한 절이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1천년을 훌쩍 넘긴 세월이니만큼 충분히 이해가 가는 문구다. 백률사에서 이차돈의 흔적은 현대에 들어와서 만든 종에 새겨진 이차돈 순교 모습, 그림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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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보물 제121호로 바위사면에 아미타삼존불, 약사불, 보살입상,불입상등이 조각되어있다. ⓒ 안미향


오히려 절에 오르기 전 굴불사터에 서 있는 석조사면불상이 이 곳이 천년고도 경주임을 확인시켜 준다. 경주에 수십 차례 왔지만 처음 보는 불상들이다. 경주 전체가 국립공원인 이유가 올 때마다 처음 보는 불상들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리 보물에 대해 무관심했던 탓이기도 하다. 보물 제121호인 석조사면불상은 바위의 서쪽에는 아미타불, 동쪽에는 약사여래불, 북쪽에는 미륵불, 남쪽에는 석가모니불을 각각 새긴 사방불(四方佛) 형태다.

사면불상 주변은 기도터로 변해 있었다. 명문대학에 합격했다는 플래카드 3~4개가 붙어있다. 기복종교로 변한 우리네 종교의 현실은 이해하지만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 미륵불, 석가모니불이 신도들의 자녀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주기 위해 1천년이 넘는 시간을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은 아닐텐데. 물론 이는 불교에 한정된 현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차돈을 찾아다녔더니 이차돈과 떼레야 뗄 수 없는 이가 바로 법흥왕이다. 이차돈보다 오히려 신라 불교 도입의 주인공 역할을 한 이가 바로 법흥왕이라고  할 수 있다. 법흥왕릉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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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릉 경주 효련동에 위치한 법흥왕(재위 514-540)의 능 주변으로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 안미향


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 부근에서 농로를 따라가 법흥왕릉을 찾을 수 있었다. 법흥왕릉 역시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른 추정일 뿐 이곳이 법흥왕릉이라는 확인은 아무도 해줄 수 없다. 차를 세우고 호젓한 오솔길을 10분여 올라가 만나는 법흥왕릉은 장엄하기보다 운치가 있다.

굳이 발품을 팔아 찾지 않는다면 경주를 아무리 많이 왔다가더라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불교가 공인된 후 장례문화가 간소화됐다는 경주 박물관의 설명문을 고려하더라도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국가의 기반을 세운 왕의 무덤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담하다. 소담한 왕의 무덤이 나쁘지 않다. 소담한 이 무덤이 법흥왕의 진짜 능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역사의 두께에 따라 불교의 기원도 확인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00년을 못살고 가는 인생들에게 15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힘에 부치는 것은 분명하다. 법흥왕이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불교를 공인한 것도 맞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불법(佛法)이 원래 의도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유적의 기원을 정확하게 알고자 경주를 찾은 것도 아니다. 다만 수천 년을 이어온 감추었던 불법(佛法)이 이제는 이 땅에서 살아 움직여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분명 불교가 있었으니 부처님이 이 땅에 전하고자 한 불법(佛法)이 있었을 것이다. 수천 년의 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불법(佛法)을 찾아 나서고 싶다.
#불교 #이차돈 #순교 #유적 #법흥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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