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남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습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에 참석하고 나서

등록 2014.04.01 15:52수정 2014.04.0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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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주일 전인 지난달 24일 저녁 나는 전북 전주시 풍남문 광장에 있었다. 부정불법선거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유신독재의 상속자가 역사의 퇴행을 감행하고 있는 혼돈의 시대 한복판에서 민주주의의 회복을 염원하는 작은 촛불 하나 나누어 들기 위해 나는 다시 먼 길을 달려갔다.


일 주일 전의 일을 오늘 기록하는 것은, 그것은 결코 일 주일 전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시간은 일 주일 전이 되었지만, 그날 그 자리의 촛불은 지금 이 시각에도 계속 빛을 발하고 있다. 전주 전동성당 근처 풍남문 광장을 가득 메웠던 뜨거운 외침과 기도, 정의를 갈망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염원하는 그 촛불들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그날의 기도가 뜨겁게 지속되고 있음을 스스로 감득하는 마음으로 나는 이 글을 쓴다.     

9년 만에 다시 찾은 전주성당과 풍남문광장 

전주 전동성당에서  2005년 8월 7일 우리 가족은 우리 가족 '신앙의 고향'인 전주 전동성당을 순례했다.
전주 전동성당에서 2005년 8월 7일 우리 가족은 우리 가족 '신앙의 고향'인 전주 전동성당을 순례했다. 지요하

전주 전동성당과 풍남문은 나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우선 전동성당은 내가 젖먹이 시절에 세례를 받은 곳이다. 충남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에 300년 뿌리를 두고 있지만, 내 선친이 전주에서 결혼을 하고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덕에 나는 거저먹기로 천주교 신자가 될 수 있었다.

선친은 내가 4살 되던 해 고향 태안으로 돌아왔다. 나는 줄곧 태안에서 성장했으므로 4살 이전의 전주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6․25 전쟁을 겪던 젖먹이 시절, 방공호 속을 걷다가 넘어져 울음을 터뜨렸을 때 어머니가 얼른 품에 안아주어 젖꼭지를 물었던 기억 한 조각만이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전주 전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으므로, 전주 전동성당은 내 '신앙의 고향'인 셈이다. 오래 전부터 전동성당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을 느껴왔지만, 오랫동안 찾지를 못하다가 내가 세례를 받은 때로부터 무려 53년만인 지난 2005년 8월 7일(주일) 가족과 함께 처음으로 전동성당에 가서 미사를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오마이뉴스> 지면에 <53년 만에 전주 전동성당을 가다>라는 글을 올렸다.


전주 전동성당 미사 참례 2005년 8월 7일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전주 전듕성당에서 미사를 지냈다.
전주 전동성당 미사 참례2005년 8월 7일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전주 전듕성당에서 미사를 지냈다. 지요하

내가 2005년 가족과 함께 전주 성당을 찾게 된 것은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2004년 '본당 설정 40주년'을 맞게 된 태안성당은 '40주년 기념성당'을 짓게 되었는데, 전주 전동성당과 똑같은 형태로, 다시 말해 전국 최초로 '모방설계'에 의해 성당을 짓기로 했다.

당시 나는 40주년기념행사준비위원장 직무에 몰두하느라 성전 건축 쪽에는 관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임 신부님과 성전건축위원들이 전국의 여러 개 고색창연한 성당들을 두루 둘러본 다음 전주 전동성당을 모델로 삼아 좀 더 크고 우람하게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성당을 짓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그때의 심정은 묘했다. 나는 다소 건방진 표현으로 태안성당의 뿌리와 같은 사람이다. 1957년 태안 읍내에 처음 천주교 공소 건물이 지어졌을 때 읍내(남문리와 동문리)에는 천주교 신자 가정이 우리 집 한 집뿐이었다. 우리 집은 태안성당의 뿌리이고 토대이며 산 역사인 셈이다.

내 선친이 전주 전동성당에서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태안성당의 최초 신자이자 최초 성가정으로 '씨앗'의 소임에 최선을 다했으니, 그 소임이 자식에게로 이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풍남문 앞에서  2005년 8월 7일 우리 가족은 풍남문광장에서 기도를 했다.
풍남문 앞에서 2005년 8월 7일 우리 가족은 풍남문광장에서 기도를 했다. 지요하

그런데 태안성당 최초 신자였던 우리 가족 신앙의 고향인 전주 전동성당과 똑같은 형태의 성당이 태안에 지어지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묘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불현듯 가족과 함께 전주 전동성당을 순례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선친은 예전에 별세하셨지만 모친은 살아계시니 모친 생전에 전주 전동성당을 순례하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2005년 8월 7일 실로 53년 만에 가족과 함께 전동성당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 가족은 전주 전동성당과 인접해 있는 '경기전'과 한옥마을을 둘러보았고, 풍남문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들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신해박해 때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다. 또 그때로부터 10년 후인 1801년 신유박해 때는 '호남의 사도'라 불리는 유항검과 4명의 지도자급 신자들이 같은 곳에서 처형을 당한 사실을 알고 왔기에 풍남문 앞에서 온 가족이 기도를 하기도 했다.

희망의 힘, 기도의 힘, 믿음의 힘으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들인 윤지충과 권상연을 비롯하여 7명이 순교한 전주 풍남문 밖 자리는 호남 교회의 모태가 되고 전교의 발상지가 되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때로부터 100년 후인 1891년 전동성당 초대 주임인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는 그 순교 자리를 매입하고 성당 지을 터전을 닦았다   

사제 행렬 3월 24일 저녁 7시 전주 풍남문광장에서 거행된 전주교구 시국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사제들이 행렬을 지어 입장하고 있다.
사제 행렬3월 24일 저녁 7시 전주 풍남문광장에서 거행된 전주교구 시국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사제들이 행렬을 지어 입장하고 있다. 전재우

그런 역사적 사실들을 비교적 소상히 알기에 나는 전주 풍남문 앞 광장과 전동성당에 대한 느낌이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전주 전동성당은 내가 젖먹이 시절에 세례를 받은, 내 '신앙의 고향'이 아닌가.

나는 내 신앙의 고향을 찾아가는 심정으로 지난날 24일 전주를 갔다. 지난해 11월 22일 전주교구 군산 수송동성당 시국미사를 시작으로 전국 각 교구의 시국미사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대전교구 봉산동성당, 수원교구 화성 기산성당, 마산교구 거제 고현성당, 수도회연합회의 서강대 예수회센터, 광주대교구 남동5.18기념성당, 원주교구 우산동성당, 부산교구 대연성당, 인천교구 부평1동성당의 시국미사에 참례한 후 3월 24일에는 전주를 간 것이다.

그동안의 교구별 시국미사는 모두 성당 안에서 봉헌되었다. 성당 안이 비좁아서 불편이 컸지만, 계절 때문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전주교구의 두 번째 시국미사는 성당 안이 아닌 전동성당 근처 풍남문광장에서 봉헌된다고 했다. 성당 안이 비좁을 것과 3월 말의 봄기운을 고려한 것이겠지만, 우선은 풍남문광장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의의를 더 많이 고려했을 터였다.

나는 고마운 마음이 한량없었다. 풍남문광장에서 시국미사를 봉헌하기로 결정한 정의구현전주교구사제단에게, 또 좋은 날씨를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촛불을 들 수 있었다. 봄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바람 한 점도 없어서 풍남문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들이 꺼지는 일은 전혀 없었다.

문규현 신부님의 열렬한 강론을 귀담아 들었다. 비통함을 안겨주는 통렬한 음조의 강론이었지만, 천주교 신자인 내게 복음정신을 되새기며 희망을 갖게 하는 내용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 박근혜는 선거쿠데타
 박정희는 유신독재, 박근혜는 언론독재
 박정희는 중앙정보부, 박근혜는 국가정보원
 박정희는 공안 통치, 박근혜도 공안 통치

전주교구 시국미사 천주교정의구현전주교구사제단이 3월 24일 저녁 전주 풍남문광장에서 시국미사를 봉헌했다.
전주교구 시국미사천주교정의구현전주교구사제단이 3월 24일 저녁 전주 풍남문광장에서 시국미사를 봉헌했다. 전재우

박정희와 박근혜를 대비시키며 공통성을 제시하는 말 가운데서 나는 특히 '언론독재'라는 표현에 필이 꽂혔다. 언론독재의 확실성이 다시 한 번 부각되고 확인되는 느낌이었다. 오늘 박근혜가 존재하며 계속 독재회귀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언론독재 덕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오늘 우리나라의 방송매체들과 보수언론들은 이미 언론이 아니다. 정권의 나팔수에다가 보호막 역할 쪽으로만 전력질주하고 있다. 특히 방송매체들은 미쳐 돌아가는 형국이다.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역할뿐만 아니라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그것의 효과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도 같다.

검찰과 법원과 언론 모두 고유의 기능과 임무를 도외시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믿을 만한 데가 없다. 믿을 수 있는 곳은 종교계뿐이다. 그것도 일부로 한정되어 있다. 종교를 내걸고 또는 보수라는 이름으로 부정 불법을 자행한 모리배들과 결탁하거나 편들어주는 성직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전주교구의 풍남문광장 시국미사가 거행되기 전에도 '대수천' 회원들과 군복들의 시국미사 반대 집회가 전동성당 근처 '경기전' 앞에서 있었다. 잠시 그들의 발언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입에는 '종북세력 척결'이라는 말이 달려 있었다. 인권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치도 않는 북한의 실상이 맹렬히 거론되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이 시국미사 반대 집회를 갖는 목적은 한 가지였다. 불법선거 불인정과 부정선거 옹호였다. 그들이 별의별 소리를 다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집회 이유와 목적은 '부정선거 옹호'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부정불법선거 옹호를 위해 매번 시국미사를 쫓아다니며 저리도 기를 쓰고 악담들을 퍼부어대니, 아무리 생각해도 온전한 사람들 같지가 않다. 그들이 하느님 소리를 입에 담으며 대한민국과 천주교를 수호한다고 아무리 떠들어봤자, 민주주의를 죽이자는 소리로밖에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풍남문 광장의 시국미사 3월 24일 저녁 전주교구 시국미사에 참례한 사제, 수도자, 신자들이 풍남문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풍남문 광장의 시국미사3월 24일 저녁 전주교구 시국미사에 참례한 사제, 수도자, 신자들이 풍남문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전재우

미사에 집중하여 기도에 몰입하는 가운데서도 건듯건듯 조금은 허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언론들의 고의적인 무시로 시국미사 소식이 세상에 널리 전파되지 않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국미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마다 허무한 마음이 든다는 한 분 사제의 술회도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더욱 뜨겁게 기도하며 두 손을 더욱 굳게 쥐었다. 내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기에, 또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이기에 이 자리에 있음을 거듭 상기했다. 나는 무언가를 신념하고 또 무언가를 희망하는 사람이기에 노고를 무릅쓰고 먼 길을 달려가서 수많은 사제, 수도자, 신자들과 함께 손을 잡고 기도를 하는 것이다.

나는 희망의 힘을 믿고 기도의 힘을 믿는다. 그 믿음의 힘 때문에 지난달 24일에도 충남 태안에서 전주를 갔다. 저녁 7시에 거행된 풍남문광장 시국미사를 마치고 심야에 홀로 태안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희망의 힘, 기도의 힘을 다시 한 번 내 마음속에 되새겼다. 앞으로도 그 믿음의 힘으로 더욱 힘차고 줄기차게 전국 각지의 시국미사에 참례할 생각이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천주교전주교구 #전동성당 #풍남문 #태안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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