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과의 약속은 약속이 아닙니까

[주장] 국민들에게 공약 불이행은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등록 2014.04.17 11:32수정 2014.04.17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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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6·4지방선거'가 코앞이다. 큰 뜻을 품은 수많은 인재들이 정당의 공천을 받거나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노심초사, 동분서주를 한다. 그리하여 화들짝 피어난 봄꽃들처럼 후보들의 갖가지 공약들도 만발이다.

'공약'은 말 그대로 공적인 약속, 즉 '국민과의 약속'이다. 국민들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후보 쪽에서 자진해서 한 약속도 있고,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내건 약속도 있다. 무엇이 됐건 그것은 국민과의 약속이고 공개적인 약속이다.

하지만 아무리 공적인 약속이라도 국민과의 약속은 법적 구속력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약속이다. 약정서 따위는 아예 성립될 수도 없다. 그 약속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고, 요란스러울 정도로 방송을 탄다 해도, 그것이 계약서 같은 역할을 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그 공약 때문에 표심이 요동치고, 그 공약이 한 후보의 당선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더라도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는 그에게 없다. 공약과 공약실행 의무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논법은 언제나 유효하다.   

아무리 획기적이고 그럴싸한 공약이라도 공약으로 포장되는 순간 '거짓약속'의 징후가 나타난다. 대국민사기극이 공약으로 포장되는 현상도 생겨난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후보 쪽이 손해를 볼 위험성은 거의 없다.

대선 공약 발표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과 진영 정책위의장이 여의도 당사에서 제18대 대선 정책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대선 공약 발표지난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과 진영 정책위의장이 여의도 당사에서 제18대 대선 정책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권우성

국민들에게 공약 불이행은 전혀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거짓임을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거짓임을 알면서 속아준 때문일 수도 있고, 거짓말 자체를 좋아하는 습성 때문일 수도 있다. 또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관성과 좋은 게 좋다는 타성 때문에 빚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기세 좋게 그럴싸한 공약들을 내거는 후보 쪽에서는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될 건 없으니 거리낌 없이 잘 포장된 공약들을 내건다. 그들은 단순과 무지가 기반을 이루고 있는 국민대중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타개할 의무는 그들에게 없다. 똑똑한 국민, 생각할 줄 아는 국민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 따위는 그들에게 필요치 않다. 국민대중의 속성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것이 그들에게는 유리하고, 또 그것을 잘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민계몽보다는 계몽으로 포장되는 대중조작이 그들에게는 더 가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치 독일의 선전상 괴벨스는 언제라도, 정보 수단이 극대화된 오늘에도 음으로 양으로 그들에게 선생 노릇을 할 수가 있다.

'6·4지방선거' 초입머리 이전부터 온 나라에 새누리당을 상징하는 빨간 유니폼이 봄꽃들처럼 만개했다. 그 유니폼들은 한마디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파기'를 상징하는 것이건만, 그 상징을 알아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제18대 대선 때 했던 '기초자치 단체장과 기초의원 정당공천 폐지공약'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공약이 거짓이 되어 버린 현상을 목도하면서도 속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제18대 대선을 29일 앞둔 지난 2012년 11월 20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지방분권 촉진 전국기초광역의원 결의대회'에 참석해 화끈한 어조로 이렇게 공약했다.

"저와 새누리당은 기초자치 단체장과 기초의원에 대한 정당공천 폐지를 약속했습니다."


그의 말에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기초·광역의원들은 '박근혜'를 연호하며 열렬히 환호했다. 박근혜 후보는 그 '약속'에 대한 부연 설명도 명확하게 했다.   

"그동안 기초의원, 단체장에 대한 정당공천으로 인해 지방정치 현장에서 중앙정치 눈치 보기와 줄서기의 폐해가 발생했고, 비리 사건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초의원과 단체장에 대한 정당공천 폐지를 통해 기초의회와 기초단체가 중앙정치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 실질적으로 주민생활에 밀착된 지방정치를 펼치도록 돕겠습니다."

그러며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약속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약속, 약속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그 자신이 오늘 명확히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기초자치 단체장과 기초의원 정당공천 폐지공약은 박근혜만 했던 게 아니다.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도 했고, 문재인에게 후보를 양보한 안철수도 했던 공약이다. 그 공약 때문에 한 솥밥을 먹게 된 안철수와 김한길의 고민이 컸다. 오죽하면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가 된 안철수가 청와대를 찾아가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하면서 대선 공약을 이행하라고 애걸복걸을 했을까.

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대선 공약 파기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역시 공약 파기에 대한 사과나 해명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자신이 그런 공약을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문제는 국회에서 논의할 일이라고 특유의 유체이탈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나는 제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공약을 전적으로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정당 유니폼들을 보지 않게 되기는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정당에 구애받지 않고 특정 후보를 마음껏 지지할 수 있는 풍토나 분위기에 대한 희망을 접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에서 그 공약을 당연한 듯이 파기하고 의기양양하게 빨간 유니폼들을 온 거리에 출몰시키는 현상을 보면서 뼈아픈 절망감을 안아야 했다. 새정치민주연합도 결국 대선 공약을 파기하고 기초자치 단체장과 기초의원 공천을 실행하기로 한 오늘의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다. 울며 겨자 먹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또 한 가지 역사의 퇴행을 실감하는 오늘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6.4지방선거 #대선공약 파기 #기초선거 무공천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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