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새벽 2~4시,
군대에서 믿지 못할 사건이...

30주기 맞은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 아버지 허영춘씨 "아들 명예 꼭 지킬 것"

등록 2014.04.01 21:18수정 2014.04.01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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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허원근 일병 시신이 발견된 장소는 세 발의 총상을 입은 곳이라기에는 아주 깔끔하게 정리된 유류고 근처다.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허원근 일병 시신이 발견된 장소는 세 발의 총상을 입은 곳이라기에는 아주 깔끔하게 정리된 유류고 근처다. ⓒ 의문사위


1984년 4월 2일. 강원도 화천군에 위치한 육군 7사단 소속 모 부대 폐 유류고에서 한 군인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는 좌우 가슴에 한발씩 그리고 오른쪽 눈썹 부위를 관통한 총상으로 목숨을 잃었다. 군 헌병대는 '사망자가 M-16 소총을 이용하여 좌우 가슴에 스스로 한발씩 방아쇠를 당겼고 그래도 죽지 않자 다시 마지막 3번째 방아쇠를 자신의 머리에 향해 당겨 자살했다'고 결론 내렸다. 사망한 군인의 이름은 허원근이었다. 당시 22살이었다.

하지만 이 헌병대 수사 결과에 납득할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비상식적인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자살하기 위해 연발도 아닌 단발로 세 번이나 총을 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에 대한 의문은 사건 발생 후 30년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 사건이 2014년 4월 2일로 만 30주기를 맞이했다. 나는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씨를 만나 지난 30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아버지 허영춘씨의 30년 기록이다.

지난 30년간의 몸부림 중 가장 괴로웠던 건...

a 유가협에서 아들 영정을 바라보는 아버지 창신동 유가협 사무실에서 아들 허원근 일병의 영정을 바라보는 아버지. 어느덧 75살이 된 아버지에게 아들은 늘 22살의 청년으로 남아있다.

유가협에서 아들 영정을 바라보는 아버지 창신동 유가협 사무실에서 아들 허원근 일병의 영정을 바라보는 아버지. 어느덧 75살이 된 아버지에게 아들은 늘 22살의 청년으로 남아있다. ⓒ 고상만


개인적으로 허원근 일병 사건을 처음 알게 된 때는 1993년 4월이었다. 당시 나는 '전국 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약칭 유가협) 간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 단체 사무국장이었던 박래군 선배가 허원근 일병 의문사 파일을 주며 사건을 분석해 보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처음 만난 당시 50대의 아버지는 어느덧 지금 75살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 아버지를 지난 3월 24일 국회에서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지난 30년 세월에 대한 아버지의 기억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 30년 세월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인지 여쭤봤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너무나 의외였다. "너무도 지루한 세월이었다"는 것이었다. 힘들고, 고통스럽고, 또는 외롭고 분노스럽다는 등등의 표현을 예상했는데 아버지의 답은 정말 뜻 밖이었다.

"30년 세월이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지루했어. 뻔한 진실을 가지고 30년 동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열심히 걸어가도 다시 제자리,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 또 뛰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30년 세월이었네. 나로서는 앞으로 얼마나 더 걸어갈 수 있을지, 이젠 더 걸어갈 시간도 얼마 없는데 안타깝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흔적은 '정말 치열한 싸움'이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1인 시위와 거리 노숙 농성을 한 사람 중 가장 많은 횟수를 기록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닐까 싶다. 재야단체 중 거리에서 천막치고 농성 많이 한 단체가 유가협인데 그 농성에 늘 빠지지 않고 끝까지 남은 분은 바로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지난 30년 세월 중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을까 궁금했다. 질문을 받은 아버지가 잠시 곰곰이 생각에 빠진 후 던진 말씀이었다.


"원근이가 죽고 난 84년부터 88년까지 그 4년간이 가장 힘들었지."

"아들을 잃은 직후라서요? 저는 한겨울 노숙 농성이 힘들다고 하실 줄 알았네요."


"남들은 흔히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한겨울에 거리에서 자든 새벽 1인 시위를 하든 그런 것은 오히려 행복했지. 난 그때가 오히려 맘이 편해. 몸은 힘들어도 말은 할 수 있잖아. 그런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을 때가 가장 힘들더라고. 그건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

사연이 있었다. 아들 허원근 일병이 사망한 1984년 당시는 전두환 독재 권력 하였다. 그때 아들의 죽음을 당한 아버지는 억울한 마음에 미치듯 돌아다니면 억울한 아들의 죽음을 호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두환 독재정권하에서 '강요된 침묵'은 메아리조차 없었다. 억울한 아들의 죽음을 하소연하기 위해 언론을 찾아가도 기사 한 줄은 고사하고 들어주는 기자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는 아버지의 회상은 아픔이었다.

그러던 1988년 10월 어느 날, <한겨레>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본 아버지는 그날로 배를 타고 진도에서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군에서 의문사한 이들의 진실을 밝히라'며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유가협 회원들이 농성하고 있다는 보도였다. 그날부터 무려 135일간 계속된 군 의문사 진상규명 농성 이후 아버지는 오늘까지 아들의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 세월이 30년 된 것이다.

희망과 절망, 그 30년의 기억

그럼 그 30년 세월 중에 아버지가 가장 희망을 느낀 때는 언제였을까?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때였다"며 아버지는 단박에 말씀하셨다. 이유가 있었다. 유가협이 어렵고 힘들 때마다 김대중 대통령이 참 많이 도와줬다는 것이다. 유가협이 쓰는 집 겸 사무실을 마련할 때도 김대중 대통령의 도움이 컸고 특히 명절 때마다 잊지 않고 유족들을 챙겨줬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이제 대통령이 되었으니 우리의 한도 곧 풀릴 것이라 믿었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자신의 임기 중인 2000년 11월,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를 출범시킨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당시 국회 다수당이었던 신한국당의 반대로 이 법 제정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유가협 회원들이 무려 453일간 거리에서 노숙 농성을 해야 한 이유였다. 여하간 그런 고생 끝에 만들어진 의문사위는 2002년 8월 26일, 허원근 일병에 대한 조사 결과 '타살'되었음을 밝혀낸다. 사건 발생 후 무려 18년 만의 진실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국방부가 아니었다. 의문사위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이틀 후인 28일, 국방부는 '특별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여 허 일병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한다. 이어 약 두 달여 후인 11월 28일 특조단은 의문사위의 '타살' 결론을 번복하고 '허원근 일병은 자살'이라며 다시 발표했다. 이런 자·타살 공방이 거듭되던 가운데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 것은 2010년이었다.

유족 측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1심 재판부가 유족 측의 손을 들어주며 '허원근 일병 타살'을 인정한 것이다. 재판에 출석한 한 증인의 증언이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사건 당시 허 일병의 소속 연대장이었던 김현태씨였다. 그는 법정에서 "(허 일병 사망) 당일 오전 7시경 출근하여 의자에 앉으니 곧바로 1대대장이 보고를 왔는데 그때 하는 말이 중대장 전령(허원근 일병)이 자살했다는 보고였다. 내가 군 생활하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접한 자살 사건이기에 똑똑히 기억한다"며 증언했다.

김현태씨의 증언은 의문사위가 밝힌 허 일병 사망 경위와 일치했다. 의문사위는 허원근 일병이 사망한 시각을 4월 2일 새벽 2시에서 4시 사이라고 발표했다. 반면 군 헌병대는 허 일병의 자살 시간을 날이 밝은 오전 11시경이라고 발표했다. 따라서 헌병대 발표대로라면 허 일병의 자살을 연대장이 아침 7시에 보고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 1심 재판부는 "법의학적 소견과 의문사위 증거 자료, 특조단의 수사 자료 등을 토대로 실체 파악한 결과 허 일병의 사망은 소속 부대 군인에 의한 타살"로 결론 내렸다. 26년에 걸친 논란이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될 것으로 아버지는 기대했다.

다시 시작된 진실 논쟁, 2심 재판부 '허원근 자살'

a "판결에 승복할 수 없다"는 아버지 허영춘 2013년 민사소송 2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후 기자회견을 통해 입장을 밝히는 아버지 허영춘. 아버지는 깅민구 부장판사가 원소 패소 판결을 내린 후 "참으로 훌륭하십니다"라고 한마디 한 후 법정을 나왔다. 왜 그랬냐고 묻자 "욕할 가치조차 못 느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판결에 승복할 수 없다"는 아버지 허영춘 2013년 민사소송 2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후 기자회견을 통해 입장을 밝히는 아버지 허영춘. 아버지는 깅민구 부장판사가 원소 패소 판결을 내린 후 "참으로 훌륭하십니다"라고 한마디 한 후 법정을 나왔다. 왜 그랬냐고 묻자 "욕할 가치조차 못 느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 고상만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2013년 8월, 3년 만에 열린 민사소송 2심 재판부는 허원근 일병의 사인을 '자살'로 다시 번복했다. 2심 재판부의 번복 사유가 무엇인지 아버지에게 묻자 답변은 간결했다.

"1984년 처음 사건 날 때 헌병대가 밝힌 내용을 그대로 다시 읽었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심경을 묻자 아버지는 "지금 30년 동안 원근이를 죽인 이들이 모두 사람이 넷이 있는데 첫째는 의문사위가 밝힌 총기 발사 혐의자, 두 번째는 원근이가 복무하던 7사단의 사단장, 세 번째가 의문사위 결과를 번복한 국방부 특조단장 그리고 넷째가 지난번 민사소송 2심 재판장이었던 강민구 판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30년 전 그 아들을 언제 마지막으로 봤을까?

"군대 간다고 아침에 절을 했지. 그리곤 진도에서 배 타고 육지로 나갈 때 마지막으로 봤으니까 1983년 9월이었네. 원근이가 장남인데 입대영장 나왔다고 하면서 혼자 배 타고 나갔거든. 그때 마지막으로 보고 다신 못 봤어.

그러다가 84년 4월 3일에 휴가받아서 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그 전날 부대에서 연락이 온 거야. 원근이가 자살했다고. 그래서 진도에서 배 타고 버스 타고 돌고 돌아 강원도 화천에 가보니 내 아들이 그렇게 죽어 있더라고. 억울했지. 너무도 억울했지. 만나보지도 못하고 아들을 잃었으니..."

그런 아들을 다시 만난다면 아버지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아버님. 만약 지금 다시 아들을 만난다고 생각한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30년 만에 24시간 동안만 허락된 시간을 갖게 된다면?"

아버지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받고 잠시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떻게 죽은 거냐고 묻고 싶어. 정말 너 어떻게 죽은 거냐고. 누가 널 이렇게 했느냐고. 아마 그걸 가장 묻고 싶겠지."

"그리고 다음에는요?"

"집에 데려가고 싶어. 진도 집으로... 집에 가서 밥을 먹여주고 싶어."

울컥 슬픔이 몰려왔다. 살기 바빠 아들의 입대 길을 따라가지 못한 아버지는 "그것이 한으로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을 잃고 30년 세월이 지났지만, 실제 아버지가 그 아들을 만나지 못한 세월은 이미 30년 세월을 훌쩍 넘긴 것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궁금하다고 한다. 바로 다음날이면 집으로 휴가 올 아들이 왜 죽었을까. 아무리 괴로워도 단 하루만 지나면 집에 올 수 있었던 아들이 그렇게 죽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믿기 어렵다고 했다.

"원근이는 나약한 아들이 아니었어. 어려서부터 집안 모든 일을 알아서 도와준 아들이었어. 내가 바닷일로 바빠 농사일을 못 하면 어린 나이에도 자기가 알아서 내가 놀랄 정도로 완벽하게 일을 마무리하던 아들이었어. 그런 아들이 나약해서 자살했다고 하니 나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지."

"아버지. 그럼 아들에게 30년 세월이 흐른 지금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말씀이 있을까요?"

"진실을 꼭 밝혀주겠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 자살하지 않았다는, 그래서 네 명예를 이 아버지가 꼭 지켜주겠다고 말하고 싶어."

의무복무 중 사망한 군인은 모두 순직 처리해야

1940년생.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75세가 된 아버지에게 지난 30년은 '아무것도 없는 시기'였다고 한다. 45살이 된 해에 아들을 잃었고 이후 30년간을 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왔기 때문이다. 그 사이 아버지는 위암 진단을 받고 큰 수술을 받았다. 지금도 여전히 회복기 중이다. 불행하게도 아들을 군에서 잃은 유족 대부분이 이 같은 아버지와 비슷한 고난을 겪고 있다.

군대 갈 정도의 아들을 두었다면 대략 50대 전후인데 이후 그 아들의 사인 규명을 위해 싸우면서 노년의 삶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판문점 김훈 중위 아버지 역시 그렇다. 이런 비극을 나는 지금도 계속 만나 오고 있다.

만약 오늘이라도 아들의 명예회복이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끝으로 여쭸다. 그러자 아버지가 처음으로 빙긋 웃었다.

"나 때문에 고생만 해 온 아내와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 싶어. 나도 나지만 엄마 심정이 어떻겠어. 그래서 의문사위 만들어진 후 차를 한 대 샀어. 아들 명예회복이 곧 될 줄 알고 미리 차부터 산 거야. 그런데 그 차가 이젠 10년도 넘어 고물이 되어 버렸네. 세월이 그렇게 흘러버렸어."

'부모가 돌아가시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그 말처럼 아버지의 가슴에는 아들 허원근 일병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이 아버지의 소원처럼 아들의 명예회복을 생전에 볼 수 있을까.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인터뷰를 끝내고 두툼한 서류를 든 채 되짚어 돌아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a 군 사망사고 명예회복 토론회 포스터 2013년 7월 5일, 국회 김광진 의원실에서 주최한 '군 사망사고 명예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회. 포스터 속 아버지는 경북 포항에서 국회 1인 시위를 위해 올라왔다. 이런 유족의 아픔을 치유해 주지 않으면서 언제까지 병역은 신성하다고 말할 것인가.

군 사망사고 명예회복 토론회 포스터 2013년 7월 5일, 국회 김광진 의원실에서 주최한 '군 사망사고 명예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회. 포스터 속 아버지는 경북 포항에서 국회 1인 시위를 위해 올라왔다. 이런 유족의 아픔을 치유해 주지 않으면서 언제까지 병역은 신성하다고 말할 것인가. ⓒ 고상만

30년 세월이 지났다. 그리고 다시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가야 할까. 자신을 "군에 자식 보낸 죄인"이라며 울부짖는 군 사망사고 유족의 심정을 이 나라 높은 분들은 알아야 한다. 특히 규제 철폐를 말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진짜 규제'는 징병으로 군에 간 아들이 죽었는데 그 명예회복을 막고 있는 잘못된 '군 인사법'이다. 의무복무를 강요하며 징병해 간 모든 군인에 대해 순직 처리하고 그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해 줘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규제 철폐'라고 나는 주장한다.

허원근 일병의 유해는 현재 마석모란공원 납골당에 임시 안치되어 있다. 아버지는 명예회복이 된 후 국립묘지에 안장해 주기 위해 이렇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허 일병의 30주기를 맞는 오는 2일 오전 11시, 허 일병을 기억하는 이들은 마석모란공원 납골당 앞에서 그의 추모제를 갖기로 했다. 허원근 일병의 30주기를 추모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명예회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또, 시간은 흐른다.
#허원근 일병 #허영춘 #군 사망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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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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